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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법의 각도로 사람에서 걸어 나와야 -《7년간의 자료점 생활에서 나의 수련심득》글을 본 감상문

글/대륙대법제자

【명혜망 2008년5월 11일】이 문장을 읽고 무척 동감이 갔다. 문장 속에 반영된 이런 일들은 많은 자료점에서 비슷하게 발생하는 것이므로 일부 문제에 대해서는 반드시 말해야 한다. 물론 일부 자료점은 이렇지 않을 수 있다. 일부 수련생이 이 글을 읽은 뒤 독후감을 쓴 것을 보고, 나도 그들이 쓴 독후감을 바탕으로 나 자신의 자그마한 인식을 말하고자 한다.

1, 자료점을 설명하는 것은 폭로하는 것과 같다

일부 동수들은 대륙 동수들이 부딪히는 많은 모순이 동수 당사자끼리의 교류와 의사 소통이 부족해서 조성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치적으로 잘못된 말은 아니지만 실제로 일부 일들은 설명할 수 없거나 ,심지어 설명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대법제자 간에 모든 일을 명백히 물어야 하고 도대체 어찌된 일인지 알아야만 간격과 오해를 제거할 수 있다면, 그것은 모종의 의미로 영원히 사람의 이해로 낡은 모순은 해결하지만 또 새로운 모순이 온다고 본다. 자료점 동수들이 매 한 가지 일마다 모든 동수들에게 설명한 뒤 다시 가서 행했다면 이 자료점은 설립될 수 없었을 것이다.

사실 대륙에서 처음 시작된 많은 자료점들은 많은 동수들이 반대하는 중에 설립된 것으로, 지금도 많은 동수들이 소형 자료점이 만 천하에 꽃 피우듯 생기는 것을 찬성하지 않는 것과 같다. 만약 당신이 이런 인식을 가진 동수에게 자료점을 어떻게 설립하겠다고 말한다면 인위적으로 번거로움을 찾는 것과 같다. 이는 곧 사악의 박해로 죽은, tv에 삽입 방송을 한 수련생을 떠올리게 한다. 그들이 당시 처한 상황은 정체적으로 반대하는 목소리였지만, 그들은 우주를 진감시키는 위대한 장거를 행한 것이다. 만약 그 당시 정체적으로 대다수 동수들이 법에서 이해할 수 있었다면 아마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정념으로 문제를 보자》란 경문을 쓰지 않으셨을 것이다. 돌이켜 보면, 이 부분 동수들이 박해로 사망에 이르기까지 된 것은 우리 매개 동수들에게는 책임이 없었는가? 다시 말해 그 당시 수련생이 일을 할 때, 그리고 그들이 불법으로 박해 당하는 중에, 그들은 우리 동수들의 정체적인 정념과 정념으로 가지된 마당을 찾기가 무척 힘들었을 것이다.

《무선tv방송으로 진상을 알리는 동수에게》란 글을 쓴 작가의 말에 의하면, 그 당시 해당수련생이 아주 빈틈없이 엄격하게 했지만, 돌이켜 보면 그 일에 함께 참여한 일부 동수의 심성이 제 위치에 도달하지 못해 박해 속에서 감당하지 못하고 많은 동수들을 폭로했다고 한다. 왜 그 당시 심성이 제 위치에 도달한 수련생을 찾아 협력하지 않았는가. 원인은 당시 동수들 몇 명이나 이해할 수 있었겠는가 하는 것이다. 다른 것을 말하지 않더라도 이 일을 만약 당신이 이해하지 못하고 심지어 반대하는 동수에게 말했다면, 그들은 수구하지 않을뿐만 아니라 심지어 일종 분노를 지니고 삽입방송 일을 전했을 것이다. 바로 대륙의 자료점에서 가끔 자료점의 동수와 관련 협조인들이 일시적인 모순에 부딪혔을 때, 일부 협조인들은 곧장 다른 동수들에게 가서 자료점의 일체 일들을 전부 이야기하여 자신의 기분을 분출시킨다.

