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혜망 2007년 12월 23일】 사람의 신앙에 관해 공산국가 외에는 모두 법률의 보호를 받으며 모두 존중을 받는다. 왜냐하면 신앙의 자유는 사람의 기본적인 권리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공 사당 여기에서는 이 일을 아주 심각하게 만들어 사생결단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여기서는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이 일을 분명히 말해보고자 한다.
중국 역사상 전국시대 법가(法家)의 대표 인물인 한비자(韩非子)는 당시 농업 방면의 고용관계에 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무릇 품삯을 주고 머슴을 고용해 씨를 뿌리고 밭을 갈게 함에 좋은 음식을 먹이고 돈을 주는 것은 머슴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렇게 하면 머슴이 힘을 다해 밭을 깊이 갈고 김을 잘 매주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머슴이 힘을 다해 김을 매고 밭을 가는 것은 주인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렇게 하면 따뜻한 국과 맛있는 음식을 주고 넉넉한 품삯을 받을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한비자 외저설좌상 제30편』)
한비자는 여기에서 아주 명백하게 이는 순수한 매매관계이고 이런 관계는 서로 간에 이익이 되며 양쪽 모두 혜택을 보는 것으로 상호 의존하는 관계임을 알려 주었다. 우리가 이 예를 드는 것은 이런 문제를 설명하고자 함에서이다. 사회학적인 각도에서 말하거나, 생산관계와 사회온정의 두 방면으로부터 출발해서 보더라도 이런 관계를 수호하고 유지하는 것이 좋은가 아니면 이런 관계를 파괴하는 것이 좋은가? 이런 관계를 수호하면 그것은 곧 도의상, 법률상, 제도상 쌍방이 이익의 합리성을 보증하게 되며, 그로부터 노동자와 자본가 쌍방 관계가 안정되며, 생산이 발전하고 사회가 진보한다. 중국의 ‘봉건사회’이든 서방의 ‘자본주의 사회’이든 고용관계를 처리하는 면에서는 모두 이렇게 해왔던 것이다. 역사는 이것이 정확한 방법임을 증명했고 나중에 성공했다.
그러나 칼 마르크스는 이와 반대이다. 그는 이런 원시 상태의 고용 관계는 착취 관계이며 비합리적이라고 여겼다. 마땅히 지주와 자본가를 몽땅 소멸시켜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주의할 것은 지주나 자본가 한 사람을 죽여 버리는 것이 아니라 전체 지주 계급과 자본가 계급을 소멸시키는 것인데 바로 대대적인 집단학살을 자행한다는 것이다. 이런 일을 하자면 공산당의 지도가 있어야 하는데 노동자와 농민을 조직해 무장폭동으로 완수한다. 이는 사실 바로 살인하고 재물을 약탈하며 목숨을 해치는 행위이다. 주의 할 것은 중공이 정권을 취득한 후 여전히 집단학살 식 작법을 정권을 공고히 하는 주요 수단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약 8천만 명의 중국인들이 이로 인해 목숨을 빼앗겼다.
세인들이 모두 알다시피, 무릇 정교(正敎)에 속하는 것은 모든 종교는 살생하지 말라고 한다. 살인은 더욱 안 된다. 부처를 믿는 사람들은 중생을 자비로 대하고, 천주를 믿는 사람은 신이 세인을 사랑한다고 말하며, 도가에서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을 말하며,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고 하면서 모두 살생을 반대한다. 이런 도덕관념과 신앙은 몇 천 년의 유전을 거치면서 이미 사람들의 마음속 깊이 스며들었다. 하지만 도리어 마르크스 레닌 집단학살주의자들에게는 넘어서지 못할 장애로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유물론’을 만들어 내어 ‘유심론’을 반대했고, 사람이 신앙을 가지는 것을 반대했다. 아울러 몇 차례의 과학관과 교회관념의 모순을 틀어쥐고 고의적으로 양자를 대립시키며 ‘유신론’을 공격하면서 신을 믿는 것은 우매한 미신이며 종교는 정신적인 아편이라고 말한다.
공산당은 신앙문제를 사상문제로 간주하며 어느 것은 진보적이고 어느 것은 낙후한 것이라고 말한다. 또 사상문제를 계급문제로 만들어 무엇은 무산계급이고 무엇은 봉건 자산계급이라고 한다. 또 이런 것들을 그 무슨 우주관, 세계관으로 만들어 무엇은 어느 계급의 우주관이고, 무엇은 어느 계급의 세계관이라고 한다. 나중에는 정치문제로 승화시켜 무엇은 반동이고, 무엇은 혁명이라고 한다. 바로 이런 한 가지 수작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간단한 일을 복잡하게 만들고 상대적인 모순을 절대화 하여 나중에는 모두 정치화 한다. 아울러 폭력과 서로 결합할 것을 선전한다. 몇십 년을 이렇게 하자 바로 파블로프가 조건반사 실험을 하기 위해 개를 훈련시킨 것처럼 중국 사람들을 훈련시켜 아주 많은 중국 사람들의 머릿속에 층층으로 굳어진 이른바 ‘무신론’의 껍질이 형성되게 했다.
지금 마르크스주의는 모두 역사의 쓰레기 통으로 들어갔고, 중공 사당마저 모두 이 낡아 빠진 깃발을 치켜들지 않는다. 다시 말해 이론 계통이 전부 붕괴되었다. 무슨 유물이요 유심이요 하는 것들도 진작 사람들에게 망각되었다. 설마 아직도 ‘무신론’이 진리로 보인단 말인가? 그럴 수는 없다! 그것은 다만 그 어떤 정치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 만들어낸 구실에 불과하며, 국민을 통치하는데 편리하게 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알다시피 뉴턴이나 맥스웰은 모두 아주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지만 그들이 근대 과학 이론의 창시자가 되는데 방해가 되진 않았다. 가령 어떤 사람이 이런 위대한 과학자 앞에서 여전히 무슨 ‘무신론’이 옳다거나 무슨 유심이요, 신을 믿는 것이 봉건미신으로 어떠어떠하다고 담론한다면 당신은 오직 어리석은 백치만이 이런 말을 할 수 있다고 여기지 않겠는가?
문장발표 : 2007년 12월 23일
문장분류 : 시사평론
원문위치 : http://minghui.ca/mh/articles/2007/12/23/16881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