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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공부할 때 당신은 법을 얻었는가?

글 / 당산 대법제자

【명혜망 2008년 1월 30일 】 최근 나는 일부 동수들과 접촉하였는데, 본인의 병업, 하나의 시끄러운 일 혹은 박해로 곤혹스러워 하고 또는 오랜 마난 중에서 벗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아주 고통스러워 하고 하루 빨리 해탈하려고 어떤 동수들은 자신이 인정하는 법공부를 잘한다는 수련생을 찾는다. 그 수련생은 자신을 도와 마난을 해결해줄 것을 바라고 또한 집착을 찾도록 도와달라고 한다. 그러나 자신이 깨달은 것이 아니길래 일단 그일에 자그마한 변화만 있으면 또 어떻게 할줄을 모른다. 또 밖으로 구하는 것을 반복하고 순환하면서 언제나 동일한 하나의 문제에서 배회하면서 자신에 대하여 신심을 잃고, 의지는 소침해지고 저락되고 있다.

그들이 존재하는 보편적인 문제는, 어떤 수련생은 장기적으로 법공부때 피곤해 하고 어떤 이는 법공부를 적게 하고 법공부때 마음을 조용히 하지 못하고 근본상 법에서 자신의 수련을 지도하는 법리를 깨닫지 못한다. 그러므로 곧 사람 마음으로 마난을 대하고 있다. 이런 동수들의 상태를 보면 정말 조급증이 난다. 우리는 하나의 정체이다. 동수의 일은 곧 우리의 일이다. 정체로 제고하고 정체로 승화하는 것은 사존님의 우리에 대한 요구이다. 오늘 명혜망에서 동수들과 내가 법공부할 때 법을 얻지 못한 점을 교류한다. 벽돌을 던져서 구슬을 끌어들이는(抛砖引玉) 격으로 일부 동수들에게 참고가 되길 바란다. 만약 법에 부합되지 못하는 점이 있으면 동수들이 자비로 지적해주기 바란다.

1. 안으로 찾자는 염원이 없다

법공부는 심성제고의 유일한 보증이다. 역시 법을 실증하고 일에 부딪쳤을 때 이지적이고 청성해지는 근본이다. 법공부할 때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면서 한 강의를 보았지만 무엇을 보았는지도 모르고 있다. 심지어 법공부할때 법으로 남과 비교하고, 심지어 불평하는 마음으로 자신에게 마난과 고통을 준 사람의 잘못을 찾으면서, 법으로 자기를 대조하여 자신의 부족점을 찾지는 않는다. 어떤 수련생은 자신이 정진하지 않고 문화가 낮고 오성이 좋지 못하고 법공부할 때 깨닫지 못한다고 한다. 사람의 도리로 말하면 겸손한 것이지만, 법리적으로 볼때면 안으로 찾고자 하는 염원이 없을 뿐만 아니라 안으로 찾기를 거절하여 한번 또 한번 제고할 기회를 잃어버린다. 왜냐하면 이런 관념으로 형성한 물질이 이미 우리와 법을 갈라놓았기 때문이다. 이런 심태로 법공부하면 법을 얻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수련을 지도할 법리를 보지 못한다. 《전법륜》은 모두 심성제고와 안으로 찾는 것을 알려주는데, 법공부할 때 안으로 찾을 염원이 없으면 사존님께서 어떻게 도움을 주실 수 있겠는가? 형식상에서는 법공부를 하지만 사람 마음이 작용하여 법을 얻지 못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신이 수련을 포기한다는 의미가 아닌가?

구세력은 우리가 안으로 찾는 것을 가장 두려워 한다. 우리가 집착을 찾아내고 집착을 내려놓을 때는 구세력이 전면적으로 해체되는 위기에 처한다. 그들의 생존에 의거하는 집착을 찾아 제거하므로 사악은 곧 자연적으로 멸망한다. 안으로 찾는 것은 곧 구세력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세력은 다급히 우리가 안으로 찾는 염원을 쇠약시켜 그들의 사악한 생명을 연명하려고 한다.

