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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 속에서 제고하지 말아야 함”을 다시 말함

글/대륙대법제자

【명혜망 2007년 9월 2일】 명혜망 2007년 8월 16일 문장 《사부님의 안배 속에서 수련해야지 박해 속에서 제고하지 말아야 한다(在师父的安排中修炼,不要在迫害中提高)》에서 언급한 관점에 나 역시 매우 공감한다. 나는 내가 겪은 것을 통해 내가 어떻게 “박해 속에서 제고하지 말아야 하는가”에 대해 몸소 경험하고 실제로 행하려 노력 했는지 말해보고자 한다.

박해가 나탄 후, 나의 길은 줄곧 그런대로 안정적으로 걸어 왔다. 나 자신이 평소에 안전에 매우 주의했고 사악의 박해를 강하게 저지했다. 법을 실증하는 일을 줄곧 해왔고 불법으로 감금당한 적도 없었다. 작년 어느 날에 이르러서야 내가 진상을 밝힐 때 악인의 제보를 당했다. 사악은 십여 일 동안 작전을 세워 내가 두 번째로 사람에게 진상을 알려줄 때 십여 명의 경찰과 몇 대의 차량을 동원해 나를 불법으로 체포했다. 그들은 우리 집을 수색하여 일부 대법 서적과 사부님의 법상(法像)을 압수해 갔다.

그들이 한 첫 번째 질문은 “당신은 法輪功(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인가?”였다. 나는 그들이 말하는 내용에서 그들이 이미 진상을 충분히 알고 있음에도 오히려 명백하게 박해를 하고 있는 것을 보아 낼 수 있었다. 그들의 말로 표현하자면 “법을 집행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이 질문을 빌어 그들에게 진상을 말하지 않았다. 게다가 사악이 만들어낸 박해환경도 내가 진상을 알릴 장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다른 장소에서 그들이 이렇게 질문했고 그 뜻이 진상을 알려고 하는 것이었다면 나는 흔쾌히 대답했을 것이다.

유감스러운 것은 사악이 지정하여 배치한 박해 장소에는 카메라와 녹화하는 플래시로 가득 차 있었고 그들이 내 맞은편에 앉아 대립적인 신분으로 이런 질문을 하는 목적은 나를 박해하기 위한 ‘증거’를 얻으려는 것이었기 때문에 나는 자연히 단호하게 대답하지 않았다.

그들은 각종방식을 취해 내가 대답하도록 자극했다. 심지어 나에게 “당신이 어디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 같은가. 다른 사람들은 정정당당하게 ‘나는 바로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이다. 당신들이 알아서 하시오.’라고 인정하는데 당신은 오히려 이런 기본적인 질문마저도 감히 대답하지 못하다니. 당신은 처리될까봐 무서워서 감히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지.”라고 했다. 610 주임은 심지어 나에게 “내가 보니 당신은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 같지 않아.”라고 말했다. 보라, 그들은 내가 파룬궁을 수련하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도 나를 박해하려는 ‘증거’를 얻기 위해 고의로 물어볼 뿐만 아니라 또 안간힘을 다해 내가 인정하도록 자극했다. 구세력(舊勢力)은 내게 사악한 ‘수련’환경을 만들어 내려고 얼마나 온갖 심혈을 기울이는가! 나마저도 그것들이 힘들어함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수단은 내게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나는 정법시기 대법제자이므로 이 호칭에 대해 줄곧 자랑스럽게 여겨왔고 그것은 내 생명의 전부다. 박해가 있든 없든 나는 다 동요하지 않을 것이므로 무슨 감히 인정하고 인정하지 못하는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대법제자로서 10년 이래 얼마나 간고한 수련여정을 걸어 왔는지, 법을 실증하는 과정 중에서 무엇을 했는지, 사부님과 대법이 나의 마음속에서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하늘과 땅이 증명해주며 우주 중의 중생들이 증명해주므로 누가 부정하려고 해서 부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 마음은 내 자신 보다도 사부님께서 더 똑똑히 알고 계시는데 중생을 구도하는 관건적인 시각에 이런 기초적인 문제로 나를 ‘고험’하시진 않을 것이다.

