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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신법(信師信法)하면 사부님은 바로 우리 곁에 계신다 (상)

글 / 대륙 대법제자, 혜선(慧善)

[명혜망 2008년 6월 22일] 명혜망에서 “7년 간의 자료점 생활에서의 얻은 나의 수련심득”(이하 “자료점”으로 약칭함)이라는 문장을 읽은 후, 나는 심신(身心)의 촉동을 받았으며 고무와 격려가 아주 컸다. 수련생은 그렇게 바쁜 가운데에도 여덟 달이란 시간을 들여 몇 년 동안 있었던 자신의 자료점에서의 실수 경력을 써내었는데, 이는 나로 하여금 나의 8년 동안의 자료점에서의 수련 경력을 다 쓰는 것을 견지하게끔 격려해 주었다. 이 문장을 완수하기 전에 나는 이미 쓴 적이 있었다. 나는 몇 달이란 시간을 들여, 쓰고는 삭제하고 삭제하고는 또 썼지만 내가 쓰려는 것은 수련생이 이미 다 써 냈으니 내가 다시 중복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동수의 이 문장의 고무하에 또다시 쓰기 시작했다. 이 글을 쓰는 것은 동수 서로간에 교류하고 제고하며 공동으로 정진하고자 하는데 있다.

우리 일가 세 사람은 97년 말에 인연이 있어 수련의 길로 걸어 들어가게 되었다. 온 가족이 사부님의 끝없는 은혜속에서 혜택을 받은 것 역시 우리 일가의 복일 것이다.

나는 “자료점” 문장을 쓴 동수와 비슷한 수련과정을 거쳤다. 큰 자료점이란 바로 하나의 “망(忙, 바쁠 망)”자로서 이해하는 사람도 있고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우리 이곳에는 접촉한 동수도, 접촉하지 않은 동수도 있는데, 동수들은 모두 자료점에 대해 아주 관심을 가진다. 하지만 우리가 “자료점” 문장 동수와 다른 점이라면, 우리는 가정형 대형자료점으로서 환경이 좋아 외래 교란이 없을 뿐더러 자신 또한 경제적으로 넉넉하여 생활상 “자료점” 문장의 동수보다 훨씬 좋은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반찬에 대한 요구는 아주 간단하여 보통 주말에 한 주일 동안의 반찬감을 사다가 냉장고에 넣어 놓는데, 8년동안 줄곧 이러하였다. 설이나 명절이면 기본상 자료를 만들었고, 특히 설 기간이면 시간을 더 들여서 새해 정월에 동수들이 필요로 하는 자료를 만들었다. 우리는 또한 설에 양가 어른들과 친척들에게 세배하러 다니는 기회에 그들에게 진상을 알리며 그들로 하여금 당단대에서 탈퇴하게 하였다.

* 자료점의 건립과 운행

우리는 1998년에 연공장에서 사람들에게서 존경을 받고 있는 나이 드신 보도원인 갑 수련생을 알게 되었다. 갑 동수의 건의로 우리는 2001년 6월 1일 자료점을 건립하였다. 1999년 “7.20” 박해가 시작되자 그녀는 우리에게 사부님의 신경문을 보내주었고, 그 이후의 진상자료와 스티커 역시 그녀가 우리에게 보내주어 배포하고 붙인 것이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2000년의 6월의 어느 일요일 오후였다.

그녀는 나와 나의 아들과 함께, 이렇게 셋이서 차를 타고 집에서 20여 리 떨어진 한 도로의 길을 따라가면서 대법표어를 쓰기로 하였다. 날이 어두워지자 우리는 길을 따라가면서 쓰기 시작 했다. 돌아오는 길에도 페인트가 다 떨어질 때까지 썼다. 집까지 아직 몇 리 길이 있었고, 돌아갈 준비를 할 때 경찰차가 우리곁으로 지나갔다. 걷고 걷노라니 나는 이젠 더이상 걸을 수가 없었다.(나중에 집에 와서 보니 나의 발에 피멍울이 생겼고, 피망울은 닳아 터져 있었다. 발바닥은 나중에 껍질이 한층 몽땅 벗겨졌다) 차나 만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뒤를 돌아 보았더니 마침 낡은 차 한 대가 달려오고 있었다. 정말 묘하였다. 차 기사는 즉시 우리에게 차에 타라고 외쳤다. 차에 탄지 얼마 안 되어 경찰차가 다시 돌아오면서 우리차 곁을 스쳐 지나갔다. 우리는 집에 도착하였는데 경찰차는 여전히 우리를 찾고 있었다. 원래 경찰차는 몇 번이나 오갔지만 나와 아들은 모두 모르고 있었고, 다만 갑 동수만이 경찰차가 표어를 쓴 사람을 줄곧 찾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뿐이었다. 만일 그 날 우리가 그 낡은 차에 타지 않았다면 아마 그들에게 잡혔을 것이며, 갑 수련생은 경찰차가 우리가 있었던 그 길에서 오랫동안 맴돌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튿날에야 우리에게 알려 주었다. 얼마나 위험했는가! 그때 나와 아들은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저 “파룬따파 하오”, “파룬따파는 정법이다” 등의 진상 내용을 사람들에게 알려 세인들로 하여금 대법은 좋은 것이고 바른 것이며, 중공 매체의 거짓말 선전에 독해받지 말기를 바라는 마음 뿐이었다. 그때는 두려운 마음이 없었고, 두려움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다음날 나는 평상시처럼 출근하였고, 아들은 차를 타고 학교에 갔다. 나중에야 깨닫게 되었는데, 사부님께서 줄곧 제자를 보호해 주셨고 줄곧 우리곁에 계셨던 것이다. 깊은 밤중에 나타난 낡은 차는 사부님께서 안배하여 온 것이었다.