오직 참답게 자신의 수련을 대하고 착실하고도 착실하게 자신의 이 마음을 수련해야 한다. 마음이 불쾌할 때면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내가 이 방면에 집착이 있지 않는가? 나의 어떤 사람 마음을 폭로했는가? 내가 자신을 잘 찾아보고 법으로 이 일을 가늠해야 한다. 내가 어디에 잘못햇는가? 잘못했으면 나는 개변해야 한다. 왜냐하면 나는 정진하고 향상하려는 염원이 있기 때문에 사존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할 것이다. 나는 깨달을 뿐만 아니라 꼭 깨달을 것이다. 사존님께서 가지해주실 것을 희망합니다.” 이때 나의 이런 심태는 법에 부합되고 금빛과 같이 밝다. 나의 소원은 나를 바르게 하는 것이고 심성을 제고하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가 진정으로 잡념을 배척하고 법공부를 조용히 할때면 자신을 법에 용해시켰으므로 사부님께서는 곧 우리를 도와 단번에 우리의 집착과 관념을 찾게 한다. 진정한 나 자신과 집착을 분리하고 사상상에서 배척하고 제거하므로 근본 작용을 일어키지 못하게 한다. 사존님께서 우리를 도와 이런 집착하는 물질을 제거하면 자신이 미혹해 하는 일체는 자연히 연기와 같이 사라지고 구름이 흩어지듯이 없어질 것이다.

2. 법공부를 교란하는 것을 배척하지 못한다

일하는 마음의 작동 하에서 법공부할 때 오랫동안 입정하지 못하고 법공부를 한 가지 임무와 같이 완성한다. 그리고 법공부할때 아직도 자기가 해야할 일을 생각하고 있으며, 심지어 생각하기를 ‘빨리 이 설법을 다 보고 나서 다급히 일을 해야 한다.’ 자신의 법공부가 교란을 받았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더욱이 일부로 배척하거나 제거하지 못한다. 조용하지 못하는 문제 자체가 문제의 엄중성을 말한다. (이런 정황이 있는 수련생은 이미 사악의 박해로 인해 신체에는 병업 현상이 나타난다.) 반면에 자신이 왜 조용하지 못하는지 찾지 않는다. 자신의 어떤 마음이 조용하지 못했는지 찾아보지 못한다. 법공부를 교란하는 요소를 제거하여 표면의 함의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고 법이 진정으로 자기의 머리에 들어올때까지 청성해야 한다. 법의 기제가 곧 우리의 신체를 청리하고 우리의 사상을 정화하여 우리의 머리는 갈수록 청성해지는 것이고 그 다음은 우리가 조용하지 못하는 원인과 배후의 집착을 찾아내어 제거해버린다. 어떠한 마음도 모두 우리 자신이 아니다. 우리의 선천적인 본성은 곧 진, 선, 인으로 구성되었으며, 자신이 아닌 사람 마음을 배척하고 억제하고 제거할 때가 바로 우리가 마음을 닦고 업을 버리고 제고하는 과정이며 그때 우리의 신체의 변화도 아주 큰 것이다.

3. 표면의 집착을 찾는다

어떤 수련생은 모순에 부딪치든지 혹은 마난 중에서 자기를 찾는데, 그러나 찾아낸 것은 표면의 집착을 찾아내어 수련하므로 어떻게 하여도 제거하지 못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박해 중에 속인의 방법으로 해결하여 한동안 잠잠하다가 후에 새로운 박해가 또 출현한다. 마치 병자의 종양을 제거했지만 영체는 거기에 있는 것과 같아 얼마후 종양이 또 다른데서 나타나는 것과 같은 도리이다. 영체가 사람의 병을 일으키는 근본 원인이다. 그러므로 철처히 병을 뿌리채 뽑으려면 꼭 영체를 제거해야 하는 것이다. 사악을 철처히 제거하고 박해를 부정하려면 꼭 이번 박해를 일으킨 근본 집착을 찾아내어 부정하고 제거해야 사악은 곧 자멸할 것이다. 그러므로 표면의 집착은 문제를 조성한 근본 원인이 아니다. 우리의 과거는 위사위아(爲私爲我)의 기초이고 매하나의 배후의 요소는 모두 자사자아한 것이다. 구우주 중에서 탈태하여 신우주의 생명이 되려면 곧 근본상에서 위사위아하는 요소를 제거해야 하고 진, 선, 인 우주특성에 동화되어야 비로소 완전히 남을 위하는 생명으로 수련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모순과 마난중에서 정말로 일체를 버리고 자아를 내려놓고 자비로 세인을 대할 때면 사악이 사람 음을 이용하여 조성한 마난은 곧 형체를 감춘다.