이것은 사부님께서 안배하신 것이 아니므로 나는 협력할 수 없다. 그것들 자신마저도 ‘기본적인 문제’라고 여기는 질문에 협조해 대답해 준다면 사악의 함정에 빠져 들어가는 첫 번째 발걸음이므로 스스로 달갑게 사악이 만들어낸 박해 환경 속에 들어가 ‘제고’하겠다는 것과 같으며 사악의 ‘고험’을 달갑게 받아들이겠다는 것과 같다. 게다가 사악이 안배한 ‘고험’ 중에서 그것들의 ‘표준’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그것들은 쉽게 그만 두지 않을 것이다.

나는 오히려 그들이 말하는 다른 대법제자들에 대해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어떻게 함정임을 분명히 알면서도 그 속으로 뛰어 들어 가는가, 어찌 ‘정정당당’하게 자신을 그것들에게 맡겨둘 수 있는가, 이렇게 함부로 쉽게 그것들에게 알아서 하라고 할 수 있는가? 610주임이 보기에 내가 대법제가 같거나 같지 않거나, 내 사상을 이해하거나 이해하지 못하거나 다 중요하지 않다. 사악이 만약 나를 다 이해할 수 있다면 나는 대법제자가 아니다. 오직 사부님께서 나를 대법제자라고 승인해주시면 되는 것이지 내가 구태여 구세력과 사악에게 실증해 보여줄 필요는 없으며 구세력과 사악의 인정을 받을 필요도 없다.

그래서 610 주임이 “내가 보니 당신은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 같지 않아.”라고 했을 때 나는 그들에게 “그렇다면 당신들이 왜 나를 체포하는가? 나를 풀어주지 않고 뭘 하는가?”라고 반문했다. 이 반문은 정말로 그들을 크게 놀라게 했다. 그들은 더 이상 나에게 대답할 것을 요구하지 않았고 어쩔 수 없이 스스로 “말을 하지 않음”이라고 적었다.

나는 또 확고하게 뿌리로부터 구세력과 사악이 만든 ‘수련’환경을 부정하고 그것들이 배치한 환경에서 ‘수련’하고 ‘제고’하는 것을 거절해야만 참여한 이런 사람들이 나를 박해함으로써 지은 죄를 되도록 적게 할 수 있고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그들을 위해 생각하는 것이라고 여긴다. 비록 그들은 여전히 끊임없이 나에게 많은 경찰력을 투입했고 최후에는 다 서명해야 하며 자신들을 헛수고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등등을 강조했지만 말이다. 그들이 이렇게 강조하는 것은 나에게 이 사건의 후과가 얼마나 엄중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하여 나더러 그들을 ‘양해’해 잘 협력해 자신들의 질문에 대답해 달라는 것에 불과한데 이 수단 역시 내게는 통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이 생각하는 것은 어떻게 그들의 논리로 내 입에서 나를 박해할 수 있는 ‘증거’를 유도해내어 자신들이 박해하는 것이 이치에 맞고 당연한 것으로 만들려는 것이 때문이다. 하지만 내 생각은 되도록 빨리 그들의 범죄 행위를 제지하여 구세력이 나를 ‘고험’한다는 구실로 그들을 훼멸 시키는 것을 철저히 부정하고 되도록 그들을 구도하려는 것인데 이것이야 말로 진정으로 그들을 ‘양해’하는 것이다.

‘말하지 않음’이라고 기록하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진일보로 죄를 범할 구실을 잃게 할 수 있다. 내가 박해를 받지 않을수록 그들이 지은 죄도 더 작아진다. ‘내가 원만해야 하고’, ‘내가 무섭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생사를 고려하지 않아서는 안 되며, 구세력과 사악에게 이 대법제자가 얼마나 ‘합격’했는지 실증하기 위해 그들이 죄를 지어 자신을 훼멸하는 대가를 치르게 해선 안 된다. 그것은 중생을 구도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을 아래로 밀어내는 것이다. 나는 내 자신이 ‘원만’하려고 중생들을 훼멸시키는 위험을 무릅쓰고 구세력의 ‘고험’을 받아들일 수 없다. 오직 구세력만이 중생을 훼멸시킬지언정 나를 ‘고험’하려 하는데 나는 구세력처럼 그렇게 중생을 대할 수 없다.

