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기남 대법제자
【명혜망 2008년 4월 20일】 현재 기남 동수들의 일부 단체에게서 내가 보기에 이미 좋지 못한 현상이 출현했다. 당연히 좋고 나쁜 것은 마음에서 오는 것이고, 견결히 구세력의 일체 안배를 부정하는 것도 역시 마음에서 결정하는 것이다. 관건은 재빨리 사람의 마음을 버리고 법에 동화하는 것이다. 이 글은 기남 동수들에 대하여 쓴 것이지만 주변의 여러 곳에서도 이러한 문제가 생겨서 생각난 것이다.
곧 내가 본 두 개의 돌출한 문제를 중점으로 말한다.
*하나는 동수와 협조인 사이의 관계
우선 협조인으로서 알아야 할 것은 자신이 도대체 무엇을 하는가이다. 수련인가? 창업인가? 기세높은 것은 형세이지 심성을 대표하지 못한다. 내가 인정하기를, 좋은 협조인은 수련생을 자기의 신변에 집중시키고 촌보도 떠나지 않을 것을 제창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반대로 동수들이 재빨리 성숙되어 자기와 떨어지길 희망하는 것이다. 근본적인 것은 어떻게 매 수련생이 사부님의 법을 스승으로 삼아 법을 믿고 사부님을 믿음으로 각자의 길을 걸어 나오는가 하는 것이다. 동수들이 어느 한 협조인을 너무 믿는 것은 큰 불행인 것이다. 내가 이해한 《전법륜》 중에서 말한, 사람들로 하여금 그 사교(邪敎)의 영수를 믿도록 하는 것이지 그 교를 믿도록 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하나의 대법수련 협조인이 의도적 혹은 무의식 중에 이런 마음이 생기면 그것은 곧 자신에게 커다란 시끄러움을 가져오는 것이다. 그 구세력을 어떻게 말하는가 하는 것보다 기실 이것은 변상적으로 대법을 이용해 자신의 위덕을 수립하는 것이므로 상당히 두려운 것이다. 생각해보라, 만약 사부님과 법이 없다면 우리가 속인 사회에서 아무리 휘황하여도 백 년 후에는 땅속을 향하는 것이 아닌가?
나 자신이 스스로 무수히 넘어지고 협조인들도 넘어지는 것을 많이 보고 나서야 깨달은 것은 하나의 협조인은 하나의 평범하고 보통적인 동수로써, 단지 정체를 위하여 많은 심혈을 기울인 착실한 수련자인 것을 알았다. 이런 작용은 사람의 그런 영도식의 응집력이 아니고 반대로 이런 응집력을 수시로 “흩어지면 입자”, “모이면 정체”의 자유로운 운용이다. 매 수련자마다 법속에서 각자마다 얻는 것을 얻고 “흩어지면 입자”, “모이면 정체”로 법중에서 정체를 원용하는 것이고 우리 어느 협조인을 원용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수련인들도 응당히 청성하게 알아야 할 것은 능히 우리를 원만하게 하는 것은 곧 사부님과 법이다. 사부님과 법을 떠난다면 한 발자국도 걷기 힘들지만 어떠한 협조인을 떠나도 긍정적으로 될 수 있는 것이다. 사부님과 법에 대한 견정한 믿음이지 어느 한 협조인이나 기술인원에 대한 믿음이 아니다. 실제로 부동한 곳에 존재하는, 일종 법을 실증하는 일 중에서 출현한, 어떤 협조인을 떠나자 곧 더 진행하기가 힘든 현상, 그 한 협조인을 잃어버리니 중심을 잃어버린 격이 되어버리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다. 기실 많은 협조인들이 박해를 받은 것도 모두 이 방면의 원인으로 인해 조성된 것이다. 오직 직접적인 요소와 간접적인 요소의 간격이 있을 뿐이다.
기남에서 어떤 협조인들은 이미 자아 팽창하는 조짐이 나타나고 있는데, 우리 수련인들은 이미 그 협조인의 명성을 듣고 보러가는 일종의 자아팽창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마치 그 협조인의 수련환경이 자신에게 안전을 조성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런 협조인과 수련생은 이미 일종의 강세를 형성하여 피차 떨어지기가 힘든 것이다.
여기에서 아주 주의해야 할 문제는 어떤 협조인도 사악은 “감히” 움직이지 못하므로 동수들이 몰려들어 무엇을 구하려고 하면 안 된다는 사실이다. 사악이 정말로 감히 그를 움직이지 못하더라도, 그러나 협조인 옆으로 몰려온 수련생을 박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 진상도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사악이 그물을 늘어놓던지 나무 그루터기를 지키며 토끼를 기다리는 형식인줄 누가 알 수 있는가? 누구도 감히 우리 여기는 아무일도 발생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가? 반대로 말한다면 만약 어떤 수련생이 협조인을 집에서 납치당하고 협조인은 아무일이 없다고 할때 이 납치당한 동수의 문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법을 실증하는데 가히 무서울 것 없고 자아를 실증하여도 가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 이 두려움 없는 것은 하나는 신의 일념이고 하나는 사람의 일념이다. 또 수련의 전부가 하나의 “두려움”이 없다고 하여 수련원만하는 것이 아니다. 대륙에서 이미 출현한 특무가 이런 “두려움” 없는 이 표면 현상을 이용해 아주 쉽게 무수한 동수들을 미혹시킨 일들이 발생한 것이다. 남따라 노래하고 눈물흘리는 것은 수련인에게 응당 있어야 할 이지와 지혜를 잃어버린 것이다. 어떤 일이고 눈으로 본 것만 중요시하고 법에서 똑똑하게 이해하지 못하면 안 되는 것이다.