4. 기점을 바로 잡고 법공부

어떤 수련생은 마난 중에서 법공부할 때 역시 안으로 찾고 집착을 버리기에 노력하지만 사악이 조성한 마난을 돌파하지 못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집착을 찾는 것은 마난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인데, 목적은 그래도 사(私)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이런 심태는 맞지 않는 것이다. 법공부를 잘하는 목적은 시시로 일마다 법으로 가늠하고 우리의 일사일념을 바로 잡는 것이다. 자신을 찾고 심성을 수련하는 것은 자신을 해탈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중생을 책임지고 세인을 책임지고 자신의 수련을 책임지기 위한 것이다. 법에 손실을 끼치지 않고 집착을 제거하고 후천 관념을 버리는 것은 일종의 책임지는 행위이다. 위사위아하는 어떠한 요소도 없는 것이다. 동시에 자신의 어떠한 사람의 마음으로 형성된 물질이 우주 중에 존재하는 것을 용허하지 않는다. 우주를 정화하고 우리와 대응한 무량한 중생을 구도하고 세인을 책임지고, 자신의 어떠한 집착도 사악이 틈을 타서 우리를 박해하는 핑계가 되게 해서는 안 되고, 세인을 조종하여 대법에 죄를 범하게 하여 구도당하는 기연을 잃어버리게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일종의 책임이다. 이런 책임은 나로 하여금 수련의 장엄함, 신성함과 일종의 사명감을 체험하게 하였다.

5. 진상을 말하는 것으로 수련을 대체할 수는 없다

우리는 사존님의 《호주 수련생에게 대한 설법》을 본 후 모두 사람을 구하는 긴박감을 인식했다. 어떤 곳에서는 사람을 구하는 것을 사람을 뺏는다고 말하면서 전부의 정력을 모두 진상을 말하는 이 일에 투입하면서, 동시에 하는 말이 “법공부는 가히 하지 않고 연공도 가히 하지 않고 발정념도 가히 하지 않아도 되지만 사람은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한다. 사존님께서 말씀하신 대법제자가 응당 해야 할 “세가지 일”에 있어서, 어떤 수련생은 편면적으로 이해하여 한 가지 일만 한다는 것이다. 어떤 수련생은 진상을 잘 말하고 삼퇴 인수가 많은 것을 수련을 잘한 표준으로 보고 있다. 이렇게 하면 사람 중에서 공덕을 쌓을 뿐이다. 우리가 법공부를 하지 않고 연공을 하지 않으면 마치 우리가 수련을 포기한 것과도 같다. 사부님을 따라 원만하는 만고의 기연을 포기한 것과도 같다. 우리와 대응한 천체 층층의 무량무제한 중생을 구도하는 것을 포기한 것과 같다. 역시 사존님께서 우리의 수련을 위하여 질서있게 안배하신 것을 흐트린 것과 같다. 어떤 일보에 와서는 응당히 무엇을 제고하고 어떤 사람 마음을 폭로하고 어떤 것을 연화하는데 수요하는 것인지 모두 질서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절대로 혼란시키면 안 된다. 오직 우리가 자신을 잘 수련하고 자신의 심성과 층차를 제고해야만 자신 우주 중의 일체를 원만할 수 있다. 여기에는 우주의 무량한 중생을 포괄한 것이다. 법공부를 하지 않든지 조용히 법공부를 하지 않으면 자신의 집착을 발견하기가 아주 어려운데, 더욱이 집착을 버린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우리는 생명이 산생한 곳으로부터 층층이 아래로 떨어져 비할 바 없는 더러운 세계에 떨어졌는데, 자기를 떨어지게 한 그런 사심과 집착을 버리지 못하면 어떻게 원만할 수 있겠는가? 만약 정말로 돌아갈 수 있다 하더라도 자신의 세계 역시 불완전할 것이고, 우주의 중생도 우리가 수련을 잘하지 못해 도태될 것이다. 그때에는 끝도 없는 고통스러운 후회를 해도, 이런 손실을 만회할 수가 없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모두 주동적으로 안으로 찾고 안으로 찾는 기제를 형성하였고, 정진하여 진짜로 수련하면 사부님께서는 곧 우리를 도우실 것이다. 과거의 수련 중의 부족과 모자라는 것은 기회가 있어 보충할 수 있다. 우리는 꼭 사존님의 홍대한 자비에 면목이 있어야 하며, 자신의 수련을 엄숙히 대해야 한다.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무한한 희망을 기탁한 중생을 위한 것이다.

동수들, 더욱이 농촌의 동수들과 자료점의 동수들이여! 우리는 공동으로 정진하고, 반드시 법공부의 질을 중시하고, 바쁘다는 핑게로 법공부를 홀시하지 말아야 한다. 대법은 우리가 원만할 수 있는 근본이다.

문장완성 : 2008년 1월 28일
문장발표 : 2008년 1월 30일
문장수정 : 2008년 1월 30일 02:37:00
원문위치 :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08/1/30/171304p.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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