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혜망 2008년 5월 15일] 근 10년에 달하는 수련 노정에서 사부님의 자비하신 가호 아래 갈지 자 걸음으로 비틀거리며 걸어왔다. 천 가지 만 가지 언어로도 나의 내심 심처에 있는 사부님의 은혜에 대해 감사를 표현할 수 없다. 오직 스스로 최대의 노력으로 사부님께서 요구하신 세 가지 일을 잘 하며 착실하게 자신을 수련하여 사존께서 근심을 적게 하시고 기쁘고 위안이 되게 하려는 생각 뿐이다.
며칠 전에 우리 지역에서 몇 가지 일이 발생하였는데, 자신에게 아직 사람의 마음이 있음으로 하여 움직임이 매우 커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중에 휘말려 들어갔다.
설 전에 있었던 일인데, “편지 2통”을 보내야 하는지 아닌지 하는 문제로 인해 갑 동수와 모순이 생겼다. 수련생이 삿대질을 하면서 큰 소리로 질책하는 것을 마주하면서 나는 비록 화를 내지는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이 학습팀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전에도 우리는 몇 번이나 모순이 발생하였다. 표면적으로는 갑 수련생이 서로 다른 의견을 용납하지 못하며, 다른 동수들과의 씬씽(心性) 상에서의 교류도 매우 적어서 모두 갑 동수와 부동한 깨달음을 감히 말하지 못했는데, 마치 그와 자신 사이에 언쟁이 생길까봐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나는 이 학습팀은 환경이 좋지 않고 제고를 가져올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처음에 그 동수와 교류했을 때 비록 그 수련생이 안을 향해 찾았으나 그의 자아가 너무 강해 그야말로 그와는 교류할 수 없다고 느껴졌다. 그리하여 나는 그냥 그의 수련이 잘 되지 못한 측면만 말하였다. 나중에 한 동수와 함께 갑 동수와의 몇 차례 모순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었는데, 그 수련생은 “표면상에서는 마치 당신이 옳은 것 같지만 그 중에는 아마 당신이 반드시 버려야 할 마음이 있을 것이다.” 라고 말하였다.
많은 법학습 및 동수들과의 교류를 거쳐 나는 마음을 고요히 하고 안을 향해 찾았다. 무엇 때문에 몇 번이나 그 동수와 모순이 발생했는가? 여기에 내가 버려야 할 무슨 마음이 있는가? 점차적으로 나는 자신이 늘 그 동수와 누가 옳고 그른가를 따지려 하는 쟁투심이 있고, 줄곧 자신이 깨달은 것이 정확하다고 하는 그러한 자신을 실증하려는 마음이 있으며, 자신만 다른 사람을 개변시키려 하고 자신을 개변하려 하지 않는 마음이 있으며, 법공부팀에서 제고가 있기만 원하면서 제고가 없으면 떠나려고 했는데 사실 이것은 이미 자사심(自私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엇 때문에 동수의 질책 앞에서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 무조건 안을 향해 찾지 못하는가? 무엇 때문에 자신의 마음을 순정하게 하지 못하며 법을 위해 책임지고 수련생을 위해 책임지는 기점에서 동수에 대해 관용하면서 이 학습환경을 원용하여 우리 학습팀으로 하여금 점차적으로 상호 교류하고 공동으로 제고하고 공동으로 승화하게끔 하지 못하는가? 물론 말하기는 쉽지만 정말 하려면 홍대한 자비와 강대한 정념이 있어야 하는데, 금후 자신이 힘써 법공부하고 제고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거의 동시에 나는 또 이런 소식을 들었다. 한 수련생이 수련의 길에서 자신을 잘 파악하지 못하여 범하지 말아야 할 착오를 범했는데, 일부 동수들은 자비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동수의 잘못을 틀어쥐고 놓지 않으면서 질책하며 심지어는 욕을하였다. 이러한 방법은 마치 다른 수련생을 선동하여 그 수련생을 괴롭히는 것과 같았는데 나는 그들의 행위에 당문화의 요소가 매우 강함을 느꼈다. 이때 나의 마음은 몹시 무거웠는데, 이것이 곧 동수인가? 이것이 대법중에서 수련하는 사람의 행위란 말인가? 수련의 환경이 왜 이러한가? 라고 생각하였다. 이때 나의 수련상태는 매우 소침해졌으며 심정도 매우 하락하였다. 처음에는 깨달음이 같은 일부 동수들과 교류했는데, 마찬가지로 동수들은 이러한 방식으로 착오를 범한 수련생을 대하지 말아야 한다고 나무라면서 마음속으로 수련생을 위해 불평을 늘어놓아 움직여진 마음을 고요히 할 수 없었다.
