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미국 대법제자
【명혜망 2007년 7월 9일】 나는 1999년 4월 25일부터 法輪大法(파룬따파) 수련을 시작한 이래 ‘대법제자(大法弟子)’란 단어에 대해 한동안 특별한 느낌이 있었다. 속인 앞에서 ‘대법제자’를 언급하기만 하면 좀 이상한 느낌이 들었고 동수들이 ‘대법제자’라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 마치 무슨 구호 같은 느낌이 들었다. ‘法輪功(파룬궁) 수련생’이란 말을 들으면 이런 생각이 없었다. 법학습과 명혜망 문장을 읽는 중에는 나는 ‘수련생(學員)’과 ‘제자(弟子)’는 구별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또한 자신이 ‘제자’의 상태와는 마치 한 층의 간격이 있는 것 같음을 발견했다. 자신은 늘 스스로 ‘대법제자’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마음속으로도 그리 착실하다는 느낌이 없었다. 최근 수련 중에서 이 문제에 관해 사부님께서는 내가 이 부분을 돌파할 수 있도록 점화해주셨다. 이에 법리에 대한 깨달음을 여러분들과 함께 교류하고자 하니 부족한 곳이 있다면 자비로 지적해주기 바란다.
1. 수련생과 제자의 구별
개인적인 인식으로 수련생과 제자의 근본적인 구별은 바로 기점(基點)의 문제라고 본다. 즉 기점이 위사위기(爲私爲己)에 있느냐 아니면 무사무아(無私無我)에 있느냐, 사람의 기점에 서느냐 서지 않느냐의 문제이다.
역사적으로 수불(修佛)하고 수도(修道)하는 사람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 도가(道家)에서는 많은 사람이 도를 배워도 진정한 전수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오직 한 명의 제자뿐이다. 다른 사람들은 나무하고 청소하는 것부터 시작해 최후에 술류(術類)의 것을 얻는 것에 불과하며 진정한 도는 얻을 방법이 없다. 석가모니의 제자 역시 출가(出家)제자와 재가(在家)제자, 남자와 여자, 큰 무리와 작은 무리의 구별이 있었다. 선종(禪宗)의 제 2조인 혜가(慧可)는 소림사(少林寺)에서 달마(達摩)조사 앞에서 칼로 팔을 자르는 믿음을 보인 후에야 법을 얻을 수 있었고 비로소 선종의 제자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수련하기 전에 도(道)를 닦으려는 마음이 있다고 하여 반드시 그 한 문(門)의 제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그 한 문의 진정한 전수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더욱 아니다.
하지만 자비하신 사부님께서는 ‘수련생을 모두 제자로 여긴다’고 하셨고 우주대법을 수련하고자 하는 우리 매 사람에게 가져다 주셨다. 法輪大法(파룬따파) 이 한 문의 비할 바 없이 소중한 것들을 모두 우리에게 주셨으며 우리를 지옥에서 건져 올리셨고 제자에 대한 표준으로 매 수련생을 대하셨으며, 우리가 정진하거나 정진하지 못하거나 분발하거나 분발하지 못하거나를 막론하고, 생명의 내원이 어떠한지, 업력관념이 얼마나 큰지를 막론하고 오직 우리가 수련하고자 하는 그 마음만 보신다.
그렇다면, 사부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대하신다고 하여 우리가 자연히 제자가 될 수 있는가? 내 생각에는 대법제자인가 아닌가는 매 사람이 내심(內心)을 어떻게 놓는 가를 보아야 한다.
‘수련생’의 기점은 대법을 배우면서, 수련을 생활의 일부분으로 삼는 것으로, 이전에 수련자가 ‘내’가 수련하고자 한다, ‘내’가 정과(正果)를 수련 성취하고자 하며, ‘내’가 고해(苦海)를 벗어나고자 하는 심태와 아주 흡사하다. 이런 기점은 나를 위주로 하고 개인의 원만을 위주로 한 것이다. 때문에 ‘나’는 어떻게 제고하고자 하며, ‘나’는 그런 대법 일을 하고자 하며, ‘나’는 왜 상태가 좋지 않은가, ‘나’는 왜 수련 성취할 수 있는가 등의 생각이 나타난다. 수련 중에서 자신을 중심으로 간주하며 자신의 상태가 좋은지 나쁜지를 따지고 이해득실을 따지며 수련상태가 일정하지 않고 기복이 있으며 정념이 강하지 못하는 것은 이런 심태와 아주 깊은 관련이 있다.
