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대륙 대법제자
【명혜망 2008년 7월 28일】 최근 한단락 시간 동안 악경은 미친듯이 대법제자를 납치하고 있다. 매일 대륙종합소식에 게재되는 납치사건이 대폭으로 증가하고 있다. 악경은 각 지역에 마치 납치할 “지표”를 분배한 것 같다. 예를 들면 내몽골의 모 현에서는 80여 명을 납치할 “지표”를 분배하였다.
악경이 이렇게 미친듯이 박해할 수 있는 것은, 반드시 우리 정체에 누락이 있기에 사악으로 하여금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게 한 것이었다. 우리는 반드시 참답게 경험과 교훈을 총결해야 하며, 부족을 찾아내고 누락의 구멍을 막아야 하며, 사악으로 하여금 이렇게 큰 규모로 수련생을 박해하게 해서는 안 된다. 목전에 중생을 구도하는 것은 우리의 주제이다. 만약 박해받아 감옥, 노동교양소에 들어가게 되면 대면적으로 중생을 구도할 수 없으며, “세 가지 일”을 잘할 수 없게 되는데, 그 후과는 엄중하다.
“사악앞에서 반드시 금강불파해야 한다.”라고 한다. 여기에서 나는 “금강불파”는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지, “사람을 움직이지 않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떤 수련생은 “마음을 움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사람을 움직이지 않으려” 하는데, 그는 이것이야말로 “금강처럼 움직이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또한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소극적으로 피하고 두려운 마음이 있으며 정념이 부족한 표현이라고 한다. 나는 이런 사상은 비교적 단편적일 뿐만 아니라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수련생은 지혜롭게 각종 안전조치를 취하며 “사람의 방식”으로 박해를 반대한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마치 오직 “견정하게 발정념하는” 것이야말로 “신의 방식”인 것 같다.
무엇이 “신의 방식”이며 무엇이 “사람의 방식”인가? 표면적인 행위방식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우리가 진상을 밝히는 것은 사람의 입으로 가서 이야기하며, 사람의 손으로 가서 자료를 배포하는 것이다. 신통을 크게 나타내어 앉아서 공중에서 세인에게 진상을 밝히는 것이 아니다. 속인의 표면에서 보면 “사람의 방식”으로 하지만 대법제자는 모두 알고 있다. 여기에는 사실 그것의 다른 공간에서의 체현이 있으며 더욱 깊은 내포와 더욱 위대한 의의가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 사람이 수련하는 과정에서 부딪친 관은 표면으로부터 보면 그것도 사람이 그에게 제조한 번거로움처럼 보인다. 절대로 신선이 욕하거나 그를 한바탕 때리지 않는다. 우리는 지혜롭게 각종 방식으로 반박해해야 한다. 이것도 절대로 근근히 “사람의 방식”만이 아니다. 다른 공간에서는, 긍정하고 또 그것의 표현이 있다. 단지 당신이 볼 수 없을 따름이다. 그것도 이런 방식을 사용하면 “견정하게 발정념한”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이것은 사실 동시에 진행된다. 이 두 가지 방식을 대립시킬 수 없다. 사부님은 우리에게 “이지(理智)로써 법을 실증하고, 지혜로써 진상(眞象)을 똑똑히 말한다.” (《이성(理性)》) 라고 하셨다. 우리는 이지적이고 지혜롭게 각종 방법을 취하여 박해를 반대하고 있다. 이런 방법을 기타 동수에게 알려주며 동수들의 손실을 감소시켜야 하며 더욱 많은 중생들이 구도받게 해야 한다. 이것은 다른 공간에서 보면 가능하게 또한 매우 위대하고 수승한 일이며 표면적으로 여기고 있는 “사람의 방식”이 아니다. 소위 “사람의 방식을 사용하여 반박해하는” 이런 방법을 제기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으며 이런 명사를 사용하지 말아야 하며 도처에 가서 전파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법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거처없이 유랑하는” 문제가 있다. 무엇을 “거처없이 유랑한다”고 하는가? 나 개인적으로 이해하였는데, 오직 악경으로부터 전국수배령을 받아, 하는 수 없이 떠난 것을 진정으로 “거처없이 유랑”하는 것이라고 한다. 매우 많은 동수들은 근근히 현지 파출소, 610의 감시를 당하며, 그래서 그들은 이사하고 직장을 바꾸는 방식으로 현지악당의 감시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이것은 “거처없이 유랑”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매우 많은 속인들도 이사하고 직장을 바꾸며 또 외지에 가서 직원으로 일하며 창업한다. 생활조건도 원래보다 꼭 차하다고 말할 수 없다. 내 신변에 있는 몇 명의 동수들이 바로 이런 정황이다. 원래 그들은 현지에 있을 때 사악에게 감시당하여 자주 집을 수색당하여 가정자료점을 세울 방법이 없다. 현재는 사악의 감시가 없다. 자유롭게 가정자료점을 건립할 수 있으며 “세 가지 일”을 더욱 잘할 수 있다.
