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광동성 잠강시 대법제자
[명혜망 2008년 4월 24일] 어떤 수련생은 법공부와 법암송 과정에서, 어떤때 책속의 어떤 단어를 잘 읽을 수 없거나 혹은 언어 사유에 그다지 부합되지 않는다고 여기면서 그곳에서 멈추고는 미약하게나마 이해할 수 없다고 느끼거나 얼마간 저촉 심리가 생겨나곤 한다. 예전에 나도 그랬다.
사부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고, 법에서 어떻게 말씀했으면 우리도 곧 어떻게 외워야 한다. 법을 배우고 외우는 과정중에 아주 큰 정도로 고험하는 것이 바로 사부님에 대한 바른 믿음과 수련에 대한 성심이다. 똑같이 “개광”과 같은 이러한 법적인 일을 해도 부동한 심리 상태와 경지의 화상에게는 부동한 결과가 있다. 법공부도 마찬가지로서 문자 자체, 어법 자체가 표달하는 뜻은 표면적인 단일한 것이지만 배후의 진정한 함의, 끝없는 법리는 다른 공간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이 법리는 심지어 일념이면 즉시 된다. 그러므로 어떤 때 사람의 언어로 표달하기만 하면 곧 그런 것이 아닐 수 있다. 때문에 우리는 더이상 “이 말은 어쩐지 순통하지 못하다. 저 말은 어쩐지 잘 이어지지 않는다”는 이러한 생각을 품고 법공부를 대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현대화한 불교학자가 그들 종교의 불법을 “비판적으로 배우는” 것과 무슨 구별이 있는가? 수련 자체의 함의마저 모두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어떤 때 무의식적으로 책을 펼칠 때가 있는데 위에 있는 글이 어쩌면 오늘 당신이 만날 문제를 점화한 것일지도 모른다. 법은 입체적이고 원용된 것이므로 짧은 사부님의 한 마디 말씀일지라도 모두 생활중, 수련중에 부딪치는 일체 문제를 지도할 수 있다. 심지어 법 중의 한 개 글자도 당신을 깨닫게 할 수 있다. 한 신이 손을 한번 휘젓기만 해도 전 인류의 병이 모두 없어질 수 있고, 한 대각자의 일념에 하나의 우주가 생겨날 수 있다. 그럼 법중의 매 하나의 글자마다 어찌 하나의 불도신만 있을 수 있겠는가? 가령 우리가 법공부할 때의 심리 상태가 아주 순수하고 경건하고 법과 값을 따지지 않는다면, 동시에 우리의 心性(씬씽)도 그 경지에 도달 하였다면, 그럼 법중의 한 개의 글자로도 부동한 층차의 법리를 우리에게 충분하게 점화해주고 깨닫게 해줄 수 있다. 수련인으로서 아직도 책속에서 무엇을 찾고 있단 말인가? 아직도 문자상, 어법상에서 무엇을 찾아낼 생각을 하는가? 구함이 없어야 스스로 얻게 된다.
한 권의 책이 아무리 사람을 끌어도, 아무리 많은 도리가 당신 사상에 들어 맞는다 해도 그 속에 불도신이 없다면, 당신이 아무리 철저하게 기억한다 하더러도 당신이 고층차에로 수련하는 것을 지도할 수 없다. 똑같은 한 권의 경서라도 수련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것도 볼 수 없고 읽어도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배울수록 법의 무변(無邊)함과 위대함을 더욱 깊이 감수하게 된다.
개인의 자그마한 인식이므로 부당한 곳은 시정해주기 바란다.
문장발표 : 2008년 4월 24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문장위치 : http://minghui.ca/mh/articles/2008/4/24/177073.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