나중에 나는 《전법륜》을 한번 암송했고 사부님의 《정진요지》와 근간의 각지 설법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공부했다. 이 과정에서 나는 우선 먼저 대법제자가 응당 무엇을 해야 하며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를 명확히 하였다. 또한 법공부하면서 안을 향해 찾았다. 무엇 때문에 자신의 마음이 그처럼 움직였는가? 무슨 집착심이 있는가? 법을 얻은 이래 종래로 이처럼 소침한 적이 없었다. 착오를 범한 수련생을 나는 알지도 못하는데 내가 무엇 때문에 마음이 이처럼 평온하지 않단 말인가?
나는 우선 자신에게서, 속인중에 다른 사람이 불공평한 대우를 받는 것을 보면 매우 분개해 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찾았고 마지막에 나는 끝내 자신의 근본 집착을 찾았는데, 그것은 곧 대법 수련을 일종 정신적인 기탁으로 간주하는 것이었다. 속인들은 서로 물고 뜯고 하며 서로 의심하고 속일 수 있으나, 우리 동수들은 대법중에서 수련하니 동수들 사이는 “쩐, 싼, 런”의 표준으로 자신을 요구하여 이 환경을 순정하고 아름다워야 하며, 자신은 그 중으로부터 이 아름다운 일체를 향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동수들 사이에 서로 쟁투하고 심지어는 당문화의 “사람을 혼낸다”는 방식로 나타날 때면 자신의 이 사람 마음이 매우 큰 상해를 받았으며 마음도 매우 불편했는데, 이는 일종의 대법을 이용하는 얼마나 더러운 자사(自私) 심리인가!
자신의 근본 집착을 찾아내었고, 진일보로 내심 심처에서는 자신이 대법제자가 되어 법을 얻은 사명은 “조사정법, 중생구도”이지 대법 중에서 그 무엇을 구하고 이 아름다움을 향수하는 것이 아님을 명확히 하였다. 동시에 법공부 중에, 이 부분의 동수들이 착오를 범한 동수에 대해 질책하고 원망하며, 동수의 착오를 틀어 쥐고 놓지 않는 것은 동수에게 흑색물질을 증가시켜 주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다면 돌이켜 자신을 보니 자신이 이 부분 동수들의 착오를 범한 동수에 대한 작법에 대해 질책하고 원망하는 것 역시 같은 후과를 가져오지 않겠는가? 반드시 홍대한 자비로 수련생을 포용해야 한다. 동수도 역시 수련 중의 사람으로서 의연히 사람 마음이 존재하므로 착오를 피하기 어렵기에 착한 마음으로 상대방의 부족점을 지적할 수 있는 이것이 더욱 좋은 것이다. 만약 지적하여 주지 않는다면 상대방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 것이므로 반드시 정념으로 수련생을 가지하여, 그가 오직 대법 중에서 수련하기만 한다면 대법은 일체를 개변할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사실 동수의 착오의 표현 역시 모두 다른 공간의 사악한 요소가 동수의 집착이 있는 틈을 타고 기어 들어와 우리 지역 대법제자 정체에 간극이 있게 하여 그것들로 하여금 숨쉴 기회가 있게끔 하는 것이기에 우리는 절대 사악의 속임수에 빠지지 말고 내심 심처로부터 이 간극을 없애고 정체를 원용하며 사악을 깨끗이 소멸해야 한다. 이것이 곧 사부님께서 보시려고 하는 것일 것이다.