명혜에 매일 발표되는 대륙종합소식을 보면, 3분의 2 이상의 수련생은 집에서 혹은 직장에서 납치당하였다. 다시 말하면 이런 동수들은 기본적으로 모두 장기적으로 감시당하였으며, 현지 610과 파출소에 “등록”된 동수들이다. 그들은 법을 실증하는 일을 한다. 실제상 “절반 공개”된 상태에 처해 있다. 사악이 납치지표를 안배하면, 사악은 우선 먼저 감시명단대로 가서 이런 수련생을 납치한다. 우리 시에서는 근근히 최근 한 달 동안 30여명의 동수들이 악경에게 납치당하였다. 그리하여 매우 많은 가정자료점이 파괴되었다. 이것도 명혜망에 의해 폭로당한 것이다. 폭로해내지 않은 것은 아직 포함하지 않았다. 우리 여기에서 납치당한, 이런 장기적으로 감시당하는 동수들은 기본적으로 모두 비교적 정진하며 “세 가지 일”을 비교적 잘하는 동수들이다. 만약 개별적인 수련생이 납치당하면, 가능하게 그가 “견정하게 발정념”을 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전국에 그렇게 많은 수련생이 납치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다수가 비교적 정진하는 동수들이라면, 그들이 납치당한 것은 “견정한 발정념”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없다. 사실 근근히 “견정한 발정념”만 의지하여 박해를 타파하는 것은 부족하다. 또 지혜롭게 각종 안전조치를 취해야 한다.
나의 신변에 있는 동수들을 보면 그런 사악이 중점적으로 감시당하는 동수중에 현재 한 사람이 목전에 아직 안전하다. 나머지는 모두 납치당하였다. 그러나 사악의 감시범위 안에 없는 그런 외지에서 온 동수들은 한 사람도 납치당하지 않았다. 개별적으로 납치당한 사람도 진상을 밝히고 자료를 배포할 때 납치당한 것이다. 외지의 수련생은 현지의 동수보다 정념이 강하며 상태가 좋다고 말할 수 없다. 그들의 가장 큰 구별은 바로 하나는 사악의 감시중에 있지 않는 것이고, 또 하나는 사악의 감시중에 있는 것이다. 사악더러 자신의 거처와 직장위치를 모르게 하며 사악의 감시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은 유효하게 사악이 대규모로 뛰쳐들어와 납치하는 것을 방지하는 안전조치이다. 대륙에는 이미 수련생이 수천만 명에 달하여 사악더러 채 감시하지 못하게 하지는 못한다. 실제상 어떤 현에는 만약 몇십 명의 골간수련생이 납치당하면, 진상을 똑똑히 밝히는 일을 왕왕 잘하지 못하게 된다.
장기적으로 매우 많은 동수들은 모두 이런 관념이 있다. 이사를 하고 직장을 옮기는 방식으로 감시에서 벗어나고 박해를 타파하고 피할 수 있다고 여긴다. 이것은 두려운 마음이며 정념이 강하지 못한 표현이다. “정념이 강하면 사악은 당신을 건드리지 못하는데 당신이 이사하는 것은 바로 당신의 정념이 강하지 않은 것이 아닌가?” 이런 관점도 비교적 단편적이다. 매 사람의 업력의 크기는 부동하며 정황도 천차만별이다. 수련중의 사람은 오직 원만하지 않으면 모두 누락이 있다. 누구도 자신의 정념이 사악더러 감히 움직이지 못할 지경에 이르게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자신의 “누락”은 가능하게 자신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매우 많은 동수들은 모두 자신의 정념이 강하여 사악이 감히 움직이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기타 방식으로 반박해하는 것을 하찮게 여긴다. 박해가 머리에 떨어져서야 자신의 정념은 자신이 상상한 것처럼 그렇게 강하지 않음을 발견한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현재 매일 게재한 집을 수색당하고 납치당한 동수중에 매우 많은 사람들은 모두 이런 정황이 아닌가?