특히 자료점과 유사한 일부 일들은 자료점에 관계하지 않은 동수들을 놓고 말할 때 아주 평상적인 게 아니다. 당신이 설명하자마자 사실 바로 폭로하는 것이다. 많은 자료점 동수들은 자료점에 있지 않는 동수들과 모순이 생겼을 경우 상대방의 오해를 풀기 위해 방법을 다해 남을 찾아가 설명한다. 설명하지 않으면 그래도 좋은데 설명하자마자 상대방은 그가 자료점 동수인지 몰랐다가 설명을 들으면서 자료점 동수임이 드러난다.

2. 심성 제고는 간격을 제거하는 근본

이 글을 통해 대륙 자료점의 수련생을 특별히 일깨워주고자 한다. 속인의 간격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설명을 할 수 있지만, 수련인의 간격은 각자의 심성 제고에 의지해서 없애야 한다. 일부 수련생은 사부님께서 설법 속에서 제기하신 대법제자 사이에는 더 이상 무슨 간격이 있으면 안 된다에 대해 마땅히 수구해야 할 것도 부정한다. 그는 동수간에 모든 이야기를 다 털어놓을 수 있어야 간격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해, 안전 원칙을 단번에 엎어버린다. 사실 일체 간격은 육체적인 사람 마음에 숨어있는 게 아닌가. 서로가 사람 마음을 제거하지 못하면 당신이 아무리 설명해도 소용없다. 그 간격은 사실 그 사람 마음의 표면 반영이고, 그 사람 마음이 진정한 간격이다. 나는 이에 대해 사부님께서 설법 과정 중에 사람에게 인류 사회 문제의 일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데는 사람 마음이 근본이라고 하신 것과 같다고 인식한다. 수련인 정체에서 반영된 그 모순 역시 사회에서처럼 사람 마음부터 착수해야 근본을 치유할 수 있는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각자들은 만나서 한번 웃으면 웃음의 의미를 안다고 하셨는데, 우리는 이에 대해 단지 이야기로만 듣고 그 속의 내포된 법리는 깊이 체험하지 않는 게 아닌가. 그 각자는 왜 만나서 한번 웃자 모든 것을 알게 되는가? 나는 그 각자가 속인과 가장 다른 것이라면, 그가 모든 문제를 고려하는 출발점이 자신을 위한 게 아니라 상대를 위한 것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한 생명이 곳곳에서 타인을 생각할 때 그는 남이 설명해 줄 필요가 있겠는가? 바꿔 말하면 만약 대법제자의 정체적 심태가 “타인을 위하는”각도와 높이로 승화되지 않으면 그럼 일종의 초상적인 경지에 도달하기 아주 힘들다. 그렇다면 일체 문제를 해결할 때 사람이 설명하는 소통 등등의 수단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마치 인류사회가 법률에 의지하여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것과 같다. 법률은 많을수록 더 나쁘고 관리하면 할수록 더 난잡하다. 사부님께서 법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만약 사람마다 모두 자신을 단속한다면 그 법률과 경찰은 필요 없는 것이다.

일부 개별적인 동수의 사람마음처럼 만약 어떤 일에 대해 자신이 모르고 있다고 하여 문제로 삼아 기어코 꼬치꼬치 캐묻는다면 당신이 설명해 준다고 해서 그가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는가? 엄격하게 말해서 당신이 설명하자마자 사악의 올가미에 걸린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모든 일을 자신이 알아야 한다는 사상은 근본적으로 자신이 아니라 낡은 세력의 조종 하에 일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많은 자료점 동수들에 대해 다른 동수들은 잘 모른다. 그리고 자료점 수련생이 아닌 수련생을 자료점 동수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사실 이는 동수의 안전을 위해 행한 일종의 유의적인 협력이다. 그렇다면 일부 모순이 자료점 동수인 것 같은 동수에게로 향할 수 있다. 사실 그 수련생은 전혀 자료점 수련생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모순이 당신 몸에 던져지면 당신은 묵묵히 가져야 한다. 굳이 설명하려 하지 말아야 하는바, 설명하기만 하면 안전을 위해 정성 들여 배치한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고 만다.

3. 왜 초조한가?