그때부터 갑 수련생은 나와 늘 왕래하면서 현지의 일부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번은 교류중에 현지에 자료점이 없다는 말을 하면서, 사부님 신경문은 시내에서 가져온 견본인데, 현지에서 복사점을 꾸리고 있는 동수에게서 복사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때는 어떻게 안전에 주의해야 한다는 것과 단선연계(單線連繫)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도 몰랐으므로 좀 지난 후 곧 현지의 사악한 “610”, 공안국 정보국의 악인들에게 설비를 빼앗겼고 아울러 벌금형을 당하고 영업도 중지당했다. 이는 복사점을 운영하는 동수에게 커다란 손해를 끼치게 되었고, 동시에 협조사업을 책임진 b동수에게 연루되어, 그는 체포되고 아울러 불법판결을 받게 되었다.

이런 상황하에서 갑 수련생은 우리가 자료점을 건립할 수 없겠느냐고 시험삼아 물으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당신의 집안 식구들은 모두 대법을 수련하고 있으며, 당신들은 수련을 아주 잘했고 환경도 좋으니 자료점을 건립하는 조건도 아주 성숙 되었다.” 나는 그 때 그 말을 듣고 될 것 같아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였다. (아들은 1998년 단과대학 공부를 할 때 컴퓨터학과를 선택했는데, 마치 사부님께서 그때 안배해주신 것 같았다) 우리는 집의 저축으로 컴퓨터, 프린터 등의 설비를 사 들였고, 컴퓨터 기술은 아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한편, 하면서 배웠다. 그가 주말이면 집에 돌아와 한 주일 동안의 원고를 작성해 놓으면, 우리와 갑 수련생은 함께 인쇄하였다.(그때에는 자금문제로 아직 복사기를 마련하지 못하여 등사기로 찍었다) 갑 수련생이 인쇄기술을 다 배우고 나자 자료의 수요량도 증가되었다. 나중에 갑 수련생은 몇 명의 수련생을 이끌고 인쇄임무를 감당했는데, 하루 종일 쉼없이 인쇄하면서 현지 민중들을 구도하기 위하여 자신을 잊고 일하였다. 당시 우리 지역 수련생이 천여 명에 달하였고 또 주변 인접 구역에서도 모두 여기에서 자료를 가져갔기에 자료는 공급을 따라가지 못하였다. 동수들의 중생구도 수요를 만족시키기 위해 협조를 책임진 c 수련생이 여러 방면의 동수들과 공동으로 노력하고 자금을 모아 새로 자료점 하나를 세웠는데, 실은 한 동수의 친척이 한 것이었다. 그들은 일당 십, 일당 백의 기세로 중생구도의 사업을 하느라고 애썼지만, 안전을 홀시하였기에 일년이 안 되어 현지의 사악한 경찰과 “610”에게 설비를 불법적으로 빼앗겼다. 동수와 그의 친척이 잡혀갔고 협조인 b동수도 잡혀가 중형판결을 받았는데, 손해가 막심하였다.

우리 자료점은 새로운 자료점이 건립된지 얼마 되지 않아, 갑 동수의 다방면적인 노력으로 자금을 모집하였고 일부 설비를 사 들여 수작업을 대신하였는데, 사업효율과 품질을 크게 높였다.

자료점의 안전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그때까지도 아직 비록 단선연계라는 이 하나의 원칙으로 가지는 못했어도 안전의식만은 도리어 아주 강하였다. 그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를 뿐이었다. 그래서 설비를 사기전에 우리는 동수들과 잘 상의하였다. 우리는 수작업으로 기타 진상자료를 만드는 것은 변동하지 않았다. 이제는 수작업으로 진상자료를 찍는 것을 잠시 중지하고, 자료는 우리가 맡아 완수하며, 자료점 장소는 갑 동수와만 연계할 수 있게 하고, 자료의 송출은 을 동수와만 연계하며 서로 간섭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정하였다. 그리하여 자료점은 비교적 안전하게 운행될 수 있었으며 어떠한 풍랑에도 끄떡하지 않았다. 자신이 일부 조치를 취하여 자료점의 안전을 보호하는 것은 자신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며, 또한 대법에 대해, 동수에 대해, 자신에 대해 책임지는 것이다.