만약 일찍 집을 옮기면 악경은 당신의 거처를 모를것이며 그것이 어디에 가서 납치하겠는가!? 다른 공간의 사령은 당신의 새로운 거처를 알고 있지만 직접 악경에게 알려주지 못한다. 그것도 속인사회 상태에 부합해야 하며 낡은 우주의 이치에 부합되어야 하는데, 아무런 연고도 없이 악경에게 알려주어도 사부님은 동의하지 않으신다.
물론 모든 감시당한 동수들이 모두 이사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런 중점적으로 감시당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 악경은 수련생을 극히 적게 괴롭힌다. 정황에 따라서는 이사하지 않아도 안 된다. 각 지역의 정황도 다르고 박해가 그렇게 엄중하지 않으며 “610”등 부문이 모두 이미 진상을 알고 있는 지역에도 현지의 정황에 근거하여 지혜롭게 할 수 있다. 예전에 “등록”당했지만, 현재 이미 정념으로 감시를 타파한 동수도 꼭 이사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지혜롭게 기타 안전조치를 취해야 한다. 집을 이사한 수련생이 만약 경제적 상황이 좋지 않다면, 친지나 친구에게 위탁하여 원래의 집을 팔거나 혹은 임대할 수 있다. 비록 집을 이사한다고 하지만 그것도 단지 중요한 물건을 갖고갈 따름이며 가구와 같은 유형은 일반적으로 가져갈 필요가 없다.
또 “피한다”는 문제를 이야기하자. 예를 들면 – 사악은 기세가 등등하게 덮쳐온다. 하나의 화살을 한 수련생을 향해 쏜다. 이 수련생은 몸을 피하여 이 하나의 화살을 피한다. 사악을 향해 하나의 화살을 쏠 수 있다. 이런 장면은 누구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출발점과 목적이 매우 명확하기 때문이다. 현실 정황에서 지혜롭게 각종 안전조치를 취하는 동시에 평온하게 “세가지 일”을 하며 놀라서 “세 가지 일”을 감히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견정하게 발정념”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한 “세 가지 일”은 그중의 한 가지이다. 그러나 단편적으로 “견정하게 발정념”하는 것을 유일하게 반박해하는 수단으로 간주하고 기타 반박해 방법을 부정하고 경시해서는 안 된다. 각종 안전조치를 취하는 것은 더욱 평온하게 오랫동안 “세 가지 일”을 잘하기 위한 것이며 어떻게 하여 “세가지 일”을 하는데 더욱 유리하다면 반드시 어떻게 가서 해야 한다.