내가 보건대 어떤 협조인은 근본적으로 안전 의식이 없다. 만약 자신의 안전만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수련인의 선택 문제이지만 만약 정체중의 동수들과의 관계와 영향으로 인해 안전문제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심성 문제이다. 하나의 생명이 다른 사람의 안전을 위해 자신의 안전을 돌보지 않는 것은 이것은 하나의 경지이다. 한 생명이 다른 사람의 안전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곧 하나의 도덕문제이다. 협조인의 정념이 강해 문제가 생기지 않으면 우리는 기쁘지만, 만약 우리 정체 동수들이 모두 정념이 강해 문제를 생각할 수 있을 때, 이는 가장 기뻐할 일이다.
* 두번째는 협조인과 중개상과의 관계
동수, 협조인과 중개상은 일종의 무슨 관계인가? 사람 여기에서 말하면 매매 관계 혹은 상업 관계이고 수련으로 말하면 곧 구도와 피구도 지간의 관계이다.
여기에서 말할 것은 다수 동수와 중계상과의 관계 문제이다.
우선 동수의 물건을 사는 문제인데 가격상에서 너무 따질 필요는 없다. 내가 친히 실험해보았는데 한 중개상인이 주는 가격은 다른 중개상인도 역시 이 가격을 준다. 동시에 외지 시장에서 동일한 가격에 질량도 사보았다. 모두 동일한 상품의 대리상인 것이다. 질량은 문제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지방마다 가격차는 정상적인 것이다. 예를 들면 한 장의 시디(cd) 가격차이가 한 푼되는 것은 아주 정상적인 것이다.
지금의 문제는 상품의 가격과 질량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상인이 대법진상을 이미 접수했는가에 신경을 집중하는 것이다. 일단 그 중개상이 진상을 접수하면 (정말 명백한 것인지 역시 문제이다) 마치 귀속점을 찾은 것처럼 다른 동수들도 물건을 사러 오는 것이다. 전에 사악이 검은 손을 중개상인에게 내밀어 동수들이 박해를 받은 것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동수들은 왜 경각성을 높이지 않는가? 매 동수들의 부동한 사람 마음이, 상인이 진상을 알았기에 곧 마음을 놓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아닌가? 사실 이 인식은 매우 위험한 것인데, 마치 하나의 경혈같아 너무 쉽게 맞을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이렇다면 너무도 위험한 것이다.
법리에서 이해한다면 안전의 열쇠는 우리 매 동수의 손에 있는 것이지 어느 중개상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의 중개상은 “동수보다 더 동수인 것이다” 가히 성급이나 시급 동수의 자문처로 될만한 것이다. 우리는 수구할 수 있지만 그 중개상에게 따라서 수구하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가히 생사를 내려놓을 수 있지만 그 중개상인도 우리를 따라 생사를 내려놓으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중개상인이 우리를 위해 일부 편리를 제공할 수는 있지만 우리는 완전히 중개상을 우리의 동수로 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 중개상과도 거래를 할 수 있지만 어떠한 문제에서도 이지적이어야 한다.
* 다음은 개별협조인과 중개상인과의 관계
어떤 협조인은 이미 완전히 자신의 신분과 중개상의 신분과 혼합한 것이 아니라 바꾼 것이다. 동시에 동수지간의 모순을 중개상인에게 말해주고, 직접 이름만 대지 않은 것 뿐이다. 누가 협조인이라고 부르면 북쪽도 분간하지 못하고 중개상이 몇 마디 올려추어 주면 남쪽도 잊어버리는 것이다. 협조인은 앞장선 양이 아니라 발을 디딜 그 돌인 것이다. 우리는 반석같은 인내력과 감당력으로 전체 동수의 부족점을 포용할 수 있고 심지어 소화할 수 있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이렇게 계속 내려가면 속인중에서 수양이 있는 분도 당신을 눈 아래로 볼 것이고 속인의 설에서도 당신이 내외를 분간하지 못한다고 말할 것이다. 동시에 당신을 고상하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누구를 막론하고 동수중에서 위망이 얼마나 높든지 속인속에서 명망이 얼마나 높던지간에 사악이 이용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왜 우리의 아름다운 일면을 속인에게 보여주지 않는가? 어떤수련생이 잘못했으면 우리는 가히 원용할 수 있고 어떤 문제를 속인이 들었을 때에는 지혜롭게 잘 원용해야 한다. 필경 우리는 수련하고 사람을 구하기에 이런 것을속인이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우리가 진상을 조금만 높게 말해도 한 마디 말이 하나의 생명을 회멸할 수 있는데, 당신의 수련중의 일을 속인식의 모순처럼 말하면 속인으로 하여금 어떻게 “파룬따파 하오”라는 일념을 나오게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개별적인 협조인 문제를 말했는데, 그럼 이런 현상이 능히 산생하고 존재하는 것은 바르지 않은 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장은 우리 전체 동수들이 형성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 동수나 개별 협조인의 문제일 뿐이 아니다. 협조인을 법에서 배합해 주어야하지 사람에서 배합하면 되지 않는 것이다.
이런 복잡한 국면은 이미 상당한 시일동안 있었던 것이다. 동수들의 중시를 불러 일으키고 재빨리 이런 법을 빗나간 상태에서 걸어나오기를 희망한다. 본 문장은 교류를 하자는 것이지 질책하자는 것이 아니다.
문장완성 : 2008년 4월 19일
문장발표 : 2008년 4월 20일
문장수정 : 2008년 4월 24일 23:34:35
원문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8/4/20/176815p.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