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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악의 미친 듯한 표현에 직면해 어떻게 할 것인가?

글/ 대륙 대법제자

【명혜망 2008년 3월 29일】 악경들이 몇몇 동수들을 납치해 또 세뇌반을 꾸린다고 떠들어 대고 있다. 사악의 미친 듯한 표현에 직면해 우리는 정법시기 대법제자로서 현재 형세를 사람의 인식으로 대할 것인가 아니면 神의 사유로 인식하는가에 따라 그 결과는 정반대가 된다. 평소에 자신에게 심득이 좀 있었는데 동수들과 나누어 보고자 한다. 우리 함께 안으로 부족점을 찾아내고 대법 중에서 정진실수(精進實修) 하며, 정념으로 사악을 제거해 더 많은 중생을 구도하도록 하자.

1. 지금의 마난(魔難)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1) 이른바 올림픽을 개최한다고 하는데 틀림없이 파룬궁에 대해 어떻게 할 것이다. 이것은 사람의 인식이고 사람의 이치가 아닌가? 일체는 모두 사람의 마음을 겨냥하여 온 것이다. 왜냐하면 대법은 직지인심(直指人心)이기 때문에 사부님께서도 구세력의 안배를 이용해 장계취계(將計就計)하시어 우리더러 자신의 원인을 찾아보게 함으로써 법 중에서 정념이 생기게 하고 반박해(反迫害)로 교란을 제거해 대법제자가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면서 정법 중에서 수련하게 하신 것이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모든 교란과 박해는 다 사람이 대법제자에 대해 하는 것이 아니며, 사람이 사람에 대한 박해가 아니고, 배후에서 조종하는 사악한 요소가 하는 것임을. 때문에 사람에 대해 우리는 자비롭게 대하고 미워하지 말아야 하며, 여러 가지 사람 마음이 생겨나지 말아야 하지만, 사악에 대해서는 금강부동(金剛不動)의 정념으로 제거해 버려야 한다. 박해를 묵인하는 것은 곧 사악을 용인하는 것이다.

2) 어떠한 사람마음이 나타났든 두려워하지 말고, 자책하지 말며, 열등감을 갖거나 풀이 죽어 고통스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그건 바로 그것들을 제거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며, 반복적으로 나타나더라도 그것을 자신으로 여기지 말아야 한다. 금강부동(金剛不動)의 정념만이 비로소 그것을 제거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이 아니고 구세력이 억지로 뒤집어씌운 것이기 때문이다. 관건은 우리는 정법시기 대법제자이며, 사람마음에 이끌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각 법 속에서 정념이 생기게 하여 사람마음의 집착을 제거해 버려야 하며 자신으로 여기지 말아야 한다. 만약 시시각각 해낼 수 있다면 바로 정념이 강한 것이다. 사람마음이 나오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늘 사람마음에 이끌려 좋지 못한 일을 하는 것이 두려운 것으로 이렇게 하면 곧 실수(實修)하지 못하는 것이다.

평상시 일사일념이 대법에 부합하는가 여부를 중시해야 한다. 왜냐하면 정신과 물질은 일성(一性)이기 때문이다. 좋지 못한 사상의 출현은 곧바로 다른 공간에 좋지 못한 물질(쓰레기)이 있다는 것이며, 그것을 제거해 버리지 않으면 곧 쌓일 것이고 그것을 강화할 것이며, 많아지게 되면 어쩌면 큰 누락이 되어 통제할 수 없고 지나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정체 동수에 대한 교란도 아주 커질 것이다.

2. ‘세 가지 일’을 모두 잘해야만 비로소 진정하게 정진하는 것

1) 많은 위험한 고비, 거대한 난이 갑자기 닥쳐올 때, 우리 모두의 첫 의념은 곧 ‘사부님 저를 가지해 주십시오’이며 정념과 행위는 절대 사악에게 협력하지 않으며, 생사를 내려놓는 동시에 강대한 정념을 발하는 것인데, 사상 가운데 정법구결만 있을 뿐 다른 어떠한 사람 마음도 없으면 곧 넘어갈 수 있다. 이러한 상태는 곧 사부님을 확고히 믿는 데서, 마음을 조용히 하고 법을 외우는 데서 오는 것이다.