“두려운 마음” 문제에 대해 두 가지 극단이 존재한다. 하나는 어떤 사람은 두려운 마음이 매우 중하다. 감히 나와서 사람을 구하는 일을 하지 못한다. 이런 유형은 여러분이 비교적 잘 밝혀낼 수 있다. 다른 하나의 극단은 “두려운 마음을 없애다”를 매우 중하게 본다. 심지어 저도 모르게 “두려운 마음을 제거하는” 것을 진상을 밝혀서 세인을 구도하는 것보다 더욱 중요하게 본다. 한 가지 사건에 부딪치면 먼저 어떻게 해야 중생을 구도하는데 더욱 유리한가를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두려운 마음이 있는가 없는가, “두려운 마음을 없애는 것”을 가늠하는 표준으로 삼는다. 두려운 마음이 없는 것은 일정한 층차에서의 수련의 자연적인 체현이며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이 층차까지 수련하자만 하나의 과정이 있어야 하며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대법제자는 이 층차를 닦을 때까지 기다려 두려운 마음이 없어서야 가서 법을 실증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많은 대법제자는 아직 이 한층차까지 수련하지 못하였으며 아직 완전히 두려운 마음을 없애지 못한 정황하에서 법을 실증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한 일이 틀렸다고 말할 수 없다. 그들이 한 일이 맞는지 여부는 진상을 밝혀서 중생을 구도하는데 유리한가에 의해 가늠하는 것이지 그들에게 두려운 마음이 있는가 없는가에 의해 가늠해서는 안 된다. 반대로 말하자면, 한 제자는 바로 두려운 마음이 없어도 안전하다고 취급할 수 없다. 두려운 마음은 단지 하나의 마음이다. 사람에게는 아직 허다한 집착심이 있다. 단지 두려운 마음만 없애서는 아직 많이 부족하다. 우리는 법을 실증하려는 것이지 자신의 두려운 마음을 실증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수련생은 오직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사악은 당신을 움직이지 못한다고 여긴다. 그러므로 사람도 움직일 필요가 없다. 사실 당신이 사악이 박해하려는 소식을 듣거나 혹은 악경이 집에 찾아왔을 때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단지 당신에게 두려운 마음이 없다는 것을 설명한다. 수련인이 없애야 할 집착심은 많다. 단지 당신이 두려운 마음이 없으면, 사악은 당신을 움직이지 못하는가? 왕왕 어떤 집착심은 자신도 느끼지 못한다. 단지 저절로 자신에 대해 느낌이 좋다. 이때 “사람은 움직일 필요가 없다”를 견지하면 매우 위험하다.
오랫동안 매우 많은 대법제자는 사악의 감시를 타파하는데 대해 그다지 중시하지 않는다. 매우 많은 골간수련생은 어디에서 살고 어디에서 출근하는 것을, 악경이 장악하고 있다. 일부분 정념이 매우 강한 수련생은 장기적으로 실제적으로 수련한 견실한 기초가 있다. “견정하게 발정념”한 것을 통하여 사악의 박해를 타파할 수 있다. 그러나 기타 중점이 되어 감시당한 동수에 대하여 근근히 발정념으로는 부족하다. 이것은 현재 매일 집을 수색당하고 납치당한 동수의 수량으로부터 보아낼 수 있다. 이미 납치당한 총 인수의 3분의 2이상이다.
며칠전, 석가장에서 발생한 단체 납치사건은 사전에 이미 어떤 수련생이 먼저 경보를 주었다. 그러나 단지 집에 있는 자료와 설비를 이전하게 하였으며 정념으로 제거하였다. 최후에 20여 명의 수련생이 납치당하였다. 나는 당시 만약 그런 중점으로 감시당하고 자주 소란받는 수련생을 일깨워주고 친지와 친구네 집에 가서 한동안 은폐해 있거나 혹은 도시 농촌 등 지역에서 임시로 집을 임대하여 잠시 기거하면 그런 악경이 왔을 때 텅 비어있게 되어 사악은 틈타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마 이전하는 것은 비교적 번거로울 것이다. 그러나 현재 간수소에 감금되기보다는 낫다! 번거로움을 두려워하는 마음도 없애야할 것이 아닌가? 아쉽게 매우 많은 수련생은 이 문제에서 법리상 여전히 똑똑히 알지 못한다. “사람의 방식”으로 가서 반박해하려 하지 않고 단편적으로 “금강처럼 움직이지 않는다”라고 이해한다. 소식을 모두 알고도 집에 앉아서 “움직이지 않는다” 실제상 모종의 정도에서 사악의 납치행동에 협조하여 자신이 납치당하게 되었다. 사악은 바로 올림픽을 보호하기 위하여 대법제자가 그것의 악행을 폭로하는 것이 두려워서 올림픽 전에 제멋대로 감시당하는 수련생을 납치한다. 올림픽이 지나면 악당은 이렇게 창궐하지 않다.
매일 대량의 동수들이 납치당한 것을 보고 나는 마음이 매우 아프다. 동수들이 법리를 명백히 알고 정념을 견정하게 하며 지혜롭게 사악의 박해를 타파하며 장기적으로 평온하게 “세가지 일”을 잘하며 최대한도로 많은 중생을 구도하기 바란다.
개인의 일정한 층차에서의 인식이기에 타당하지 못한 곳은 동수님들이 자비롭게 지적해주기 바란다.
문장발표 : 2008년 7월 28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원문위치 : http://minghui.ca/mh/articles/2008/7/28/18286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