게다가 설령 구세력이 ‘고험’에 합격되었다고 인정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대법에서 원만할 수 없다. 나는 구세력으로 하여금 대법 수련자는 대법에서 수련해낸 자비로 어떻게 중생을 위해 최대한도로 자아의 일체를 포기하며 원만에 대한 집착을 포함해서 포기하는 것을 보게 한다. 그들이 기록에 쓴 ‘말하지 않음’이란 바로 내가 그들 사람의 일면에 대한 자비이며 바로 내가 자아원만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은 후 그들 사람의 일면에게 표현한 최대의 ‘양해’이다.

이 과정 중에서 나는 단식을 하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으며 도망가려고 생각해 본 적도 없다. 왜냐하면 단식이든 도망가든 전제는 우선 자신을 죄수로 간주하고 그들이 자신을 체포하는 행위를 우선 인정했기 때문에 단식과 도망가는 대책을 취해 박해를 부정하는 것으로 실제로는 여전히 피동적으로 박해를 인정한 것이며 박해를 허용하는 부분이 있다고 나는 평소에 줄곧 이렇게 느꼈다. 나는 ‘병업(病業)’방식을 통해 돌파해 나갈 생각도 없었다. 그것은 마찬가지로 구세력의 또 다른 형식의 박해를 인정한 것이므로 나는 그것도 정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죄수도 아니고 병도 없으며 단지 그들이 나를 청해와 여기에서 몇 시간 있을 뿐이다.

화장실에 가는 도중에 경비가 삼엄한 대문을 바라보면서 ‘나는 이 문으로 털끝하나 손상되지 않고 정정당당하게 나갈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사악의 안배를 부정하는 것은 단식과 도망치는 것 혹은 ‘병업’이 나타나는 등의 표면 형식에만 국한해선 안 된다. 게다가 단식과 도망치는 것 그리고 ‘병업’은 모두 박해 의 연장이므로 설령 정념으로 마의 소굴에서 돌파해 나왔다 할지라도 계속 후속 집을 엮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땅히 걸어야 할 박해를 반대하는 길의 모델이 돼서는 안 되며, 미래에 이렇게 피동적으로 자신을 손상시키는 것을 대가로 한 반박해(反迫害) 사례를 남겨서는 안 되고, 구세력이 배치한 성도(聖徒)가 박해 받는 역사를 대법에서 끝없이 재연하게 해서는 안 된다.

과정 중에서 나는 그 어떤 과격한 언행이 없었으며 또한 그 어떤 극단적인 표현도 없었고 또한 연공이나 기타 그들이 반감하는 동작을 통해 그들의 신경을 자극할 생각도 없었다. 자신이 박해를 제지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꼭 의도적으로 지나치게 ‘좌(左)’적인 표현을 할 필요도 없다. ‘좌(左)’는 당문화(黨文化)의 것이며 지나친 ‘좌’적인 언행은 박해에 대한 자신의 부정을 증명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반대로 박해에 대한 반대방향의 인정이다. 과격한 언행은 중생을 구도하는데 좋은 점이 조금도 없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 사람의 일면에 대해 줄곧 예의로 대해 주었는데 그들도 마찬가지로 예의 있고 점잖게 보답해 주었고 결코 내가 그들과 대항하고 있다고 느끼지 않았다. 사실상 나는 확실히 그들 사람 일면에 대항하는 뜻이 조금도 없었다. 설령 구세력의 안배일지라도 내가 대항할 가치가 없다. 나는 단지 그것들을 어떻게 부정해야 하는 것을 알고 그것들을 깨끗이 제거하고 동시에 그들 사람 배후의 일체 사악한 생명과 요소들을 깨끗이 제거하면 그만이다.