2) ‘세 가지 일’을 할 때 표현은 아주 정진하는 것 같지만 법공부가 형식에 흐르고 착실한 수련을 소홀히 하지는 않았는가? 내심에서 우러나오는 자비심으로 중생을 대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만하지 못할까 봐, 자신이 박해 받을까 두려워하며, 대법 일을 조금 할 때마다 기뻐하고 좋아하며, 안일을 바라고 자신을 늦추면서 잇따라 색욕, 정마, 허영심 등이 모두 나오게 된다. 근원을 깊이 파 보면 바로 ‘세 가지 일’을 모두 했다는 것으로 이렇게 하면 법정인간 때에 원만을 보장받게 될 것이며, 생명의 영원하고 아름다운 미래가 보장받게 된다고 느끼는데 이것이 바로 근본 집착이다! 사부님과 대법에 값을 흥정하는 것이다. 크게 한 바퀴를 돌았지만 여전히 ‘사(私)’이다. 자신의 사명이 조사정법과 중생구도라는 것을 잊었다. 어찌 대법을 이용해 자신의 본질적 이익이 손해 받지 않도록 보호하려 한단 말인가?

3) 법을 공부할 때 마음을 닦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며, 법을 외우고 법공부 할 때 교란이 있으면 반드시 제때에 무슨 집착이 있어 교란이 생기는지 안으로 찾아야 한다. 예를 들면, 법을 외우고 법을 공부 할 때 무슨 생각을 했는가? 어쩌면 무슨 집착이 존재할 것이니 그것을 똑똑히 인식하고 그것을 해체해 버려야만 법을 외우고, 법공부 하는 것이 비로소 실제적인 효과가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치로 발정념을 하고 진상을 알릴 때도 자신의 집착 및 배후에서 조종하는 일체를 제거하는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4) 법공부를 잘하고 자신을 잘 수련해야만 중생구도의 효과도 좋다. 똑같은 말도 수련이 잘 된 수련생이 한다면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법의 위력이 나타날 수 있으며, 그리하여 사람을 개변시킬 수 있다. 그렇지 않고 착실히 수련하지 않으면 한 말이 투과력이 없어 중생을 개변하기가 아주 어렵다.

그러므로 우리 현 단계에 더욱 마땅히 마음을 조용히 하고 법공부 하는 것을 보증해야만 비로소 사악을 해체하고 중생을 구도하는 근본 보장이 될 수 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거론할 바가 못 된다.

5) 평상시 두려운 마음, 색심(色心) 등 사람의 마음이 생겨나면 절대 이를 따라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악에게 교란 당하게 되고 나쁜 물질을 강화하게 된다. 그러므로 마땅히 정념으로 그것을 제거해 버리고, 그것을 승인하지 않는 가운데서 바르게 걸어가야 한다. 반대로 하면 곧 사람의 마음을 자신으로 여길 것이며, 이는 바로 구한 것이다. 그 외, 사부님께서는 우리를 신(新)우주의 신으로 구도하려 하시며 우리가 수련하는 것은 주원신(主元神)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자신의 일사일념이 모두 정신(正神)의 생각 되도록 해야 하고 대법의 표준에 부합되도록 해야 한다. 다시 말해 바로 자신을 시시각각 신으로 여겨야 한다! 이렇게 하짐 못한다면 영원히 신이 되지 못할 것이다. 이 가운데는 반드시 ‘진아(眞我)’, ‘가아(假我)’, ‘진타(眞他)’, ‘가타(假他)’를 분명히 가려야 한다. 법에서 법을 인식하고 신념(神念)으로 일체를 보아야 한다.

6) 마난이 올 때, 사람마음을 내려놓기 어려울 때면 반복적으로 자신에게 물어봐야 한다. ‘인간 세상에 온 것이 바로 이런 것을 위한 것인가? 향수를 위해서인가? 아니다 ! 바로 고생을 겪고 법을 얻어 조사정법하면서 중생을 구도하기 위해 온 것이다! 대법제자가 세간에 온 목적은 무엇인가? 자아를 해탈하고 자아의 영생을 위해서인가? 무사무아(無私無我)는 한 생명이 자아의 일체 욕구가 없는 데서 체현되며 법을 수호하고 중생을 자비롭게 대하는 데서 체현될 수 있다. 이러한 순선(純善)은 조건이 없으며, 구해서 온 것이 아니라 닦아낸 것이며, 거기까지 수련된 것이다. 툭 하면 나태해지는 것은 여전히 사심(私心)의 표현이다! 진정으로 중생을 위해 책임진다면 절대 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다. 사람 마음이 없는 자비라야만 비로소 사람을 구할 수 있으며, 비로소 법의 위엄을 수호할 수 있는 것이다.’

