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대륙 대법제자
[명혜망 2008년 4월 11일]
정법시기 대법제자로서 구세력의 일체 안배를 부정하고 사악의 박해에 배합하지 않는 것은 물론 정확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하는 것도 우리에 대한 법의 요구에 부합돼야 할 것이다. 어떤 수련생은 진상자료나 신경문이 발각되었을 때 정념으로 박해를 부정하지 못할 뿐더러, “경찰이 자료는 누가 준 것이냐”고 캐물을 때면, 그 물음에 대답하거나 심지어 거짓말 하는 방법으로 경찰을 속이며 말한다.
“자전거 광주리 안에서 주웠다.”
“문어귀 우유 상자에서 주웠다”
“누가 놓고 갔는지 모르겠다” 등등, 이렇게 하면 넘길 수 있고 이렇게 하면 자료를 만든 수련생을 보호할 수 있다고 여긴다. 어떤 때는 마치 경찰을 기만할 수 있는 것 같았고, 이러면 수련생은 “경찰을 속이는 것”이 더욱 옳은 방법이라고 여겨 서로 알려 주고 서로 배우며, 서로 영향 준다.
우리는 거짓말을 해서는 안되지만 사악의 심문에 대해서 우리는 대답하지 말아야 한다고 여긴다. 이런 수련생들은 흔히 또 말한다.
“사악과 무슨 진실한 말을 할 게 있는가?”
이런 것으로 자신의 집착과 사람 마음을 덮어 감춘다. 그러나 진짜로 일에 부닥치면 이런 수련생들은 잘 하지 못하고 함부로 수련생을 판다. 얼마 전에 많은 자료점이 바로 이렇게 파괴당했고, 자료를 만들던 많은 동수들이 감옥에 갇혔지만 수련생을 팔아먹은 수련생은 이 문제를 말할 때 강한 자책과 죄의식을 느끼지 않았다. 더욱 우려되는 것은 그들은 어떻게 수련생을 보호할 것인가 하는 이 문제에 대해 중시가 없고, 사람이 되는 도덕과 수련인의 心性(씬씽) 각도로부터 문제를 보지 않으며, 심지어 교류조차 할 수 없다.
나에게도 ” 거짓말로 경찰을 속인” 것과 같은 행위가 있었기에, 나도 이런 수련생들의 수련생을 보호하고 싶지만 또 자신에 대해 신심이 없는 그런 고통스러운 복잡한 심리 상태를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동수여!
우리는 대법제자이다. 우리에게 부닥친 일체는 모두 수련의 문제가 아닌가? 거짓말이 진에 부합되는가? 수련생을 파는 것이 선인가? 우리가 자신의 두려운 마음과 집착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우리가 금강부동(金剛不動)의 그곳까지 수련해야 할 것이 아닌가? 우리가 만난 마난(魔難)은 사람이 사람에 대한 박해인가? 내가 생각하건대 이런 문제를 우리는 모두 진지하게 대해야 할 것이며, 따라서 이런 문제는 모두 법 속에 해답이 있다.
대법이 박해 받은 이 몇 해 동안, 우리 중국 대륙의 대법제자에게는 모두 법에 대해 견정불이(堅貞不移)하며, 대법을 배반하지 않겠다는 문제가 존재하며, 수련생을 팔지 않겠다는 문제가 존재한다. 나도 다른 수련생과 마찬가지로 아주 오랫동안 자료를 만드는 수련생을 보호할 “어려운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아주 긴 한 단계에 나는 법공부, 법 외우기를 통해 자신의 두려운 마음을 닦아 버렸고, 자신은 대법제자로서 생사를 내려놓아야 하며 금강부동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한번 또 한번씩 두려운 마음을 버리면서 갈수록 두려워 하지 않게 되었고 갈수록 견강(堅剛)해졌고 확고해져 갈수록 태연해질 수 있게 되었다. 수련을 잘한 제자와 비해 보면 나는 거리가 매우 멀고 부족하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여러분에게 이 문제에 대한 나의 견해를 말하는 것으로, 여러분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거짓말로 경찰을 속이는 문제에 대해 몇 가지 말해 보고자 한다.
첫째, 긍정할 수 있는 것은 이는 속인의 관념이지 신의 정념정행이 아니다.
둘째, 이렇게 하는 수련생은 흔히 마난 중에 사부님을 생각하지 못하고 법을 생각하지 못하며, 사부님을 생각하고 법을 생각한다 해도 이 일념을 지켜내지 못하거나, 사부님을 생각했다 해도 사부라는 이 단어에 대한 인식은 대법제자의 정념이 아니다. 예를 든다면 마난 중에, 어떤 때 우리는 사부님을 생각한다. 하지만 사부님을 한 속인으로 여기고 생각하는 것이란 ‘사부님은 미국에 계신데 언제면 돌아오실까?’