이 단락의 수련 경력을 말하면 아주 간단하지만 사실은 비교적 길고 고통스러웠던 과정으로, 몇 달이란 시간을 경과했다. 법공부와 동수들과의 부단한 교류를 통해, 나는 또 자신에게서 매우 많은 집착을 찾았다. 예를 들면, 질투심, 다른 사람이 말을 하지 못하게 하는 마음, 강렬하게 자아에 집착하는 마음, 당시 자신에게 존재하는 아직도 뿌리뽑지 못한 색욕심 등이다. 이런 것들은 내가 수련 중에서 결심을 내려 반드시 제거해버려야 할 집착심이었다.
지금은 자신에게 그 마음이 나타나기만 하면 나는 기본상에서 감지할 수 있어 즉시 그것을 틀어쥘 수 있고, 제거해버릴 수 있으며, 속인의 환경 중에서 자신의 일사일념, 일언일행을 파악할 수 있다. 어떤 동수들이 지금 어떤 동수들의 언행이 법에 있지 않다고 말할 때면 나는 수련생을 깨우쳐줄 수 있으며, 우선 먼저 자신의 심태를 순정하게 하고 수련생을 질책하거나 꾸짖는 것이 아니라 자비한 마음으로 동수에 대해 관용한다. 동시에 이 일이 나의 무슨 마음을 촉동시켰는가, 나는 무엇 때문에 마음이 움직였는가를 찾는다. 왜냐하면 우리 신변에 발생한 일은 모두 아무런 원인이나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라 모두 우리들이 버려야할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이 단락의 수련 경력은 나로 하여금 마치 금방 진정으로 수련의 길에 들어서게 한 것 같게 했고, 금방 안을 향해 찾는 방법을 배운 것 같았다. 진정한 대법제자로서 오직 진정으로 안을 향해 찾아야만 비로소 모순속에서 승화할 수 있으며 좋은 일, 나쁜 일은 모두 우리 수련제고에 있어서 좋은 일로 변할 수 있다. 만약 우리 매개 동수들이 모두 진심으로 안을 향해 찾고 우리 자신의 공간마당을 순정하게 한다면, 우리는 곧 매우 견고하여 부서지거나 무너뜨릴 수 없는 하나의 정체를 형성할 수 있으며 일체 바르지 않은 것을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나는 마음속으로 그런 동수들을 생각할때면 내심으로부터 한 갈래 홍대한 자비가 용솟음쳐 나오며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수련생을 부른다.
“동수여! 이번 풍파는 이미 지나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마음을 고요히 하고 안을 향해 찾았습니까? 우리는 반드시 사부님을 따라 우리가 무엇을 하러 왔는가를 알아야 하며 명백히 해야 합니다! 더이상 누가 옳고 그른가를 따지지 말아야 합니다. 속인중의 옳고 그름이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습니까? 그러나 일체는 법을 스승으로 모셔야 하며 더는 그처럼 강렬하게 자신을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절대로 더는 사부님의 법을 떠나 속인 형세의 변화에 집착하지 말아야 하는데, 일체의 일체는 모두 법의 위력입니다! 모두가 사부님의 파악 중에 있습니다! 우리는 착실하게 수련하며 사부님께서 무엇을 하라고 하시면, 우리는 최선을 다하여 무엇을 잘 합시다. 자신을 내려 놓고 일체중에 법을 가장 크게 간주하면서 법속에서 승화합시다!”
이것은 자신의 현 단계에서의 인식이다. 부족한 부분에 대해서는 동수들의 자비한 시정을 희망한다.
문장완성 : 2008년 5월 14일
문장발표 : 2008년 5월 15일
문장수정 : 2008년 5월 15일 01:31:58
원문위치 : http://search.minghui.org/mh/articles/2008/5/15/17849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