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길림성 대법제자
[명혜망 2008년 6월 17일] “두려운 마음”, 이 집착에 대하여 대법을 실증하는 동수마다 모두 이를 버리는 과정을 겪었을 것이다. 진정으로 법에서 법을 인식할 수 있고 수련이 잘된 그런 동수들은 이 마음을 재빨리 닦아버리고 정법중에 사부님께서 요구하신대로 온당하게 앞으로 걸어가고 있다. 그러나 법에서 법을 인식하지 못한 그런 동수들은 이 마음에 대해 꾸물대면서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으며 어떤 때는 또 자신의 집착을 위해 여러 가지 구실을 찾을 뿐만 아니라 정법 가운데서 자신이 중생을 구도하는데 대해 일정한 저애력을 만들어 주는 동시에 자신을 장시기 동안 마난속에 처해 있게 한다. 뿐만 아니라 어떤 때에는 또 다른 수련생을 교란하는 작용을 일으키고 있으며, 정체적인 협조에도 일정한 교란을 조성하고 있다. 아래에 본 지역에 나타난 한 가지 사례로 동수들과 교류하고자 하는데, 두려운 마음이 있는 그런 동수들께서는 자신에게 비추어 “배움을 비기고 수련을 비기면서” 하루빨리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길 바란다.
현지에 있는 동수 갑에게는 컴퓨터가 있어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현지의 일부 동수들을 위한 주간 및 진상자료를 책임지고 있었다. 어느 한시기 동안 갑 수련생은 사이트에서 각 지역에 박해가 아주 많으며 게다가 현지에도 최근에 사악의 교란을 받은 수련생이 있다는 말을 듣고 두려운 마음이 생겨 이를 을 동수에게 알려 주었다.(평시에 갑 수련생은 을 동수에게 자료를 주었고, 을 수련생은 다시 이를 다른 동수에게 넘겨 주었다) 먼저 좀 중지했다가 시간이 얼마간 지난 다음 다시 보자. 을 수련생이 보니 별 방법이 없는지라 다른 동수들에게 각자 스스로 방법을 찾아 하라고 알려줄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렇게 되어 갑 수련생은 두려운 마음 때문에 자료 전해주는 일을 잠시 중지하였고, 많은 동수들은 이 때문에 아무런 자료도 받아보지 못하게 되었다.
며칠이 되지 않아 갑 수련생은 사이트에 발표한 사부님의 설법을 보았다. 갑 수련생은 속으로 생각하였다. 어쩌지? 사부님께서 설법을 발표하셨는데, 나는 볼 수 있지만 그렇게 많은 동수들이 보지 못하고 있고 다른 동수에게 연락하여 자료를 요구해도 시간이 걸릴텐데… 그렇게 한다 해도 다른 동수에게 부담을 증가해주는 것이 아닌가? 다른 동수의 법공부 시간이 줄어들게 될 것이고. 뿐만 아니라 갑 수련생이 그동안 들은데 따르면 자기가 자료를 넘겨주는 이 구역 동수들 중 어떤 사람은 줄곧 주간과 자료를 보지 못하고 있다고 하였다. 사부님 설법은 더 말할 여지도 없는 것이다. 이 며칠 동안 마음을 가라앉히고 조용히 법공부하면서 이렇게 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은 사(私)가 아닌가? 자신이 볼 수 있다고 해서 다른 사람은 상관하지 않는단 말인가? 자신은 아직도 두려운 마음에 끌리면서도 이것을 안전에 주의하는 것이라고 한다. 사실 이는 제일 안전하지 못한 것이다 – 비록 사람 일면은 아주 안전하여 일이 생기지 않았지만 이러한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새로운 우주로 진입할 수 있겠는가? 새로운 우주의 생명은 모두 무사무아(無私無我)한데 자신의 이런 자사(自私)한 표현은 표준에 부합되는가? 이 어찌 정법진행을 따라간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또 어찌 중생을 구도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갑 수련생이 정말로 법에서 법을 인식하게 되자 마음속의 두려움이 없어졌고 즉각 이전처럼 매일 자신이 해야할 일을 하면서 또다시 진정한 “정법시기 대법제자”의 상태를 회복하였다. 갑 수련생이 진정으로 이 마음을 내려 놓았을 때,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만약 당신이 정말로 해낼 수 있다면, 당신은 정말로 유암화명우일촌(柳暗花明又一村)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전법륜》) 를 또다시 체험하게 되었다.
본 지역에서 나타난 이러한 일은 아마 다른 지역에도 비슷한 일이 있을 것이다. 어떤 수련생은 장시기 동안 두려운 마음을 버리지 못하여 자신으로 하여금 법에서 법을 인식할 수 없게 만들었고, 어떤 때에는 모 자료점 수련생이 박해당하기만 하면 곧 그 동수에게 일하는 마음이 너무 강하고 법공부가 적다고 여기거나 심지어 어떤 때는 수련생이 한 일부 일마저 부정한다. 우린 왜 수련생이 박해당할 때 생각해보지 않는가? 만약 자신이 제때에 두려운 마음을 닦아버리고 수련생을 도와 좀 분담해주어 수련생이 좀 더 많은 시간으로 법공부하게 했다면 수련생이 박해받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장래에 “무사무아(無私無我), 선타후아(先他後我)”한 정각으로 수련되려 하지 않는가? 왜 지금 일할 때 남을 먼저 생각해주지 못하는가?
여기에서 나는 2002년 3월 5일에 발생한 장춘의 “유선텔레비전 삽입사건”이 생각난다. 몇몇 수련생이 유선 텔레비전을 이용하여 대법진상을 삽입하였는데, 사악을 힘있게 제압하여 사악으로 하여금 극도로 당황하게 하였다. 따라서 길림성에서 대면적의 수많은 동수들이 박해받는 일이 발생하였다. 어떤 수련생은 이 때문에 이해되지 않아 했고, 더욱이 이 때문에 박해받은 일부 수련생은 박해가운데서 수련생이 한 일에 대해 의심을 하던 나머지 사악의 이른바 “전향” 가운데서 “사오(邪悟)”에로 나아가게 되었다. 사부님은 같은 해 3월 8일 즉시 《정념으로 문제를 보자》란 제목의 경문을 발표하시어, 유력하게 제때에 법에서의 우리의 인식을 지도해주셨다.
이 몇 년간 우리의 얼마나 많은 동수들이 장시기 동안 두려운 마음을 버리지 못한 원인으로 동수간에 간격이 생기게 했고, 따라서 자신을 점차 정법에서 멀어지게 하고 정체를 떠나게 하였던가?
이 기회를 빌어 아직도 두려운 마음 상태에서 방황하고 있는 동수들에게 일깨워주고자 한다. 될수록 빨리 이 마음을 내려놓고, 빨리 정법노정을 따라잡아 중생을 구도하여 우리의 사전의 서원을 완수하자!
개인의 천박한 인식이므로 부족한 곳은 동수들께서 지적해주기 바란다.
문장발표 : 2008년 6월 17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원문위치 : http://search.minghui.org/mh/articles/2008/6/17/18039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