글에서 작가의 초조한 심태가 보인 것은 아마 개인의 각도에 서서 이야기한 게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동수들에게 자신들의 진실한 처지를 확실히 알려서 이 글을 읽는 동수들이 깊이 생각해 보도록 하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의 그 초조한 심태는 자료점 동수의 위치에선 쉽게 이해된다. 오랜 시일동안 사업 압력과 걱정, 동수 간에 인식의 부동함과 모순의 누적, 이런 것들은 아마 당사자 자신만 알 것이다. 비록 남에게 이야기해 주어도 정말로 동수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할 수 없다.

심리적 압력의 상당 부분은 동수들이 시간이 긴박하다고 느끼지만, 오랫동안 정체적으로 동수의 움직임이 없어보여 일어난 것이다. 그들 자신이 정말 초조하고 긴박할 때는 아주 적지만, 많게는 일정하게 자신을 잊은 경지에서 일어난다. 나 역시 동수간의 정체가 오랫동안, 심지어 정법의 마무리 단계에서도 미적거리고 제 멋대로 인 것을 자주 보는데, 그런 심리는 초조함과 어쩔 수 없는 것으로 형용할 수 있으며, 울고 싶은 생각마저 든다. 만약 울음으로 동수의 마비된 그 일면을 깨울 수 있다면 정말이지 우는 것도 가치가 있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사람을 구도하겠다는 서약을 실현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인간 세상에 온 게 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만약 우리가 정말로 노력하여 열심히 했다면 그 세인들이 정말로 구도되지 않아도 최소한 우리는 양심은 가책을 받지 않을 것이고 또 자신한테도 면목이 있는 것이다.

많은 시기에 자료점 동수 한 사람 한 사람이 사악에게 박해 당했다. 사실 이번 박해 속에서 사악은 먼저 우리 정체 속에 허다한 것을 배치했다. 나는 구세력은 매개 동수의 사(私)를 이용하여 서로 간에 간격을 만들었다고 보는데, 이는 구세력이 배치한 것 중 한 걸음에 속한다고 본다. 개인을 위해 당신은 나를 상관하지 않고 나도 당신을 상관하지 않아 우리 개개인이 곤란에 처한 관건적 시각에, 홀로 박해를 당하고 있어도 다른 사람은 또 모르고 관심도 없다. 사악은 이런 수단을 윤번으로 쓰는데 앞장 서 가고 있는 동수의 몸에 쓰고 있는 것이다.

왜 자료점 동수들이 박해 당해도 다른 동수들은 여전히 그렇게 미혹되고 이해하지 못하고 심지어 “당연하다”고 까지 여기는가. 한 가지 원인은 우리가 평소 그들의 각도에 서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속인처럼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표현된다. 사고가 난 후 모두들 함께 모여 앉아 평론하면 그만이다. 이것이 바로 왜 일부 “총명한” 동수들이 지금까지 자료점 일에 앞장서지 않는가하는 원인이다. 하지 않더라도 박해 받아 “떨어지는” 것 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私)를 위하는 각도에서 고려할 때 영원히 자신의 안위와 득실이기 때문이다. 사실 수련의 각도에서 그는 영원히 진정으로 승화할 수 없다. 그가 보게 되는 것은 영원히 사람의 득실이고, 얻게 되는 것 역시 사람의 물건이고 잃는 것은 오히려 진정한 수련의 기연이다. 그러므로 안과 밖 모두 사람이 아닌가?

