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대륙 대법제자
[명혜망 2008년 8월 27일] 오늘 여자 동수 한 분을 만났는데, 그녀는 나에게 요즈음 상태가 상당히 좋지 못하고 법공부가 마음에 와닿지 않아 오랫동안 진상하러 나가지 않았다고 하소연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남편이 이 반 년 동안 겨우 3천원 밖에 벌지 못하여 생활을 지탱하기 어려워 아무리 심사숙고해도 내려놓기 어렵다고 말하였다. 그녀의 말을 듣고 나서, 나는 자신도 모르게 최근 내가 집착을 버리게 된 일을 생각하게 되었다. 비록 겉으로 보기에는 다른 것 같지만, 실질적으로는 모두 돈에 대한 집착과 수련의 내포를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한 원인으로 조성된 곤혹인 것이다.
애를 학교에 보내야 하고, 노인을 봉양해야 하며, 물가는 올라가는 가운데 생활을 유지해야 하는데, 이는 허다한 동수들이 직면한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봉급은 높지 않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떤 수련생은 인위적으로 방법을 대어 돈을 많이 버는 것으로 생활을 지탱하거나 좀 더 잘 살아보려 한다. 속인은 물론 이렇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대법수련자이며 세간의 일체 집착을 내려놓은 중생구도자인데, 그래 우리가 속인과 똑 같이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단 말인가?
나는 여기에서 내가 부딪혔던 이와 비슷한 일부 일에서의 심득과 깨달은 일부 법리를 말하려 하는데 동수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내가 수입사업을 한지도 이젠 3년이 되었다. 매달 수입은 5백 위안 밖에 안 되었고, 아내의 막일을 해서 번 수입까지 다 합해도 매달 천원 정도였다. 예전에는 나도 마음을 내려놓지 못하고 다른 일을 더 찾아 함으로써 수입을 늘리고자 하였다. 마음을 내려놓지 못할수록 어떤 속인과 모 수련생이 면전에서 내가 적게 번다고 말했으며, 어떤 속인은 “그들 두 사람이 버는 돈은 우리 아이가 쓰기에도 모자라다”고 말하였다. 한 번은 걸어나온지 얼마 안 된 한 수련생이 나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당신은 너무 적게 법니다. 당신이 어떻게 그 수입으로 노인과 아내 그리고 아이에게 책임을 다할 수 있나요?” 나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팔자소관입니다.” 비록 당시에는 그렇게 말했지만, 마음속으로는 그의 말에 도리가 있다고 은근히 느꼈다. 법리가 분명치 못했기 때문에 마음으로 압력을 느꼈다. 집에 와서 아내(동수)에게 이 일을 말했더니 아내는 이렇게 말하였다. “당신이 버는 돈이 많지 않긴 해도 세 가지 일 중 어느 한 가지도 영향받지 않아요. 우리집은 또 아무것도 모자라는 것이 없는데 왜 아직도 만족할줄 모르시나요? 세 가지 일을 잘하는 것만이 비로소 주요한 것이예요.”
아내의 몇 마디 말은 나를 일깨워 주었다. 나는 알고 있다. 평소에 말이 많지 않은 아내가 이런 말을 할 리가 없다. 이것은 분명히 사부님께서 아내의 입을 빌어 나를 깨우쳐주신 것이다. 그렇다. 대법제자에게 지금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 그것은 물론 세 가지 일을 잘하는 것이다. 회고해 보면, 이 몇 년간 나는 사업상 비교적 한가하여 어떤 때는 공장에서도 법공부할 시간이 있었다. 법공부를 대량으로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어떤 때는 신속히 승화되고 있다는 감각이 아주 뚜렷하였다. 집에 돌아오면 또 내가 책임진 진상알리기 항목에 몰두할 수 있었고, 수련생을 찾아가 법실증하는 일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공장에서는 공장장으로부터 노동자들에 이르기까지 허다한 사람들을 탈퇴하도록 하였으며 탈퇴하지 않거나 사당조직에 참가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도 나는 그들로 하여금 대법진상을 알게 하였다. 가히 말할 수 있는 바, 세 가지 일을 아주 실재적으로 하고 있었는데, 그래 이것이 사부님의 안배가 아니란 말인가?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사람에게 난(難)이 있고 고통이 있는 것은 사람의 업을 갚게 하여 행복한 미래가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한 수련하는 사람은 바른 이치[正理]에 따라 수련해야 한다. 