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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번 사람인가 아니면 신인가에 대하여

글 / 대륙 대법제자

[명혜망 2008년 7월 1일]

* 또 한번 사람인가 아니면 신인가에 대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들은 구경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신인가에 대하여 분명하게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은 두려워하면서 또 놀라워 한다. 중공 사당이 당신에게 파룬궁을 연공하지 못하게 하고, 자료를 배포하지 못하게 하고, 진상을 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제대로 하지 못하며, 또 감히 많이 하지 못한다. 중공 사당이 또 전문적으로 당신을 찾아 박해한다. 이들은 바로 이렇게 사악하기 때문이다.

신은 바로 이지적이고 견정하며 정념의 위력이 나타난다. 사부님께서는 “내가 말하겠는데, 사실 속인들의 사회에서 발생하는 일체 일은 오늘날 모두 대법제자의 마음에 의해 조성된 것이다.” (《2002년 미국 필라델피아법회에서의 설법》) 라고 말씀하셨다. 삼계의 일체 모두는 법을 위하여 만들어졌다. 지금의 사람들은 모두 법을 위하여 왔다. 진상하고, 중생을 구도하고, 발정념을 하고, 사악을 제거하는 과정중에 당신은 스스로에게 무엇을 요구하는가? 당신은 어떤 것을 선택하는가? 모두 당신의 선택에 의해 결정된다.

동수들이여, 내가 신이 맞는가? 내 말대로 할 수 있는가? 자신에게 물어보라.

* 어떻게 생각하는 것과 어떻게 하는 것

늘 동수들은 “우리는 지금 마땅히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고 묻는다. 나 개인적인 인식으로는 우리들이 이 문제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많은 관심을 돌리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사부님께서는 “진상하여 중생을 구도하는 것을 구세력은 감히 반대하지 못한다. 관건은 일을 함에 있어서의 심태로 인하여, 다른 공간에서 사악들이 뚫고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 (《2002년 보스턴법회 설법》) 라고 말씀하셨다. 모 수련생은 편지로 사당의 정부에게 자신의 압류된 월급을 요구했다. 행위에서 보면 틀린 것이 없는데, 도리어 사당 정부에게 납치되었다. 그는 본인과 교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도 잘 모르고 있었다. 법리에서 보면, 그에게 존재한 어떤 사람의 마음이 구세력에게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예를 들면, 쟁투심, 현시심, 사심 등등이다.

대법제자가 법을 실증하는 일은 속인도 능히 할 수 있다. 관건적인 구별은 그 마음이다. 신의 일념은 사악들로 하여금 순간적으로 소멸되게 할 수 있으며 만사가 순리롭다. 사람의 일념은 분분하여, 강하면 도리어 얻을 수 없다. 이 방면의 예는 명혜망에서 매일 많이 볼 수 있다. 사부님께서는 《대뉴욕지역법회 설법》의 문답에서 이 문제에 대한 한 단락의 법을 이야기하셨다.

“제자 : 사부님, 내 인식에는 일부 수련생들이 ‘정념’에 대하여 매우 중시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일부는 ‘정행’에 대해서는 홀시하고 있습니다. 교류할때면 거의 어떻게 정행할 것인가에 대하여는 토론을 하지 않습니다. 사부님께서 어떻게 정념정행의 관계를 볼 것인지 말씀해 주십시요.

사부님 : 이 말은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누가 정행하지 않은 것을 보았을때, 사실 바로 그는 정념이 부족한 것이다. 사상이 사람의 행동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정념이 강할때면 당신의 행동은 긍정적으로 단정하다. 말하자면, 정념이 부족하면 행동이 바로 단정하지 못하다. 우리가 어떻게 토론하였던지, 어떻게 정념에 대한 문제를 이야기했던지를 막론하고, 아직도 어떤 사람은 정념을 일으키지 못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정념이 늘 있을 수 있는가? 당신의 행위가 필연적으로 바르게 가야 한다. 오라고 하면 곧 가야 한다. 그러므로 모두들 대법제자로서 어떻게 이 문제를 잘할 수 있는가에 있다.”

* 대법책을 어떤 곳에 놓는 것이 합당한가.

대법의 책을 어떤곳에 놓는 것이 합당한가? 실제상 하나의 수련인으로서 우리는 능히 정정당당하게 이 문제를 잘할 수 있다. 이것은 능히 철저히 구세력을 부정하는 문제이다. 역시 하나의 근본적으로 사부와 대법을 믿는가 믿지 않는가 하는 문제이다. 만약 우리들이 사악의 법률에 굴복하지 않고 정정당당하게 대법을 수련하였다면, 또 발정념을 통하여 구세력이 조종하는 악경들이 사심에서 벗어나 우리들의 집을 수색하는 것을 부정하였다면, 또 우리들이 오직 우리가 하는 일이 바르다고 생각했다면, 사부님의 법신과 많은 호법신들이 바로 신변에서 우리들을 보호해줄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보귀한 대법의 책을 그렇게 깨끗하지 않고, 불결한 곳에 놓을 수 있단 말인가?

대법의 책을 어떤곳에 놓으면 합당한가? 우리들의 집에 책을 놓는 곳에 함께 놓으면 된다. 그렇지 않으면 진귀한 물건을 놓는 곳에 놓아도 된다. 누가 와도 모두 마음대로 책을 만질 수 없다. 마치 창문앞에 잡지를 놓은 것처럼 정연하게, 그 무슨 도둑놈이 와서 아무 물건이나 뒤지다가 나간 것처럼 난잡하게 해서는 안 된다. 자주 찾는다 해도 “다른 사람이 찾기 힘든 곳에” 두어야 한다. 우리가 마음을 담담하게 하고, 바른 이 길을 따라간다면 대법의 책을 누가 감히 움직일 수 있단 말인가?

문장완성 : 2008년 6월 30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원문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8/7/1/181269p.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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