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미국 뉴욕, 장솽잉(张霜颖)
【명혜망 2008년 7월 26일】 내가 부모를 보지 못한지도 이미 14년이 지났다. 내가 가득찬 희망을 품고 자유의 미국으로 날아간 후 부모가 검은소굴과 혹형의 시달림을 받는 것을 만약 당초에 알았다면, 나에게 무슨 용기가 있어 비행기를 탈 수 있었을지 나도 모른다. 이 14년간의 인생의 진귀한 시각을 오직 묵묵히 지냈을 따름이고, 부모들과 정을 나눌 수 없었고 부모들의 생사존망의 관건적인 시각에 나는 만리 밖에서 불타는 조급한 마음으로 초조하게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다. 나는 미국의 하늘 아래서도 편안함과 즐거움을 감수하지 못했다.
연로한 부모들은 바다 저쪽에서 9년 간의 마난을 지냈는데, 희희락락하고 노래하고 춤추는 조화로운 사회는 모두 다른 사람들의 것인 것이다. 그들의 참혹한 막 후면의 현란한 무대배경은 무수한 가정의 묵묵히 흘러내리는 피와 눈물로 장식한 것이다. 그중에는 원래 행복했던 우리의 가정을 포함한다. 만약 천지가 나의 근심 걱정을 볼 수 있다면, 그 하나의 그리움은 길고 길어 벌써 태평양을 촘촘하고 빽빽하게 감아 돌고있을 것이다.
재간이 많은 아빠는 산동 기남 교육학원의 물리학 교수였다. 남을 위하는 무사(無私)한 마음은 어딜가도 모두 군중들의 중심이 되었고, 재간과 정이 많은 엄마는 성격이 활달하였는데, 엄마의 눈에는 생활이 마치 무궁한 꽃송이 같았다. 부모님들은 40여 년을 금슬좋게 살았으며 행복했다. 그 시기 물자가 결핍할 때에도, 우리집의 작은 배는 쾌락을 가득 싣고 난처하지 않았다. 우리가 자란 후 동생은 북경으로 가고 나는 미국에 왔다. 우리는 마치 작은 새와 같이 자기의 꿈을 향했지만, 세월의 흐름에 따라 뒤를 자주 돌아보게 되었고, 집의 따스함을 그리워했으며 부모의 평안을 기도햇다. 어느 날 부모가 파룬궁을 수련해서야 우리 모두는 파룬궁의 병을 제거하는 기이한 효과와 좋은 사람이 되는 이론에 완전히 흡수되었다.
부모님이, 도덕이 고상한 사람으로 되는 쩐싼런(眞善忍)의 표준으로 당신들의 일언일행을 요구할때, 우리 모두는 모두 파룬궁의 아름다움을 감수하였다. 우리는 앞날의 아름다움을 담론할때,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마음은 갈수록 순정해졌다. 마치 오랜시기 전으로 되돌아온 것 같았는데, 그 친근한 마음은 하루도 갈라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생활은 우리앞에 종래로 겪어보지 못한 그림을 펼쳤고, 우리는 반본귀진의 길에서 손을 잡고 함께 앞으로 향했다.
풍운이 돌변하여, 1999년의 7월 20일, 중공 체재내의 권리를 잡은 소인(小人)이 한사코 파룬궁을 박해하려고 했다. 그날은 나의 가슴에 깊이 새겨지는 날이다. 그날로부터의 고난과 피눈물은 우리집의 매 하루의 일기에 적어놓았다. 홍색공포 하에서 한 사람의 생명은 무심코 지워질 수 있었으며, 잠깐사이에 사람수가 많은 쩐, 싼, 런을 수련하는 무고한 선량한 민중들을 곧 “일관되게 영광스럽고 정확한” 공산당의 대립면으로 밀어놓았다.
부모는 이로부터 인신의 자유를 잃었고, 나의 마음도 이로부터 큰돌이 짓누르기 시작했으며, 곧 무너질 것 같았다. 9년 동안의 낮과 밤, 심지어 일분일초에도 부모님의 소식을 모르고 생사를 몰라 비할 바 없이 길었다. 대양 저쪽에서 전해온 소식은 한번 또 한번씩 보다 심중해졌다. 공직을 제명당하고, 경제는 봉쇄당하고, 몇 번이고 구류하고 밖에 유랑하면서 소식을 알 길이 없었고 생사를 몰랐는데, 결국은 3년 감옥살이라는 혹형을 가했던 것이다.
2004년에 부모님이 출옥한 후 현지의 정부는 부모님이 어떠한 여권을 만드는 것도 저지하면서 아들딸도 만나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하나 하나 생각하기조차 힘든 것이다.