가끔 자료점 동수들 간에도 자신이 책임진 범위를 제대로 따라가지 못해 조급해 하는 경우도 있다. 이 때문에 자료점 동수 간에 모순이 나타나는 늘 이런 일에 부딪쳤다. 사람 여기서 보면 사업을 누가 하고, 누가 힘들고, 누가 행하는 지 모두 알고 있다. 때문에 동수 간에 서로 양해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수련은 일종 “남을 위하는” 게 무엇보다 더 중요하다. 일부 일에 대해 정말로 조급하지 말아야 하는바, 동수들의 정체 수련 상태는 간단하게 몇 개 자료점 동수들에 의지하는 게 아닌, 근본적으로 정체 속에서 매개 동수의 수련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근본적으로 말하면 수련은 그래도 각자 동수 자신이 결정하는 것이지 어느 자료점의 동수나 협조인이 결정하는 게 아니다. 전국 각지 동수의 수련 상태는 천차만별이며 거리 또한 매우 크다. 한 자료점의 동수 혹은 협조인으로서 한 지역의 수련 환경이 자신에게 상당히 큰 책임이 있다고 여기는 것은 매개 대법제자로서 마땅히 갖추어야 할 심태이다. 이는 자료점 동수과 협조인만이 갖춰야 할 심태는 아니다. 자료점 동수 혹은 협조인은 자신이 맡은 역할만 잘 할 뿐이지, 각자 동수들이 맡아야 할 역할까지 잘 할 수는 없다.

4. 기점을 바로 잡고 손을 놓아야 할 때 손을 놓아야

소형 자료점이 곳곳에 생기는 것은 정체 속에서 매개 수련생이 성숙된 모습을 체현하는 것이다. 이런 결과는 정체적으로 노력한 결과이다. 자료점 동수로서 평소 착실하게 자신을 잘 닦아야, 심성방면과 기술방면을 포함하여 잘 닦아야 한다. 그래서 수련생을 잘 이끌어 소형 자료점이 곳곳에 생기게 하는 길로 걸어야 한다. 서로 기다리고 의지하지만 말아야 한다. 손을 놓아야 할 때는 손을 놓아야 하는데 마땅히 잘 해야 할 때 잘하면 된다. 기대에 못 미치는 지역은 항상 있을 수 있지만 관건은 모두가 노력하여 아쉬움이 없도록 하는 것이다. 마음이 조급해져 모든 사람을 끌어내는 게 아니라 수련은 매개 생명 스스로가 선택하는 것이다. 관건은 우리 모두들 열심히 노력했고 자신의 생명의 일체를 바쳐 영원히 아쉬움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일부 동수들은 이 문장을 본 후 당신들은 왜 그렇게 바빠야만 하는가. 멈추고 법공부를 해야 할 때는 법공부해야 한다고 한다. 내가 보기엔 자료점 동수들은 항상 한 지역이란 큰 각도에서 문제를 보고, 다른 동수들은 개인의 환경에서 문제를 본다. 이것이 바로 왜 자료점 동수들이 그 곳에 서서 목이 터지도록 외쳐도 누구 하나 대답이 없는가 하는 것이다.

5. 길을 닦을 줄 알면서 또 걸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더 나아가 각자 서 있는 각도가 다르기 때문에 보는 것도 다르고, 심지어 모두 한 방향을 향해 볼 수 있는가하는 문제이다. 이는 왜 일부 동수들이 자신의 수련과정을 결합해서 이 문장에 대해 이야기하는지 나는 이해된다. 나는 왜 그(그녀)들처럼 사업이 그렇게 무겁고 압력이 크지 않을까? 당신이 나를 보라, 내가 무엇을 하려고 하면 사부님께서는 나에게 모든 것을 배치해 주신다. 기술 동수들이 나를 찾아오는데 사부님께서 자신에게 아주 자비롭다고 말한다.

먼저 기술을 두고 보더라도 주동적으로 기술을 터득한 동수와 주동적으로 기술을 배운 동수들은 자신이 기술 방면에서 얻은 깨달음의 차이가 무척 크고 심지어 완전히 다르다. 나는 우리 대법제자의 수련은 결국 길을 닦을 줄 알면서 길을 걸을 줄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우리는 항상 길을 걷는 자의 각도에 있지 길을 닦는 자의 각도에서 바라보지는 못한다. 그래서 항상 바라보는 문제의 차이가 크고 심지어 남이 볼 수 있는 문제라도 자신은 전혀 보지 못하고 항상 믿지 않을 수 있다.

