简体 | 正體 | 대법서적

사람에 집착하면 사람의 상태에 제약되어

글 / 장춘 대법제자

【명혜망 2007년 9월5일】 며칠 전 한 수련생이 말하기를 어떤 사람이 법을 얻은 지 10년이 되고 정념이 강하여 뛰쳐나올 수 있는 수련생들을 찾는데 무슨 큰 활동을 하려고 한다고 했다. 들은 바에 의하면 이 사람은 이미 횡설수설하고 법에 부합하지 않는 많은 언행이 있었는데 또 몇몇 정진하지 못하는 수련생들을 이끌고 있다고 했다. 이에 대해 나는 자신의 경력에서 일부 문제를 사고했는데 법에 입각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동수들께서 자비롭게 지적해 주기 바란다.

수련의 길에서 나는 곤두박질하는 식으로 8년간 걸어왔고 계속 남편의 괴롭힘을 받았지만, 나는 오히려 눈물을 머금고 돌파하지 못하고 있었다. 비록 세 가지 일을 견지하고 있었지만 아주 피곤했다. 작년 가을의 어느 날 남편은 또 구실을 찾아 나를 한바탕 욕했고 아주 더럽게 욕했다. 그 당시 울고 싶어도 눈물이 없었는데 어떤 것이 마음 속을 막고 있는 것 같았다. 며칠 동안 잠을 자면서도 긴 한숨을 쉬었으며 마음 속으로는 무엇 때문인가를 계속 물었다. 내가 대법수련에 들어선 후 남편의 성질은 점점 더 심해졌는데 어떠한 책임도 다하려 하지 않았고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모두 “체면”상으로 했다. 본래 낮은 봉급인데도 집에 가져오면서 한바탕 옥신각신했다. 법을 얻은 초기에 남편은 나에게 《전법륜》을 가져다 주었고 나는 마음 속으로 항상 이에 대해 감격해 했다. 남편이 하기 싫어하는 일은 내가 했는데 집안 일 바깥 일, 백 가지가 전부 다 나의 몸을 내리 눌렀고 심지어 화장실을 짓는 벽돌담도 내가 쌓아야 했다. 시간이 길어지자 일종의 “어찌할 수 없는 자연스러움”이 되었고 일종의 표면적인 안정만 유지하고 있었다. 마음속의 그 억울함은 정말로 매우 고달팠다. 8년동안 계속 뿌리를 캐고 가끔은 낡은 세력에 의해 틈을 타서 박해당하는 것임을 알았지만 발정념을 해도 변화가 없었다. (사실 그 당시 사적인 각도에서 자신의 박해당하는 현황을 개변하려고 발정념을 한 것이고 뼈속의 억울함과 원한을 안고 있어 이용당하는 사람에 대한 자비심은 전혀 없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고달프면 법을 외웠다. “악한 자(惡者)는 질투심 탓으로 사(私)적인 것을 위하고, 화풀이를 위하며, 스스로 공평치 않다고 하노라. 착한 자(善者)는 늘 자비심이 있거니, 원망도 없고 증오도 없이 고생을 낙으로 삼노라. 깨달은 자(覺者)는 집착심이 없으며 세인들이 환각에 미혹됨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노라”(《정진요지》〈경지〉) 한번 또 한번 외우면서 갑자기 마음이 밝아졌다. 이 “억울함”은 스스로 불공평하다고 여겨서가 아닌가? “질투심으로 인한 것”이 아닌가? 억울할수록 사악의 요소는 그를 수시로 이용하여 나를 괴롭혀 더욱 억울하게 만들고 “질투심”을 더욱 강화시키는 것이다. 이로써 남편은 늘 사악의 요소에 이용되어 대법제자를 박해하는 업을 짓고 위험한 변두리에 처하게 된다. 진정으로 억울한 사람은 바로 그이다! 모두 법을 위해 왔고 똑같이 만고의 기연인 즉 그가 구도될 기연이 나의 요소로 인해 훼멸되면 안 된다.

그리하여 나느 급히 다리를 틀고 입장하고 사부님의 가지를 청했다. “박해에 참여한 일체 사악을 철저히 제거하고 질투심을 제거한다.” 그 시각 정말로 신체가 가볍고 투명해졌으며 사존을 향한 양심의 가책, 가족에 대한 양심의 가책, 법 속에서의 희열은 나로 하여금 뜨거운 눈물이 용솟음 치게 했다…… 그후부터 남편은 완전히 바뀌었고 우리 일가족은 상화롭고 안정되었는데 이는 사람이 구해서 온 것이 아니었다.