이런 기점은 사실상 대법에 대해 구하고자 하고, 법에서 얻어내려고 생각하는 것이다. 수련의 동력(動力)은 수련을 통해 자신의 목적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인데 그 속에는 아마 정과(正果)와 불위(佛位)에 대한 추구가 있거나 또는 세간의 고난에 대한 도피가 있을 수 있으며 또한 자신의 근본 집착이 대법 중에서 출로(出路)를 찾는 것이 있을 수 있다. 이런 것들은 ‘수련생’이 아무리 3가지 일을 하고 마음을 닦을지라도 단지 자신이 포기하고자 하는 그 부분만을 개변할 수 있을 뿐 법에 완전히 동화하기란 아주 어렵게 만든다. 이 때문에 관건적인 문제에서 아주 쉽게 자신의 기점에서부터 문제를 보고 집착과 관념에 이끌려 착오적인 선택을 한다.
가령 1999년 박해가 시작된 후 북경에 가서 법을 실증하는 것을 예로 들면 ‘제자’는 법을 수호하기 위해서였다. ‘수련생’도 걸어 나올 수 있고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은 비슷하지만, 마음속으로 뒤처지지 않을까, 원만할 수 없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었다. 지금까지도 집에서 법공부와 연공을 하는 수련생 역시 이와 같은데 자신이 체포될까 두렵고 구타당할까 두려우며 (사악에게) 타협하여 층차가 떨어질까 두렵고 자신의 이익이 손실당할까 두려우며 집에서 수련해도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여겨 이런 사오(邪悟)의 길을 걷는다. 『9평』이 나온 이후 ‘제자’는 이는 박해를 결속 짓고 진상을 똑바로 알리는 좋은 기회라고 여겼지만 ‘수련생’은 이를 정치를 하는 것으로 여기고 속인이 이해하지 못하여 대법에 대해 오해한다고 여겼는데 사실 진실한 원인은 바로 자신이 속인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할까 두려워한 것이다. 기점이 다르고 나타난 일념이 다르기 때문에 행위의 효과도 당연히 같지 않다.
‘수련생’은 ‘사람’이 수련하고 있는 것으로 관건적인 시각에 하는 결정은 종종 사람을 수호하고 자신의 관념과 집착을 수호하는 것으로, 법을 수호하고 법을 실증하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다.
‘대법제자’의 심태는 자신이 대법중의 한 입자로서 자신의 일체는 모두 대법 속에 있고 법이 가장 크다고 여긴다.
“대법을 위하여 무엇을 하든지를 막론하고, 당신이 무엇을 하든 지를 막론하고, 당신들은 모두 자신을 대법 중에 놓았고, 내가 대법을 위하여 무엇을 좀 할 것인가, 내가 어떻게 제고할 것인가 하는 원래의 그런 생각이 없다. 당신들이 무엇을 하든 지를 막론하고, 모두 자신이 대법을 위하여 무엇을 하고 있다거나, 대법을 위해 마땅히 어떻게 가서 해야겠다, 또는 나는 어떻게 해야만이 이 법을 위하여 잘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지 않고, 모두 자신을 대법 중에 놓았는데, 당신은 마치 대법중의 한 입자(粒子)와 마찬가지로 무엇을 하든 지를 막론하고 자신이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한다고 여겼다.”(『북미 대호구 법회 설법』)
한 가지 좀 저속한 예를 들자면 가령 어느 회사에서 직원들이 모두 일하고 있다면 겉으로 보기에는 다 마찬가지로 보인다. 그러나 회사 사장과 직원의 심태는 전혀 다른데 사장은 회사를 자신의 일부로 간주하지만 직원들은 종종 일을 하나의 임무로 여긴다. 때문에 회사에 대한 심태가 사장과 같기란 아주 어렵다. 마치 사람들이 자기 집안의 청결과 장식에는 아주 신경을 쓰지만 공공장소에서는 그리 관심을 갖지 않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제자’와 ‘수련생’의 부동한 심태가 초래한 차이는 어떠한가?