‘난 사부님을 만나지 못하겠구나, 사부님께서 나를 도와주실 수 있을까?’하는 것 뿐이지 사부님은 전반 대궁을 구하고 계시는 위대하시고, 하지 못할 일이 없는 분이라고 여기지 못하며, 사부님은 바로 내 곁에 계시며, 누구도 나를 움직일 수 없고, 마난 중에 있다 하더라도 모두 우리의 위대하신 사부님께서만 책임질 수 있고 일체를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다.
셋째, 우리가 부닥친 일체 마난은 수련중의 일로서 우리가 닦아야 할 내용임을 인식하지 못한다. 정법수련이고 사부님이 안배한 길로 가고 있다 할지라도 수련해야 할 것이 있는 것이다. 사부님께서 알려 주시지 않았는가? “수련이라, 그럼 곤란에 의해 겁을 먹지 말아야 한다. 어쨌든 간에 더 어려울지라도 사부가 당신에게 준 길을 꼭 걸어올 수 있다. 오로지 당신의 心性(씬씽)이 제고되어 올라온다면 당신은 곤란을 박차고 지나올 수 있다.”(《각지 설법3》).
다시 말해서 사부님께서 안배한 길로 간다 해도 마음을 닦아야 하고, 두려운 마음과 각종 집착을 모두 마땅히 버려야 한다.
넷째, 경찰에 거짓말하는 동수들은 정법수련은 구세력의 일체 안배를 부정해야 한다는 인식이 없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만 구세력의 박해를 부정할 수 있는지에 대해 분명하지 못하다. 사악이 대법제자를 박해하는 일체 안배는 모두 중생을 훼멸하기 위한 목적이며, 대법제자에 대한 박해를 안배한 것은 대법제자의 집착심을 닦아버리기 위한 목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수련생의 누락을 잡고 놓지 않으며, 와해(瓦解)식으로 고험하고 있다. 대법제자를 훼멸시키는 자체가 바로 중생을 훼멸하는 것이며, 동시에 대법제자를 박해한 악인이 직면한 것 역시 훼멸되는 끝장이다. 그러므로 정법시기 대법제자로서, 우리는 구세력의 안배를 타파하고 일체 박해를 부정하여야 한다. 그런데 사람의 방법으로 정법의 목적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두려운 마음과 각종 집착을 닦아 버리고 금강부동한 정념으로, 신의 정념정행으로 구세력을 부정하며 일체 박해를 타파해야 한다. 우리는 닦아낼 수 있으며 또한 반드시 닦아낼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부님께서 안배하신 정법의 길을 걷고 있기 때문에 사부님께서 안배한 길은 물론 닦아낼 수 있는 것이다.
다섯째, 상당한 일부분 수련생들에게 강대한 후천적 관념 “나는 무엇이든 다 내려 놓을 수 있지만 나는 고비를 넘기지 못할까 봐 두렵다”가 있는데 이 매듭은 아주 많은 사람을 망쳤다. 고비를 넘기지 못할까 봐 두렵다는 이 말의 진정한 함의는 혹형의 고비를 넘기기 어렵다는 것이다. 고비를 넘기지 못할까 봐 두렵다는 이 말에는 사악이 일체 사악한 수단을 제 마음대로 쓰도록 용인하는 뜻이 숨어 있다. 왜냐하면 중국 대륙에는 일종의 의식이 있는데 바로 경찰이 무슨 사람을 때리고 괴롭히든, 그건 방법 없는 일이므로 묵인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구세력이 당문화(黨文化)를 통하여 중국인들에게 강요한 것인데, 우리 대법제자들도 그 독해를 받아 우리로 하여금 이런 것은 우리 정법시기 대법제자들이 철저하게 부정해야 할 내용이란 것을 생각지 못하게 하였다. 무엇 때문에 몸에 혹형을 가하는 것을 그냥 둔다는 말인가? 사전에 마땅히 정념을 충족히 하여 이런 나쁜 일이 끼어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
기왕 법을 실증할 생각이 없으니 물론 일종 말하지 못할 감각이 있을 것이다. 이 고비를 넘지 못하겠다. 이는 얼마나 위험한가! 그럴 때면 마음 속에 법이 없고, 사부님이 없고 오직 속인만 있을 뿐이다.
만약 내가 엄격히 법으로 자신의 수련을 지도하고 진지하게 자신을 수련한다면, 어떤 때이든 모두 사부님을 생각할 것이고,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것을 생각할 것이고, 사부님께서 일체를 결정하신다는 것을 생각할 것이고, 정법시기 대법제자의 사명과 책임을 생각할 것인 즉, 무엇이 우리를 가로 막을 수 있겠는가? 대법제자는 무수한 어려움을 겪으면서 오늘까지 걸어 왔다. 우리 신의 정념정행으로 정법의 길을 잘 걸어 가자 !
문장발표 : 2008년 4월 11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문장위치 : http://minghui.ca/mh/articles/2008/4/11/17616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