새롭게 추가한 자료점이 사악에게 파괴당한 후에야 우리는 자료점의 안전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비로소 인식하게 되었다. 그 때 “명혜주간”에도 문장이 올라, 일부 지방의 자료점이 불법적인 강탈을 당해 손해가 막대한 상황에서, 자료점에서 어떻게 안전에 주의할 것인가 하는 내용들과 원칙들을 소개하였다. “명혜주간” 잘 소개된 동수의 경험과 교류문장을 보고, 우리는 좋은 경험으로 참고하여 단선연계의 원칙을 견지하였으며, 서로간에 만나는 시간이 아주 적었다. 그래서 원래의 자료점을 집으로 옮겨왔고, 원래 연계가 있던 일부 동수들과의 연계를 끊어버렸다. 따라서 우리는 일부 설비를 더 설치하였다.

우리가 자료를 만드는 환경은 원래보다 더 넓어졌고 사업도 많이 편안해졌다. 큰 설비는 소음이 비교적 커서 이웃들에게 일정한 영향이 있을 것을 고려하여 방음장치를 하였다. 사들인 설비에 대해 우리는 모두 아주 소중히 여기고 아꼈다. 그들에게도 매우 영성이 있어 모두 초상적인 능력을 발휘하였다. 어떤때 설비는 신기하게 나에게 암시를 주는데, 우리 어느 곳에 문제가 있다고 제시한다. 이를테면 어떤때 종이를 잘못 놓았거나 반대 방향으로 놓았는데, 문제가 있기만 하면 찍을 수 없거나 아예 운행하지 않았다. 또 더욱 많은 신기한 일들이 있었지만, 나는 더 쓰지 않겠다.

아들은 2002년에 대학을 졸업한 후, 줄곧 집에서 진상사업을 하였다. 그가 지불한 것도 아주 컸다. 자료는 종류가 비교적 많았는데, 모두 그가 편집한 것이었다. 수리방면을 포함한 기술방면에서 적지 않은 사업을 하였다. 동시에 새로 건립한 소형 가정자료점의 기술지도, 설비수리에도 심혈을 바쳤다.

나는 회사 체제개혁으로 인해 앞당겨 퇴직할 수 있었다. 하지만 회사 지도부는 아쉬워하면서 퇴직하지 못하게 하였다. 나의 강렬한 요구로 지도부는 나의 퇴직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더러 보조원을 거느리고 그가 업무에 익숙하게 한 다음에 가라는 것이었다. 나는 지도부의 요구대로 회사에 4달을 더 있었다. 보조원이 독립적으로 일을 할 수 있게 되자, 나는 지도부 사람들과 갈라져 화사를 떠났고, 온 몸과 마음을 다해 대법을 실증하는 사업에로 투입하였다.

그때, 우리 이 자료점에 와서 자료를 가져가는 곳이 아주 많았다. 2001년부터 2006년 사이에 본 시(市)에도 있었고 다른 시에도 있었으며, 또 다른 성(省)에서도 가져갔다. 우리 농촌 동수들은 항상 일을 하러 가는 곳에 진상자료를 가지고 갔다. 동수들은 모두 자신이 대법제자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우리는 각종 자료를 다 만들었다. 우리는 소책자, 전단지, “9평” 책, 호신부(카드도 있고, 장식품으로 목에 거는 것도 있으며, 정교하게 만든 pvc도 있다), 그물 인쇄(대형 현수막, 작은 현수막, 작은 스티커), cd(사부님 광주설법, 대련설법, 연공음악, 천국악단 음악, 신운만회 등 여러 가지 형식의 진상cd 및 “9평”cd), 도장, 《전법륜》책, 사부님 경문 등 대법 서적, “명혜주간” 등을 제작하였다. 동수에게는 mp3 음악을 다운로드 해주고, 삼퇴자 명단을 인터넷에 올려 주었다. 우리는 질량을 보증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 제때에 송달해주었다. 특히 사부님의 저작에 있어서 우리는 모두 좋은 재료들을 사용해 만들었는데, 만든 책들은 출판사의 것들과 조금도 다른 점이 없었다. 갑, 을 수련생이 들은 바에 의하면, “우리가 만든 책과 자료는 모두 아주 잘 만들었을 뿐더러 무엇을 요구하면 무엇이 있고 미관이 정교하다. 사부님께서는 이렇게도 훌륭한 안배를 하셨네” 라고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듣고서 그저 웃기만 하였다. 대단할 것도 없다. 이 일체는 모두 사부님께서 하신 것이며 “수련은 자신에게 달렸고 공은 사부에게 있다.” (《전법륜》)

(계속)

문장발표 : 2008년 6월 23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원문위치 : http://search.minghui.org/mh/articles/2008/6/22/18074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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