“이런 사상은 보기에는 마치 썩 맞는 것 같은데, 모든 사람이 다 같다는 것이다. 사실 어찌 같을 수 있는가? 하는 일이 같지 않고 성심껏 책임지는 정도 역시 같지 않다. 우리 이 우주에는 또 하나의 이치가 있는데, 잃지 않으면 얻지 못하고, 얻으면 곧 잃어야 한다는 것이다.”(『전법륜』)
때문에 대법 일중에서 ‘수련생’과 ‘제자’의 상태는 또한 같지 않다. 하지만 표면적으로 보기에는 ‘수련생’ 역시 아주 정진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고 위덕(威德)을 쌓기 위해 다그쳐 일하거나 혹은 자신이 좋아하는 항목을 찾아 하거나 혹은 자신이 보기에 위덕이 크고 중요한 항목을 한다. 하지만 진정한 기점에서는 여전히 내가 대법을 위해 무엇을 하려는 것으로, 자신의 기대와 목적에 도달하지 못하면 아주 쉽게 동요하거나 힘이 빠져버리며, 심지어 대법 일을 자신을 실증하는 것으로 변질시키는데 이는 사람의 기점으로 대법제자의 일을 하는 것이다.
‘제자’의 상태는 아마 쉽게 드러나지 않을 수 있지만 기점은 진정하게 법을 가장 크게 보고 대법제자가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며 심태는 온화하고 확고한 것이다. 아울러 큰 국면에서 사고하고 묵묵히 다른 사람의 부족을 보완하며 자신의 관념과 비평에 쉽게 매몰되지 않는다. 신(神)의 기점과 심태로 사람이 신으로 성취하는 길을 걸어가고 있다.
‘제자’와 ‘수련생’의 부동한 심태의 최후의 결과는 어떠한가? 개인적으로 깨닫기에 제자에 대한 사부님의 요구는 아주 높은 것으로 제자가 성취하는 것 역시 아주 위대한 것이다. 우리는 반박해(反迫害)와 수련 중에서 정념정행 하여 미래 우주를 위해 참조를 남겨놓아야 하며, 사람이 신으로 성취하는 길을 통해 미래 우주에 원용불파(圓容不破)의 기제(機制)를 남기고 생명이 자신을 깨끗이 정화할 기회를 남겨야 한다. 연공을 통해 우리의 신체를 육신(肉身)에서부터 극히 미시적인 하에서 전반 소우주 체계에 이르기까지 미래 우주의 구조 중에서 수천만의 대궁(大穹) 물질구조를 성취해야 한다. 우리는 장차 미래 우주 법의 일부분이 되어야 하며 우리가 대법 속에서 증오(證悟)한 것은 우리 그 체계중의 법이 될 것이다. 우리가 수련 중에서 좋지 않은 집착과 요소를 닦아버리는 과정은 미래 생명이 반본귀진(返本歸眞)하는 참조가 될 것이다. 우리는 곧 미래 우주와 미래 우주 법의 일부분이며 우주 중의 중생과 바른 요소를 위해 책임져야 한다.
이 일체를 성취하자면 우리는 온 몸과 마음을 법속에 용해시켜야 하며 자신의 요소를 제 1위에 놓지 말아야 한다.
“만약 개인의 원만만을 최고의 일로 여긴다면 그럼 정법시기 대법제자가 될 자격이 없다고 나는 말한다.”(『북미순회설법』)
법을 얻었으니 물론 법에 동화한 일부분은 바로 신(神)이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온 목적, 우리에 대한 사부님의 요구와는 아주 거리가 먼 것이다. 아울러 이런 ‘수련생’의 심태를 지니고는 원만을 구한다면 사실 이는 구우주(舊宇宙)의 위사위기(爲私爲己)한 근본요소를 벗어나기가 아주 어렵다. 아직 신우주(新宇宙) 생명의 본질도 구비하지 못했으니 신우주로 진입할 수 있는가 여부도 불확실한 것이 아니겠는가.
2. 대법제자의 정념
사부님께서는 설법 중에서 여러 차례 정념을 언급하셨고 대법제자는 반드시 정념으로 문제를 보아야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럼 정념이란 무엇인가? 대법제자의 정념은 마땅히 어떠해야 하는가?
사부님께서는 『미국동부법회설법』중에서 일찍이 다음과 같이 제출하셨다. “여기에서 가리킨 일체 마음은 물론 당신 수련 중의 일체 정념(正念)이다. 정념이란 사실상 역시 바른 인식이다.”