마음을 조용히 하고 자신에게 물었다. “1999년 부터 지금까지 수련하면서 자신에게 늘 “정진”하라고 요구했는데 밥을 못 먹더라도 대법의 일과 동수의 일을 앞 자리에 놓으려 했고 생활 환경 속에서 자신에게 잘하려고 노력하고 중생이 대법에 대해 정확하게 인식하는데 영향을 주지 않으려고 했는데 왜 늘 힘들다고 느꼈을까? 왜 억울했는가? 왜 집착심을 제거하지 못하고 자신을 몰랐는가? 왜 나는 소탈하지 못했는가?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는가?” 원래 사람에 대한 근본적인 집착을 제거하지 못하여 비로소 사람의 관념에 의해 좌우지된 것이다. “사람”은 영원히 사람의 일체 요소에 의해 이끌리고 정에 의해 좌우지 되는데 왜냐하면 이 일체는 사람을 위해 배치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에 집착했기 때문에 비로소 “사람”에 대해 구하는 마음이 있었고 비로소 사람의 관념으로 사물을 가늠했는데 왜냐하면 마음이 사람 속에 있고 사람 밖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매 사람마다 모두 각종 역할의 “사람”에 대한 인식이 있고 이것이 바로 사람의 관념으로 사람을 보는 것이다. 얻었다면 마음이 아주 착실하고 얻지 못하면 억울하고 원망스러워 아주 낙심한다. 사람은 바로 이런 욕망의 느낌 상태에서 생활하고 있다. 잘 행했다고 해도 신이 사람에게 준 도덕 규범에 부합된 것을 행한 것일뿐 잘 행하지 못하거나 혹은 해내지 못하면 모두 사람의 이 층의 이치를 파괴하는 것이다. 명백히 말하면 이는 “사람”의 표준이고 대법제자는 이 일체를 초월해야 한다. 대법제자가 이 일체를 잘하면 우주대법의 사람의 이 한 층의 법리를 수호하는 것이지만 반드시 마음이 법에 있어야 한다. 행함에 있어 마음이 법에 입각해야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고, “피곤하다고 느끼는 것”은 “사람”을 내려놓지 못함으로써 사람의 요소에 의해 제약된 것이다.

만약 사람 속의 일체에 대해 구하는 것이 없다면 “명리정”에 대한 집착이 있겠는가? 사존께서는 우리에게 “명리심”은 제거하기가 가장 어렵다고 하셨는데 그럼 우리는 마땅히 시시각각 주의해야 한다. 한번은 명혜에 투고할 때 어떠한 필명을 쓰는 것이 좋겠는가 하고 생각했고 이틀동안 생각해도 생각나지 않았다. 저녁에 일가족과 함께 “사은송”이란 영상물을 보니 관귀민은 “진선인”이란 노래를 하면서 가수 이름에 “대법제자”라고 썼다. 아이구, 사람 속에서도 명성이 자자한 관귀민 선생은 오히려 “관귀민”이란 세글자를 내려놓고 “대법제자”를 사용했는데 그것이야말로 법을 인식함이다. 그러나 나는, 전부터 무명인 농가집 부녀가 글을 썼다고 하여 이틀동안 “이름”을 찾고 있었으니 자아에 대한 그 집착은, 정말로 차이가 얼마나 큰가!

마음이 사람 속에 있어 일하는 마음, 호사심(好事心), 큰 일을 할 때의 마음이 자신의 행동을 수시로 이끌었지만 각성하지 못했다. 2001년 가을, 나는 사당(邪黨)이 이용하는 노동교양소에서 일년간 박해당했다. 그 당시 꿈 속에서 전단지를 붙이고 진상을 알렸고 심지어 한번은 꿈 속에서 동수와 함께 큰 자동차를 운전하면서 전단지를 뿌렸다. 대낮에 나는 함께 수감된 동수와 꿈 속에 행한 “큰 일”을 재미있게 이야기했다. (내가 수시로 발정념을 하기에 사악은 사람을 이용하여 내가 수시로 말하는 것을 제지하지 못했음) 나 자신은 일을 한 만족감 속에 빠져 깨어나지 못하고 오히려 이는 자비하신 사부님께서 나에게 “일하는” 사람마음을 빨리 내려놓고 감금을 부정하고 나가서 사람을 구도하겠다는 정념을 내보내라는 점화임을 몰랐다. 노동교양소에서 일년간 박해당한 후 중학교 시절의 선생님과 동창생 그리고 동창생의 형(“610″인원 이자 촌지부 서기)에 의해 풀려나가 다시 세뇌반에서 박해당하게 되었다.