결국 24시간 ‘심문’ 기간에 그들은 토론을 거쳐 조건 없이 나를 풀어 주었고 나에게 어떤 것을 서명하라고 요구하지도 않았다. 한 경찰은 나에게 ‘보아하니 당신은 아무 걱정 없으니 집에 돌아가서 수련을 잘하세요.’라고 말했다. 610 주임도 ‘몇 년 전이라면 우리도 이렇게 처리하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 당시 마음속으로 ‘그것은 꼭 그런 것이 아니다! 만약 대법제자가 몇 년 전부터 생사를 내려놓을 수 있고 자신의 원만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을 수 있으며 수련의 기점을 사(私)적인 것에서 전부 타인을 위하는 쪽으로 전이할 수 있었다면 박해는 아마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며 당신들이 이런 문제를 처리할 기회마저 없었을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이 일이 지나간 지 이미 일 년이 넘었다. 매번 ‘민감한 시기’에 우리 지역에서도 일부 사람들을 체포해 갔는데 그들은 여태껏 어떠한 방식으로든 나를 괴롭힌 적이 없다.

나는 여러 번 자신이 정념으로 관을 돌파하면서 겪은 것을 문장으로 쓰려고 했지만 여러 차례 스스로 부정했다. 정법시기 대법제자로서 사악에게 체포되고 사악에게 박해 당한 자체가 바로 치욕인데, 왜냐 하면 그것은 사부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설령 정념으로 돌파해 나왔다 하더라도 필경 한 차례 부면(負面)적인 교훈을 겪었기 때문이다. 속인 중의 어떠한 일이든 모두 이로움과 폐단이 동시에 존재한다. 박해 역시 마찬가지로서 이를 이용해 진상을 알리고 사람을 구할 수는 있지만 본래 일부 구원할 수 있고 구도하기가 비교적 쉬웠던 사람들을 놀라게 하여 도망가게 할 수 있다.

나는 안정적으로 자신이 법을 실증하는 길을 바르게 걸어 근본적으로 박해 받지 않는 것이야말로 사부님께서 내게 안배하신 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잘 걷지 못했으며 사부님의 기대에 어긋났다. 매번 생각할 때마다 나는 깊은 가책을 느낀다. 왜냐하면 박해가 나타남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업을 지게 했고 죄를 지게 했는데 자신이 박해 속에서 아무리 잘하고 정념이 아무리 강했다 할지라도 손실은 모두 적지 않은 것으로 무슨 기뻐할 것이 없다. 일부 손실들은 심지어 전혀 보완할 방법이 없으며 잃은 것은 더 이상 찾아올 수 없다. 잘 걷지 못한 길을 긍정해서는 안 되며 또한 미래에 남겨 줄 수도 없는데 이것이 바로 내가 지지부진하게 펜을 들지 못했던 진정한 원인이다.

우리는 대법을 실증하러 온 것이지 사악의 박해를 실증하러 온 것이 아니다. 대법도 우리에게 사악의 박해 속에서 어떻게 잘 하라고 하는 요구도 없다. 우리가 미래에 남겨 놓는 것은 마땅히 가장 바른 정법수련의 길이다. 사악의 박해 속에서 정념으로 돌파해 나오고 또 자신을 제고하는 것이 마치 사악이 박해하는 배치에 이치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다. 정념으로 돌파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법의 요구에 도달한 동시에 사부님께서 보살펴주시고 지켜주신 필연적인 결과이지 박해때문에 비로소 그 층차로 제고한 것이 아니고 박해가 있건 없건 그 당시는 모두 그 층차이며 우리의 층차는 결코 박해를 통해 검증받을 필요가 없으며 박해는 우리의 수련제고에 반드시 겪어야 할 절차가 아니다. 사부님의 법에 따라 수련하고 법속에서 제고하여 근본적으로 사악이 만든 ‘수련’환경을 부정하고 중생을 위해 되도록 자신을 사악에게 박해 받지 않게 함으로써 안정적으로 최후까지 걸어가는 것이야말로 비로소 우리가 걸어야 할 정법수련의 길이다.

본래는 이 인식을 쓰려 하지 않았는데 수련생이 박해를 부정하는 문장에 감명이 있어 자신이 박해를 부정하는 생각을 내가 겪었던 것과 결합하여 썼다. 어쩌면 더 많은 동수들이 이 속에서 교훈을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이 글을 쓴다.

문장발표:2007년 9월 2일
문장분류:수련마당
원문위치: http://minghui.org/mh/articles/2007/9/2/16183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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