또 『2005년 샌프란시스코 법회 설법』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내가 오늘 명혜망의 보도를 보니, 한 수련생은 다리를 맞아서 분쇄성 골절이 되었지만 또 깁스를 하지도 않았다. 이 수련생은 자신이 불구가 된다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고 전혀 대수롭게 여기지 않으면서 매일 법공부를 했다. 정념이 아주 충족하여 조금이라도 앉아있을 수 있을 때면 연공을 했다. 의사는 그녀에게 분쇄성 골절에 깁스를 하지도 않았으니 이는 모두 그 감옥의 병원에서 한 짓이라고 그녀에게 알려주었다. 그녀는 그것을 상관하지 않았고 나는 다리를 틀고 연공할 것이라고 했다. 아파서 안 되도 여전히 견지했는데 나중에는 다리를 틀어도 아프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좋아졌다. 지금은 또 뛸 수 있고 달릴 수도 있으며 아무 일도 없이 정상인과 똑같다. (박수) 당신들 누가 이렇게 할 수 있다면 낡은 세력은 절대로 감히 그를 움직이지 못한다. 누가 이렇게 할 수 있다면 관을 넘는 중에서 걸어 나온 것이다. 무엇을 정념이라고 하는가? 이것이 바로 정념이다.”
매 층차의 생명은 모두 정념이 있을 수 있는데 바로 그 층차의 표준에 따라 가늠하는 것으로 그 층차 중의 바른 인식과 사상염두이다. 가령 사람의 정념을 예로 들자면, 지금은 바로 대법을 지지하고 악당을 반대하는 것 및 도덕에 따라 중국 오천년 신전문화(神傳文化) 중의 올바른 부분에 따라 일을 처리하는 것이다. 대법제자에 대해 말하자면 정념이란 결코 이런 표준 중에서의 염두가 아니다. 사람은 생사를 내려놓지 못했다고 하여 정념이 없다고 할 수 없지만 대법제자가 생사를 내려놓지 못하고 세간의 득실을 내려놓지 못할 때 생기는 염두는 바로 정념이 아니다.
개인적인 깨달음은 대법제자의 정념이란 바로 사부님의 요구에 부합하는 것으로 법에서 내원하여 대법제자가 마땅히 갖춰야할 바른 인식과 염두이다.
정념은 오직 법(法)에서만 내원하는 것이다. 사람의 인식과 관념, 기타 학설이나 이론 혹은 기타 법문의 것에서 내원한 것은 모두 대법제자의 표준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정념은 말할 나위도 없다. 우리는 오랜 시간의 법공부 중에서 아마 하나의 오류가 나타날 수 있는데 법공부를 위해 법을 공부하고 진정하게 마음을 조용히 하고 법에 동화하지 않는다. 동시에 생활 속에서 종종 “예전에 어떤 사람은 공원에서 연공(練功)하든 집에서 연공하든 무척 정성을 들이고 아주 경건하며 연마(練)함도 괜찮았다. 그러나 문만 나서면 그가 아니며 제멋대로 한다.”(『전법륜』)과 같다. 법공부는 법공부이고 생활은 생활이며 일은 일로 변해버렸는데 시시각각 곳곳에서 법리의 요구에 따라 자신의 일사일념(一思一念)과 일언일행(一言一行)을 가늠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의 일상은 속인사회의 일과 학습 중에서 생활하고 있기에 종종 자신도 모르게 사람 속에서 양성한 관념과 인식으로 자신의 일을 지휘한다. 이럴 때면 종종 정념이 부족한 것으로 또한 자신이 대법제자임을 소홀히 한 것이다.
이외에도 법공부를 할 때 매 사람은 모두 법속에서의 깨달음과 법에 대한 인식이 있는데 이는 물론 아주 아름다고 오묘하며 기쁜 과정이다. 생활 속에서, 속인 사회 속에서 종종 ‘해내는 것이 수련’임을 소홀히 하고 단지 법리상에서만 분명하고 명백하며 깨닫기만 하는데 이는 자신이 해낸 것과는 같지 않고 또 자신이 그 경지로 수련한 것도 아니다. 수련이 착실하지 못함은 또한 진정하게 법에 용해될 수 없음을 초래하는데 정념이 그다지 강하지 못하고 그다지 충분하지 못함을 초래한다. 만약 착실하고 착실하게 ‘해내는 것이 수련’이며 법리의 지도에 따라 일을 행한다면 그 자체 역시 정념을 강화하는 과정이다.
수련의 층차가 부동하고 상태가 부동하기 때문에 매 사람의 정념 역시 같지 않을 것이다. 매 층차에서 수련 중인 제자에 대한 법의 요구 역시 같지 않기 때문에 수련은 따라 배울 수 없는 것으로 다른 사람이 한 것이 잘했거나 못했거나, 틀리거나 맞거나 단지 참조만 할 수 있을 뿐이다. 다른 사람이 한 것이 당신만 못하다면 아마 당신에 대한 요구가 높기 때문일 것이며 이 때문에 자신이 남보다 낫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 다른 사람이 당신보다 잘했다면 당신더러 차이를 보게 한 것으로 또한 당신이 수련을 잘하지 못했으니 돌파가 필요할 때이다. 하지만 근본적인 정념에서 우리는 반드시 무조건적으로 사부님의 요구에 따라 해야만 비로소 대법제자의 상태이다.