고생을 겪고 난을 당하는 것은 업력을 제거하고 죄를 없애버리며 인체를 정화(淨化)시키고 사상경지를 제고하며 층차를 승화시키는 아주 좋은 기회로서, 이는 대단히 좋은 일이며 이것이 바른 법리[正法理]이다.” (<<최후일수록 더욱 정진해야 한다>>) 적게 벌기 때문에 살아가기가 좀 어렵긴 하지만 사실 이것은 바로 크게 좋은 일이 아닌가? 뿐만 아니라 나도 자신의 허다한 집착심을 찾아내게 되었다. 이를테면 체면을 중히 여기는 마음, 높은 수준으로 비기는 마음, 질투심, 열등감[自卑心], 친인에 대한 정 등 많고 많은 좋지 못한 마음들이었다. 사부님의 바른 법리로 인해 이런 마음들은 햇빛에 눈녹듯이 말끔하게 녹아 없어졌고 나의 마음도 가벼워졌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당신은 알아야 한다. 나는 줄곧 이야기하고 있다. 대법제자가 문제를 봄에 있어 반드시 반대로 보아야 한다. 왜냐 하면 삼계는 반대로 된 것이지만 당신들은 올바르게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속인들이 좋지 못하다고 여기는 것을, 수련인, 여기를 떠나려는 생명으로서는 바로 좋은 것이다. 당신이 속인과 같은 생각이라고 여긴다면 당신은 곧 영원히 속인이며 당신은 영원히 여기를 떠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당신이 부딪친 마난 그것은 마침 당신이 제고하는 기회이다. 만약 당신이 능히 안으로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마침 당신이 난관을 넘기고 새로운 상태로 진입하는 하나의 기회이다. 왜 이렇게 보지 않는가? 마난에 부딪치기만 하면 밖으로 내민다.” (<<2008년 뉴욕법회 설법>>)
속인은 모두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고 더 잘 살겠는가를 생각한다. 우리 대법제자도 이렇게 생각해야 하는가? 우리가 마땅히 생각해야 할 것은 어떻게 자신을 제고하고, 어떻게 더 많은 중생을 구도할 것인가 하는 것이어야 한다. 마난이 오고, 생활중의 모순이 오면, 개인수련 방면이든 아니면 법을 실증하는 방면이든 막론하고, 우리는 모두 마땅히 수련인의 정념으로 태연히 대해야 하며, 인식이 청성할 수 있다면 이는 좋은 일이며, 이는 사부님께서 우리가 제고할 수 있도록 안배해주신 것이다. 빈번한 표면현상을 뚫고 옳은 것은 옳다 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 하며, 그 집착을 찾아내어 그것을 버려야 한다. 따라서 일 자체의 개변에 집착하지 말고 일체는 사부님의 안배에 맡기고 자연스럽게 되어감에 따라야지, 마난이 왔을 때면 곧 “이건 나의 법 실증을 교란하는 것이니 나는 승인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법실증”을 난관을 넘는 방패로 삼지 말아야 한다. 씬씽[心性]이 실질적인 제고를 가져오지 못했다면 이것은 수련하지 않은 것과 같지 않는가? 그래 모두 편안하게 수련성취하고, 관을 넘는 것과 집착심을 버리는 어려운 고통이 없어야만 된단 말인가? 고생을 두려워하고, 불편할까 두려워 하면서 곤란을 나쁜 것으로 여긴다면 이건 속인과 같은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관념을 철저히 전변(全變)시켜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바른 이치로 수련해야 하며, 자동적으로 법가운데 자신의 사상과 언행을 귀정해야 한다. 우리에게 사심으로부터 생긴 집착이 없다면 구세력의 요소도 우리를 교란하지 못할 것이다. 물론 우리는 극단으로 가지 말아야 하며, 우리가 하는 세 가지 일을 엄중히 교란하는 사악에 대해서는 반드시 엄숙히 정념으로 제거해 버려야 한다.
더 진일보로 말한다면, 우리 대법제자는 어떤 때이든 어떤 상황이든 모두 법을 실증하고 세 가지 일을 잘하는 것을 첫 자리에 놓아야지, 마난이 있기만 하면 어리석어지고 늦장을 부리거나 정법수련의 발걸음을 중지하고 속인의 일을 첫 자리에 놓아서는 안 된다. 어떤 때 생각해 보면, 우리가 이곳에서 수련하고 법을 실증하며 중생을 구도하는 이것은 얼마나 영광스럽고 얻기 어려운 일인가!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중생구도를 아직도 10년을 한다면 하겠느냐고 물으신 적이 있다. 우리 동수들은 하겠다고 대답하였다. 내가 느끼건대, 중생이 모두 구도될 때까지 줄곧 구도해간다 해도 나는 하고자 한다.
우리가 마음을 법을 실증하고 사람을 구하는데 놓는다면, 개인의 일체 득실과 이익의 향수는 모두 중요하지 않다. 그때면 개인의 마난이 다 무엇이겠는가? 또 그 무슨 마음이 있어 그렇게 버리기 어렵겠는가?
개인 층차에서 깨달은 것이니 부족한 곳은 자비로 지적해주기 바란다.
문장발표 : 2008년 8월 27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문장위치 : http://minghui.ca/mh/artic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