7) 우리는 자아(나는 수련하겠다, 나는 소업하겠다, 나는 집착을 버리겠다, 나는 제고하려한다, 나는 세 가지 일을 잘하려 한다는 등등)에서 탈태해 나와야 하며, 어떤 일에 부딪쳐도 늘 자아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속인과 수련 가운데서 득실을 따지지 말아야 한다(아름다운 일체를 잃고 훼멸될까 두려워하고 고생을 하고 괴로움에 시달릴까 두려워하는 이런 이기적인 근본 이익에서 표현된다). 가정과 사람 관계를 처리할 때 너무 한쪽으로 치우쳐 좋지 못한 영향을 조성하는데 그것은 문제를 고려하는 것이 전면적이 되지 못하고, ‘내’가 제일 이라 법속에 용해되어 대법을 원용하고 대법을 실증하며 자비로 중생을 구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8) 두려운 마음은 관념이며, 업력이 사악에게 조종당하는 표현이다. 두려운 마음은 흔히 감추어져 있으며 마비, 과시, 충동, 요행을 바라는 등 각종사람 마음에 덮어 감추어져 있다. 신은 사람의 일체 고통을 헤아릴 수 있지만 그러나 두려운 마음 등 사람 마음에 이끌리지는 않는다. 사부님께서는 우리더러 박해를 감당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이 신념(神念)으로 박해에 반대하고 사악을 해체하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당신이 신념을 발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이 곧 아주 관건적인 것이다. 생각해 보라, 사부님의 직접적인 관할이 있고, 사부님의 무수한 법신과 정신(正神)이 호법하고 있으며, 사부님의 법신은 없는 곳이 없기에 사부님께서 늘 곁에 계시며, 세간에서 대법의 장은 상당히 크다. 사악이 모두 합해도 이젠 적고도 또 적어져 그렇게 큰 힘이 없다. 대법제자 자신도 불법신통(佛法神通)이 있다(최후의 간격 요소로 인해 사악의 힘이 부족한 것을 보충해 주고 있음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정념이 충족하기만 하다면 누구도 당할 수 없을 것이며, 또한 넘지 못할 고비가 없다! 사람의 눈으로 본 환상에 미혹되지 말라. 일부 예감으로 길흉을 판단하는 것은 여전히 사람의 예측 따위의 것으로서 사람의 의심, 두려운 마음의 표현이다. 당신이 집착하면 곧 마음에 따라 변화될 것이고, 교란이 될 것이다. 모순에 봉착해 사람의 인식과 추리에 따른다면 사악에게 틈탈 기회를 주게 되어 그것이 자신의 어떤 마음을 겨냥하여 올 것인즉 사람마음을 내려놓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잘해야 한다.

9) 반박해(反迫害)는 속인의 형식 자체에 의지할 수 없다.(이를 테면 단식에 의지하고 질병에 의지하며 속인에게 의지하는 등등) 씬씽의 제고를 소홀히 하고 사람마음을 내려놓지 않고 씬씽을 제고하지 않는 것은 사람이 박해에 반대하는 것이니 어찌 사악이 틈을 타고 들어와 미친 듯이 박해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10) 대법제자 가운데 명예를 추구하고 대법을 이용해 자신을 실증하고 법을 실증하지 않는 것은 아주 위험한 것이다. 이런 상태는 사악에게 틈탈 기회를 주기 쉬우며 손해를 조성하게 될 것인 즉 잠시 멈추고 누락을 보충하는 것보다 손해가 클 것이다.

11) 진상을 알려 3퇴를 권할 때, 성공에 조급해 하지 말고 결과를 중하게 보지 말아야 한다. 일을 하려는 마음, 과시심, 명리심, 색욕심 등을 품지 말아야 하며 과정을 중시하는 중에서 수시로 마음을 닦아야 한다. 오직 신의 상태에서만 비로소 더욱 큰 능력이 나타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결과가 어떠할 것인가야말로 비로소 중생의 진실한 위치이다. 매번 무슨 일을 하고자 할 때 자신의 마음이 순정한지 찾아보고, 또 반드시 법을 실증하는데 필요한가 하지 않은가를 생각해 보고 필요하지 않다면 하지 말아야 한다. 무사무아(無私無我)의 정념만이 비로소 법을 실증할 수 있고 중생을 구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바로 자신을 실증하는 것이므로 파괴작용을 일으킬 것이다.

이상은 모두 개인 인식이므로 참고로 제공할 뿐이다.

문장발표 : 2008년 3월 29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문장위치 : http://minghui.org/mh/articles/2008/3/29/17534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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