이번 박해 속에서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움직이지 않는 하나가 만 가지 움직임을 제약한다”고 알려주셨다. “어떤 환경이든지 막론하고 사악의 요구·명령과 시킴에 다 협조하지 말라. 여러분이 모두 이처럼 한다면 환경은 이렇지 않을 것이다.”(『대법제자의 정념은 위력이 있는 것이다』)
이런 요구에 따르는 것이 바로 정념이며 반대로 각종 구실로 사람의 마음을 덮어 감추려는 염두가 있다면 이런 염두들은 사람마음이지 정념이 아니다. 가령, ‘일단 참고 나간 후에 다시 진상을 알리자’, ‘협조하지 않으면 구타당하고 형기가 가중될 것이 아닌가.’, ‘나간 후에는 또 체포될까 두렵다.’ ‘보증서를 쓰지 않으면 밥그릇을 빼앗길 것이다.’ 등등.
구세력(舊勢力)의 요소와 흑수(黑手), 썩은 귀신이 수련생들의 신체를 박해하는 중에 우리에 대한 사부님의 요구는 다음과 같다.
“나 이 사부로서 말한다면, 정법 중에서 이번의 사악한 박해를 이용하여 대법제자를 고험하는 것을 나는 절대로 승인하지 않는바, 대법제자들도 박해를 감당함으로써 높게 수련할 수 있다는 착오적 생각을 품지 말아야 한다.”(『2004년 미국서부법회 설법』)
이 방면에서 우리에 대한 정념의 요구는 바로 다음과 같다.
“우리는 근본상에서 그것의 이 일체를 부정하며, 그것들을 부정하고 배제하는 중에서 당신들이 행한 일체야말로 위덕이다. 그것들이 조성한 마난 속에 가서 수련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승인하지 않는 가운데서 자신의 길을 잘 걷는 것이며, 그것들 자체를 제거하는 마난의 표현마저도 승인하지 않는다. (박수) 그럼 이 각도에서 볼 때, 우리가 마주한 일은 바로 낡은 세력에 대한 전반적인 부정이다. 그것들이 최후로 발악하는 표현을 나와 대법제자들은 모두 승인하지 않는다.”(『2004년 시카고법회 설법』)
그렇다면 교란과 박해 중에서 “내가 어떤 마음을 제거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이 나를 박해했다.” “이렇게 하면 소업이 아닌가.” “박해를 감당해야 높이 수련한다.” “박해를 견뎌냈다면 잘한 것으로 이는 수련을 잘했음을 설명한다.” “내가 어떤 마음을 제거하도록 도와 달라.”는 등의 이런 생각들은 모두 대법제자의 정념이 아니다. 물론 마땅히 있어야 할 작용을 일으키지도 못하는데 심지어 마난을 가중할 수 있다.
사부님께서는 “좋고 나쁨은 사람의 일념에서 나온다.”라고 『전법륜』에서 말씀하셨다. 때문에 매 문제에서 대법제자의 정념으로 문제를 보는가 보지 않는가는 곧 매 사건의 결과를 결정한다. 수련인은 모두 알다시피, 사람의 사상내원은 아주 복잡한 것이다. 만약 대법제자의 정념으로 문제를 보고, 다른 공간에서 우리의 일념이 법에 부합한다면 물론 법의 요소가 곧 우리 신체의 공간과 소통될 것이며 우리 배후와 다른 공간에서 법의 힘이 있을 것이며, 우리의 금강부동(金剛不動)한 정념과 우리가 내원한 우주 대법 중의 힘이 곧 일체 바르지 못한 것, 일체 교란과 박해하는 것들을 해체시킬 것이다. 때문에 오직 정념이 강하기만 하다면 우리는 곧 구우주(舊宇宙)의 요소에 의해 제약당하지 않을 것이다.
