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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한 것인가 아니면 집착인가

글 / 대륙 대법제자

【명혜망 2008년 9월 2일】 비바람 속에서 걸어나온 동수들이여! 정법의 이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 자신이 걸어지나온 길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그러나 대법의 사업을 하면서 그렇게 정진하지 못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매 개인의 층차가 같지 않고 능력이 또한 같지 않기 때문에, 나는 이에 대해 강요하려고 하지 않는다. 진상을 알리는 중에 신중한 태도는 일부 무방하다. 그러나 만약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 재차 “모험”을 하면서 더욱 많은 진상 알리는 사업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불필요한 번거로움의 영향을 받아 지금의 층차에서 잘못될까봐 두렵다. 나는 여기에는 아주 많은 문제가 은폐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동수들은 잠재의식상에서 자각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대법의 일을 하는 것이 위험하다고 한다면, 매번 대법의 일을 하는 것은 모두 모험이다. 하는 일이 많으면 많을수록 가능하게 나타나는 일이 더 많다. 그러나 가서 하지 않으면 바로 층차에 영향이 있을까봐 할수없이 적게라도 할려고 한다. 나는 이러한 생각에는 사심(邪心)이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두려움과 안일한 마음으로 대법의 공간에서 교활하게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마음으로 대법의 사업을 하면, 당신이 얼마나 하던지간에 모두 사(私)를 위한 것이므로 순정하지 않다. 이러한 마음은 아주 쉽게 사악으로 하여금 공간을 뚫게 한다. 이것은 마치 당신이 생각한 것처럼 조금이라도 하면 바로 안전한 것이 아니다. 반대로 빠뜨림이 있는 것으로서, 사악은 바로 보아낸다.

나는 이러한 생각은 사부님을 믿지 않고 법을 믿지 않는 표현이라고 인식한다. 속인의 관념에서 문제를 대한다면 이는, 이성(理性)상에서 신의 사유로 문제를 생각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대법의 사업을 해도 위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 개인의 생각은 오직 사업하는 기점이 진정으로 남을 위한 것이라면, 이것은 법에 부합된다는 것이다. 만약 이 몇 가지 점에서 모두 바르게 한다면, 여기에는 그 무슨 다시 고려할 요소가 없다. 설령 어떤 일을 함에 있어서 일할 당시 능력이 차하면, 가능하게 하는 과정에서 사부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실 수 있다. 동수들이여! 항상 말하는 것은 아닌데, 사부님의 말씀이 바로 법이다.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두 제일 좋은 일을 안배하신다. 오직 우리들이 자신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바로 위험한 것이다. 진정으로 법공부를 잘하여 일사일념을 모두 법에 놓는다면 아무것도 두려울 것 없다. 사부를 믿고 법을 믿으면, 일부 일에서 어쩌면 위험하다고 생각할때 진정으로 하다보면 바로 위험이 나타난다. 어디에 아직 위험이 있을 수 있는가? 신성(神性)은 비할 바 없다. 우리들이 법공부를 많이 하여 진정으로 사람의 껍질에서 해탈되면 위험은 바로 우리를 멀리할 것이다.

동수들이여, 누구나 모두 정법은 이미 마지막 단계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수련은 엄숙하다. 그 하나의 마음을 가지고 천국으로 갈 수 없다. 우리들은 비바람속에서 모두 아주 많은 경험을 쌓았다. 우리들은 또다시 노력하여, 깊은 곳에 숨어있는 마음을 모두 찾아 수련해야 한다. 누가 움츠리고 앉아서 정법의 결속을 기다리겠는가? 그러한 더러운 교활한 마음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지 못한다. 사람들 속에서 걸어나와야만 비로소 신으로서, 용감한 것이다. 또다시 한 걸음 내디디자. 우리들이 정법의 결속시에 모두 능히 사부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자신의 세속에서 오염되지 않은 마음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문장완성 : 2008년 9월 2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문장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8/9/2/185131p.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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