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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정념에 대한 약간의 인식

글/대륙 대법제자

【명혜망 2008년 1월 12일】 발정념 이 문제는 동수들도 모두 교류했고 아주 많은 좋은 심득이 있다. 나 역시 발정념 문제에 대해 말해보고자 하니 부족한 곳이 있다면 동수들이 시정하거나 보충해주기 바란다.

발정념에서 늘 발견되는 문제는 바로 신심(信心) 부족이다. 이것은 또 두 방면으로 나뉘는데 하나는 사부님과 대법에 대한 신심이 부족한 것이고 또 하나는 자신에 대한 신심이 부족한 것이다. 많은 경우 나는 신사신법(信師信法)을 말할 때에도 안을 향해 찾아보면 여전히 좀 착실하지 못한 감이 있고 마치 사부님과 대법에 대해 일종 아득한 느낌이 드는 것을 발견한다.

법리상 마땅히 그 어떤 조건도 없이 사존(師尊)을 믿고 대법을 믿어야 함을 알면서도 내심에서 그런 약간의 ‘회의(懷疑)’가 늘 시도 때도 없이 불거져 나왔다. 동수들과 교류하면서 나는 이것 또한 비교적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문제임을 발견했다. 비록 수련과정 중에 이런 사람마음의 반영은 정상적인 것이라고 말하지만, 오직 끊임없이 자신을 바로잡고 끊임없이 좋지 못한 것들을 제거할 때라야 자신의 층차도 제고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반영은 발정념 시 교란이 되는 것이 아닌가?

수련인이 자신에 대한 신심이 부족함은 사존과 대법에 대한 믿음의 정도가 부족하기 때문에 초래된 것이다. 하나의 특정한 각도에서 보자면 사부님과 대법을 얼마나 믿으면 그만큼 해낼 수 있다. 완전히 사부님을 믿고 대법을 믿는 사람은 발정념을 할 때 자신이 발출해 낸 ‘정념’이 인념(人念)이라고 회의하지 않을 것이며 순수한 ‘신념(神念)’이다. 그리고 ‘신념(神念)’의 지휘 하에 신통(神通)은 틀림없이 작용을 발휘할 것이며 자신의 보다 크고 보다 많은 능력을 동원할 수 있다. 진정하게 법에서 자신을 믿는 것은 수련 층차의 진실한 체현이다.

악인에 대한 ‘원한’은 정념이 작용을 일으키지 못하는 또 하나의 큰 누락이다. 동수의 참혹한 박해에 직면해, 박해에 가담한 악인에 대해 조금의 원한도 없다는 것은 수련 중의 사람에게 있어 단번에 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이런 자그마한 사람마음은 쉽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비록 속인처럼 그렇게 심하진 않다 해도 있다면 곧 ‘누락’이다. 왜냐하면 수련하는 사람은 사람에 대한 원한이 없는 것으로 설사 십악불사(十惡不赦)한 악인이라 해도 그렇다. 원한이 있다면 이는 곧 일종 정(情)의 표현이며 이는 더러운 사람마음이다. 이 마음을 없애지 않으면 구(舊) 법리가 작용을 일으켜 이런 악인들을 ‘보호’하게 된다. 그렇다면 ‘증오’심리는 바로 반드시 제거해야 할 것이다.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대법제자가 수련하는 것은 자비(慈悲)이며, 그 어떤 사람의 것도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중생을 가슴에 품고 중생구도를 위해 구별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며 중생은 모두 같은 것이다. 비록 대법에 대해 죄를 범한 일부라 해도 여전히 조금이라도 구도할 여지가 있는 ‘나쁜 사람’이라면 대법은 역시 그에게 다시 되돌아올 기회를 준다. 이런 사람들에 대한 ‘보응’ 역시 마땅한 것인데 왜냐하면 그들이 범한 죄는 마땅히 상응하는 정도의 보응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일부 ‘보응’은 이미 사부님이나 정신(正神)의 안배 하에 아주 작아지긴 했지만 요만한 보응을 받는 것 역시 그들이 깨어나도록 다그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나쁜 사람’들에 대한 보응은 필수적이며 또 당연한 것이다.

십악불사하고 잘못을 뉘우치지 못하는 악인에 대해 대법제자의 정념은 곧 견정하게 제거해야 한다. 왜냐하면 대법제자의 자비는 우주 특성과 일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완전히 우주 특성을 위반한 그런 악인들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들은 스스로 자신을 도태시키고 있다. 대법제자는 단지 우주 법리에 따라 일을 행할 뿐인데 이는 또한 사부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위덕 수립의 기회이다. 그것을 깨끗이 제거하되 마치 먼지를 제거하듯이 그것을 우주에서 청리해버려야 한다. 그러므로 그것에 대해 말하자면 자비롭고 자비롭지 않은 문제가 아니며 바로 우주의 이치에 따라 그것을 처리해야 하는 것이다. 대법제자의 일체는 모두 자비의 체현이기 때문에 이런 난잡한 생명들을 처리할 때도 대법제자는 여전히 자비롭게 자신의 사명을 행사해야 한다.

동수들도 모두 동감하겠지만 확실히 환경이 느슨해졌고 사악의 요소도 적어졌다. 그러나 십악을 두루 갖춘 그런 악인들은 왜 아직도 악보를 받지 않는가? 한편으로는 사부님께서 『대법은 견고하여 파괴될 수 없다』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은데 이것이 가장 주요한 측면이다.
“현재 대법에 대하여 죄를 범한 모든 악인(惡人), 대법제자에 대한 소위 사악한 고험(考驗) 중에서 이용가치가 없는 자들은 이미 악보(惡報)를 받기 시작한바, 지금으로부터 시작하여 대량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가장 나쁜 사악의 무리들은 최후 한 걸음까지 이용당할 것인데, 이는 아직도 대법제자가 끊임없이 걸어 나오고 있고 사악한 낡은 세력은 그것을 이용하여 계속 대법제자를 고험(考驗)하는데 수요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무엇 때문에 그러한 가장 사악한 나쁜 인간들이 아직도 악한 짓을 하며 날뛰고 있는가 하는 원인 이다.”

다른 한편 대법제자의 자비가 부족하기 때문인데, 사악과 악인들이 존재하는 공간은 바로 대법제자의 누락이 이런 사악한 생명들에게 약간의 생존 공간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그럼 악인들은 왜 죽어라 현재의 박해형세를 유지하려 하는가? 왜냐하면 대법의 환경이 갈수록 느슨해져 걸어 나오는 수련생이 많아지면서 갈수록 그것들의 존재 가치가 상실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것들이 직면한 것은 반드시 도태이다. 그러므로 이런 각도에서 말한다면 대법제자가 3가지 일을 잘하는 것은 같은 것이다. 대법제자가 원만으로 나가는 것은 이미 정해진 형국이 되었고 사악이 철저히 도태되는 것 역시 대법제자 정체의 승화에 따라 돌이킬 수 없게 진행되고 있다. 아직 악보를 받지 않은 그런 악인들의 존재는 단지 시간문제에 불과하며 본질에서 보자면 바로 하나의 환상에 불과할 뿐이다.

문장발표 : 2008년 1월 12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원문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8/1/12/170106p.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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