우주 법속에서 온 정념은 또한 무소불능(無所不能)한 것이다. 우리가 일을 처리할 때 힘이 부족하다고 느낄 경우는 종종 모두 정념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속인사회 중에서 어떤 일도 모두 한 층 법리(法理)의 제약을 받는데 어떠한 일과 기능이든지 모두 그것 자신의 지도원칙이 있으며 이런 것들은 모두 우주 법에서 내원하는 것이다. 법속에는 각 층, 각종 체계의 법이 다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정념이 충족하다면 법과 신(神)들은 모두 우리에게 지혜를 줄 것이다. 사람이 보기에는 불가능해 보이거나 방법이 없는 것도 해결할 수 있는데 모두 걸어갈 길이 있다. 하지만 사람의 기점에서 사람의 생각으로 문제를 해결한다면 해결할 방법이 없다.
만약 정념을 움직인 것이 아니라면 그 염두가 아무리 도리가 있는 것 처럼 보이거나 혹은 아무리 자신의 눈앞 이익에 유리할지라도 그 염두의 내원이 그리 높지 못하고 모두 구우주(舊宇宙)에서 내원한 것이다. 혹은 사람이 속인 중에서 양성한 관념에서 내원한 것으로 이런 염두는 뿌리가 없는 것이며 또한 구세력(舊勢力)이 교란과 박해를 가하기 위해 제공한 구실이다.
“수련생으로서, 당신이 사부의 요구에 따라 하지 않는다면, 틀림없이 간단한 일이 아니다. 낡은 세력은 모든 대법제자에 대하여 그것들의 것을 한 세트 배치하였는데, 만약 대법제자가 사부의 요구에 따라 하지 않는다면, 바로 틀림없이 낡은 세력의 배치에 따라 하고 있는 것이다.”(『청성(淸醒)』)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알려주셨다.
“당신들은 아는가? 오직 이 하나의 수련의 문제를 말하더라도 우주의 낮은 층에서는 대단히 복잡하지만 고층차에 이르면 간단한 것으로 수련이라는 개념이 없으며 오로지 업력을 없애는 개념만 있을 뿐이다. 더욱 높은 층에서 이야기한다면 일체 번거로움은 단지 하늘로 올라가는 길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며, 더욱 높은 층에서는 무슨 소업이요, 무슨 고생을 겪는 것이요, 무슨 수련이요 하는 이러한 개념이 없으며 바로 선택이다!”(『정월대보름 설법』)
우리의 수련 중에서 사실 매 한 걸음이 모두 선택이며 매 한 관(關)은 집착을 내려놓는가 아니면 자신의 상태를 고수하는가 하는 선택으로 모두 선택이다. 정념으로 선택하면 곧 우리 수련의 길을 바르게 걷게 된다. 만약 사람마음으로 문제를 가늠하는 습관을 버리지 않는다면 매 선택은 정념 중에서 한 것이 아니다. 마치 걸어가는 매 길목마다 잘못 걸으면 결국 돌아올 수 없는 길로 걸어가게 되는 것과 같다.
많은 경우 한 가지 사건이 나타날 때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시지 않으신다. 그렇다면 이 때에 우리가 정념으로 문제를 보는가 보지 않는가는 더욱 중요하다. 예를 들면, 『9평』의 출현, 명혜망에서 속인과 결혼할 수 없다고 한 문장, 『창우겁』에 관한 일 등 많은 때 우리는 정념으로 판단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종종 신변의 각종 생각이 모두 올라와 당신더러 선택하게 한다. 많은 때에 우리는 자신이 일을 판단하는 일련의 방식과 표준을 형성하는데 종종 그것이 이미 자신의 일부분이라고 간주한다. 그 한 순간에 자신이 대법제자임을 망각한 것이다. 가령 속인과 결혼할 수 있는가 하는 사례에서 사부님께서는 법에서 명확하게 말씀하시지 않았기에, 사람에 입각하거나 혹은 수련생의 기점에서 본다면 당연히 결혼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대법제자의 기점에서 본다면 중생구도가 이렇게 다급하고, 속인은 또 우리가 생각하는 것을 이해할 방법이 없으며 더욱이 수련에서 서로 도와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최후에는 종종 신이 사람 때문에 번거롭게 되는 상태가 발생할 수 있다. 어느 개체에 대한 소위 개인의 ‘선’을 위해 치르는 것은 보다 큰 범위의 대가이다. 물론 법이 크고 대법은 끝이 없는 것이라 어떤 것은 제자더러 수련하게 할 수 있지만, 그러나 매 한 제자에 대해 말하자면 법을 바로잡는 중에서 자신이 대법제자임을 망각하여 초래한 손실은 몹시 큰 것이다.
문장발표 : 2007년 7월 9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원문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7/7/9/158425p.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