6. 자비를 말하다

다시 자비 이 면에서 말하면, 속인은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을 신이 눈앞에 전부 배치해 주어 생활이 편안할 때 신이 자신에게 자비롭다고 여긴다. 사실 진정한 자비는 반대이다. 신이 생각하는 자비는 사람이 본 것과 전혀 다르다. 신은 사람이 빨리 고생을 하여 업을 갚게 하는데 이것이야말로 사람에 대한 자비이다. 신과 사람의 자비에 대한 인식은 왜 반대인가? 왜냐하면 한 가지는 타인을 위하는 마음이고, 다른 한 가지는 자신을 위하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사부님의 자비를 항상 사람의 기점에서 인식하고 자신이 필요한 일체를 사부님께서 우리의 눈앞에 보내주셨다고 생각한다. 일체 문제를 해결하면 사부님께서 얼마나 자비로우신가하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생각해 보았는가, 어떻게 하면 사부님께 적게 걱정을 끼쳐드릴까를. 때문에 자신의 일이 홀가분하면 기뻐하고 매우 바쁜 수련생을 보면 잘못되었다고 항상 생각한다. 그럼 우리는 예전에 바쁘게 다니던 동수들도 나와 같은 그 홀가분함을 느껴보도록 해야겠다고 생각 해 보았는가? 얼마만큼 우리는 이에 대해 생각해 보았는가.

사실 법을 실증하는데 앞장 선 동수들은 모든 일을 할 때 적극적으로 주동적으로 가서 하지, 사부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해주실까 무엇을 가져다주실까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어떻게 사부님 정법의 각도에 서서 일체 문제를 보고 대할 것인가를 생각한다. 사부님께서 자신의 각도에 서서 생각해 보시기를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사부님의 각도에 서야 하는지를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인성(人性)과 불성(佛性) 의 거대한 차이이다. 사업 방면의 주동성과 수동성은 표면에서 볼 때 동작이 빠르고, 느리고, 긴박하고, 게으름을 피우고의 문제이다. 사실 수련 이 쪽에서 그 심성의 차이는 거대한바 사람과 신의 구분이다.

시시각각 앞장 서서 걸어가는 자료점의 동수와 협조인 혹은 자료점을 위해 기술을 제공하고 도와주는 동수들은 사업 면에서 단지 한 가지 일 혹은 두 가지 일만 하는 게 아니라 일을 하기만 하면 아주 많이 한다. 기술적인 부분도 항상 전면적이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7,8년이 걸려서는 안 되는데 그럼 모든 것이 늦다. 항상 7,8개월이 기술을 돌파하는 큰 고비인데 전면적으로 혼자 커버할 수 있는가하는 게 문제이다. 왜 일부 가정 자료점은 몇 년이 지나도 독립하지 못하지만, 자료점의 수련생은 몇 달이면 스스로 독립할 수 있는가? 타인을 위하는 각도에 서면 이해하기 쉽다. 모든 기술을 동수의 방문에 의지하는 동수와 기술을 곳곳에 가져다 줄 수 있는 동수 어느 쪽이 더 가뿐한가? 전자 동수의 가뿐하다는 의미는 자기 사업에서 체현되는 가뿐함이지만, 후자 동수의 가뿐함은 그의 기술을 많은 동수들한테 줄 수 있다는 가뿐함으로 정체적으로 법을 실증하는 사업부분에서 전면적으로 가뿐할 수 있음이다. 이는 차이 나는 게 아닌가?

이 글을 쓴 수련생은 여러분들이 모든 문제를 “타인을 위하는” 각도와 심태에 입각해야지 “자신을 위하는” 각도와 심태에서 고려하지 말고, 정체의 각도에서 문제를 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라 본다. 여러분들과 누가 더 높이 수련했는지 비기려는 게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더 많은 동수들이 정법의 각도에 입각해서 사람으로부터 걸어 나와야 함을 호소하고 있다.

수련생이 쓴 문장을 내가 정확하게 보고 정확하게 이해했다고 할 수 없다. 동수의 일부 문제를 인용하여 나 자신의 관점을 이야기 한 것으로, 관련 수련생을 겨냥하여 이야기한 게 아님을 밝힌다.

문장발표: 2008년 5월11일
원문위치: http://search.minghui.org/mh/articles/2008/5/11/178011p.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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