금방 잠시적인 평정을 얻은 것 같았는데, 또 올림픽 때문에 하늘땅을 뒤흔들어 놓게 된다. 2008년 7월 16일 저녁 10시쯤 대지가 곧 잠을 자려고할 때 20여 명의 경찰이 갑자기 문을 박차고 뛰어들어와 집을 털고 물건을 빼앗았고, 강제로 67세의 부친과 모친을 납치하고는, 올림픽의 조화로움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그들을 간수소에 가두었다. 오늘날까지 나는 부친의 정황을 모르고 있다.
왜 쩐싼런(眞善忍)을 수련하는 노인들이 무고하게 이런 고난을 받아야 하는가? 아름다운 신앙을 추구하는 것이, 어떻게 권력을 잡은 자로 하여금 참을 수 없는 위협이 되게 하여, 꼭 그들을 검은 감옥에 가두어야 마음을 놓을 수 있는가?
9년은 3000여 개의 낮과 밤이다. 이미 적어도 3000여 명의 파룬궁 수련생들이 생기발랄한 고귀한 생명이 이렇게 무정하게 박탈당했다. 제일 어린 아이는 몇 달 되지 않는 어린이이고, 위로는 환갑을 넘은 노인들이다. 수만의 가정의 처자식은 흩어지고 집은 파탄되고 사람은 사망하였다. 무수한 억울한 참상에 대해서 천지는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다.
나는 부모로 인해 비할바 없는 자부심을 느낀다. 물론 어떠한 환경이나 어려움 하에서도, 그들은 모두 사람으로서의 준칙을 지키고 자기의 신앙을 견정히 하고 어떠한 사악 세력에도 타협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의 자식으로서 나는 또 비할바 없이 가슴이 아픈 것이다. 연로한 그들을 내가 어떻게 생각하지 않고,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의 마음은 이 9년 동안 줄곧 놀랐고, 비분과 아픈 마음은 피를 흘리는 것이다. 오늘 인권이 세상의 가치로 존재하는 하늘 아래에서 이러한 이야기는 믿기 어렵게도 저 멀리 5천 년 문명을 자랑하는 오랜 대지에서 반복적으로 발생하고 또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하루라도 박해를 중지하지 않으면 그 많은 사람들의 고통은 매일마다 증가되고, 하루라도 박해를 중지하지 않으면 나의 마음은 분초도 안녕하지 못한다. 손에 흉기를 든 사람들이여, 무고한 자의 고난을 앞에 두고 당신의 마음은 추호의 후회와 겁도 없는가? 사악에 대한 묵시(漠视)는 곧 선량에 대한 상해이다. 존경하는 중국인이여, 용기를 가지고 우리 함께 사악한 중공을 향하여 외치자 – “파룬궁박해를 중지하라!!”
정황간략 :
나의부친 장싱우(张兴武)이며 67세이고 산동 기남 교육학원의 물리학 교수였다. 모친 류핀제(刘品杰)는 기남반도체 연구소의 퇴직공이고, 그들 둘은 1995년부터 파룬궁을 수련한 후 심신의 수익을 얻고 엄격히 쩐싼런(眞善忍)으로 자기를 요구하였다. 1999년, 중공이 파룬궁을 박해한후 둘은 직무가 내려갔고 봉급도 내려갔다. 또한 양심을 위배하지 않아 “파룬궁을 결렬”하는 보증서를 쓰지 않았기 때문에, 구류당하고 집을 수색당하고 거주지는 감시를 당하여, 많은 교란을 받았다. 2000년에 집을 떠나 사처로 유랑했다. 2001년 1월 1일 “파룬궁 선전”을 했다는 죄명으로 둘은 모두 3년 노동교양 판결을 받고 감옥에서 핍박으로 매일마다 십 몇 시간을 노동했다. 그 기간에 “파룬궁과 결렬”한다는 보증서를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부친은 연속 두 번의 6일 밤낮을 잠자지 못하게되었고, 연거푸 세뇌당하였다. 모친은 두 번이나 형벌을 받았다. 2003년 말 출옥후 의연히 엄중한 감시를 받고 외지로 다니지 못하게 하고 여권도 발급받지 못하게 해놓았다. 2008년 7월 16일 저녁 10시, 기남시 공안국과 그 소속 단위 위가장(魏家庄)파출소의 20여 명의 경찰이 전문적으로 열쇠를 전문가의 협조하에 아무런 이유도 없이 문을 차고 들어와 수색하여, 컴퓨터, 프린터 등의 각종 기계와 가정보험 서류 등을 빼앗아갔다. 동시에 부친과 모친을 납치해갔다. 모친에게 중풍이 돌발하여 반신불수로 생활을 자립하지 못하자, 파출소는 책임을 질까봐 이튿날 친척들에게 데리고 가게 하였다. 부친은 기남간수소로 보내고 연락을 못하게 하여 어떠한 소식도 모르고 있다.
문장완성 : 2008년 7월 25일
문장발표 : 2008년 7월 26일
문장수정 : 2008년 7월 25일 21:0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