그 시기 필경 “사람”에서 걸어나와 수련한 시간이 길지 않고 성숙되지 않아 집에 돌아온 후 뿌리를 깊이 파보지 않고 계속 “정”에 의해 교란당했다. 집에 돌아왔을 때 마침 동지섣달 한 겨울이라 집에는 먹을 것과 땔감이 거의 없었고 남편은 생활할 마음이 없어 하면서 좋은 표정을 보이지 않았다. 집에 돌아온 그날, 방 두 칸에서 두 광주리의 먼지를 쓸어냈는데 그 당시 정말로 감개가 깊었다. 자신은 수련을 잘 못하고 이 집은 오히려 천년 묵은 절간처럼 곳곳에 먼지였다. 열 살된 딸은 눈에서 고독스럽고 처량한 눈빛이 흘러나왔고 그 시기에 노동교양소 접견실 창 밖에서 큰 소리로 “엄마, 발정념을 많이 하세요, 밥을 많이 먹고 일을 적게 하고 사부님을 잊지 마세요.”라고 알려주었던 어린 제자의 신태(神态)는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로써, 동수로써 나의 마음은 아파서 피가 흘렀고 사존의 자비하신 고도(苦度)에 부끄러웠다. 지금에야 사람의 근본 집착이 작간을 부리고 있음을 알았다. 만약 일찍이 사람의 근본 집착을 제거했다면 사부님께 번거로움을 덜 끼쳤을 것이고 자신과 어린 동수에게 수련의 장애를 증가시키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교훈은 마땅히 우리로 하여금 더욱 청성하게 할 것이고 진정으로 성숙해야 비로소 손실을 감소시킬 수 있으며 비로소 위대하신 사부님께서 우리를 위해 적게 감당하신다. 만약 사람에 대한 근본 집착이 없다면 “명리정”은 작용을 일으키지 않았을 것이고, 만약 “사람”을 내려놓았다면 그 “정”은 또 감히 당신을 상관하겠는가? 만약 이익의 마음이 없었다면, 고려하고 의심하고 이것 저것 두려워할 필요가 있겠는가? 만약 뼈 속에서부터 명을 구하는 것이 없다면 수시로 무슨 “기세등등한 큰 일”을 하려고 생각하고 또 타인을 숭배하고 의지하고 환희를 느낄 필요가 있겠는가?

장춘 녹원지역에서는 동수 한명 한명씩 먼저 넘어뜨리지 않았는가? 만약 시시각각 법으로 이지적으로 가늠했다면 아마도 지금의 장춘 지역에서 그렇게 많은 동수들이 붙잡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질책이 아니라 우리는 더이상 “명리정”에 이끌려 허둥대지 말아야 할 것이다.

8년간의 조사정법의 길에서 우리의 교훈은 너무나 많았다. 사람에서 걸어 나오자! 자아를 내려놓고 수시로 법으로 자신을 가늠하면 “심마(心魔)”에게 제약되지 않을 것이다! 특히 협조일을 하는 동수들은 아주 쉽게 명리에 이끌려 일하는 상태에 처하는데 이 한 점에 대해 나는 아주 깊은 감촉과 교훈이 있었다. 접촉하는 수련생이 좀 많고 일을 좀 많이 처리한다고 하여 법리에 대해 좀 똑똑히 안다고 하여 갈수록 당당해지며, 누가 “당신은 정말 대단하다”고 한마디 칭찬하면 입은 즐거워하지 않고 마음은 즐거워하며 얼굴의 근육이 스스로 뛰고 마음은 좋아하고 있다! 이때 더 청성하지 않는다면 당신을 치켜 세우는 사람은 갈수록 많아지고 당신을 찾아서 “해결하는” 일이 갈수록 많아진다. 사실 치켜 세우는 사람과 칭찬받는 사람 모두 이미 “한 쪽 발이 허공을 내딛었다.”(《2003년 정월 대보름 설법》)

동수들이여, 우리 함께 “사람”에 대한 집착을 찾아내고 근본적으로 “사람”으로부터 걸어나오며 우리 함께 자아를 내려놓자! 시간은 제한되어 있고 중생은 손실되면 안 된다! 그 날 수련생이 말하기를, 사이트에서 뵌 사존은 이미 적지 않게 늙어 보였다고 했다. 제자로서 빨리 성숙하여 사존께서 적게 걱정하게 해야 한다. 아마도 이것이 바로 우리의 자비롭고 위대하신 사존께 바치는 마음일 것인데, 또 무슨 “큰 일”을 해야 하는가?

조사정법, 중생구도는 우리가 해야 할 가장 큰 일인 즉, 마음이 사람을 구하는데 있는지를 본다. 나는 개인적으로 조사정법, 중생구도의 일은 크다 작다의 구분이 없다고 생각한다. 다급히 또는 천천히 해야 할 부분이 있을 뿐 무엇을 보고 들었든지간에 대법제자가 마땅히 해야 할 것이면 자신의 최대 능력을 다하여 원용하고 보충해야 한다. 법은 원용한 것이고 마음이 법 속에 있기만 하면 각 층차의 대법제자들은 모두 각자의 에너지를 내보낼 것이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무너뜨릴 수 없는 견고한 정체 입자일 것이다. 우리의 한 수련생이 말을 아주 잘했는데, “사부님께서 해주시고 우리는 수련하고 있다.”라고 했다. 사존께서는 정법은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하셨다! 번거로움은 모두 정법을 저촉하는 불순 물질에 의해 조성된 것이고 우리가 “사람”의 것을 뒤섞지만 않으면 정법시기 대법제자가 해야할 일을 잘할 수 있다.

문장완성:2007년 8월1일
원문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7/9/5/162069p.html

ⓒ 2024 명혜망.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