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혜망] 사부님 안녕하십니까! 동수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사부님께서는 《정진요지 II, “길(路)”》에서 말씀하셨다.
“한 대법제자가 걷고 있는 길은 바로 한 부의 휘황한 역사로서, 이 한 부의 역사는 반드시 자신이 증오(證俉)하여 개창(開創)한 것이다.”
1999년 7월, 나는 친구로부터 《전법륜》한 권을 빌렸다. 처음으로《논어》와 법을 읽은 감각은 내 일생 결코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되었다. 과거 인생 중 생명의 비밀에 대한 탐색에 대한 답을 얻었다. 삶의 의미, 왜 우리는 이 지구에 살고 있는가, 왜 우리는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왜 우리는 반본귀진해야 하는가와 같은 질문들 그리고 우리 삶의 매 측면에 관한 기타 질문들에 대한 답을 얻은 것이다. 나는 앉은 자리에서 책을 모두 읽었다. 그 시간 이후로, 나는 한 번도 이 법을 내려놓은 적이 없다.
사부님께서는 《정진요지, “법 중에 용해되자(溶于法中)”》에서 말씀하셨다.
“수련생으로서 머리에 담은 것이 모두 대법이라면 이 사람은 기필코 진정한 수련자이다. 때문에 법공부를 하는 문제에서 하나의 명석한 인식이 있어야 한다. 책을 많이 보고 책을 많이 읽는 것은 진정하게 제고하는 관건이다.”
내가 막 법을 얻었을 때, 나는 마치 목이 타들어가던 사람이 물을 만난 듯 사부님의 모든 설법을 반복해서 읽었다. 나는 법공부에서만은 절대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비록 사부님께서 가르치신 고층차 중의 법을 모두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모두 받아들였다. 비록 내가 축적해왔던 관념과 사상업이 나를 교란하려 했지만, 나는 이 법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 매일, 속인의 일을 제외하고, 나의 마음은 법으로 채워져 있었다. 아침에 깨어나서도, 생각은 역시 법에 있었다. 하지만 법에 대한 이해가 확실히 깊지 않았으며 역시 인간적 이익과 호기심에 근거했다. 법공부를 하는 과정에서, 나는 사부님께서 강의 중에 우리에게 《전법륜》을 반복해서 읽어야 한다고 재차 강조하신 것에 주의를 돌렸다. 그당시 속인의 마음이 매우 강했으므로 나는 생각했다, “사부님께서 이 책을 읽으라고 강조하신 것을 보면 이 책 속에 천기가 있음에 틀림없다.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읽어야겠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의 心性(씬씽)이 아직 너무 낮았음을 인식할 수 있는데, 나는 속인 식의 사유로 사부님의 법을 이해하려 했던 것이다. 법의 각도에서 법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지름길”을 찾으려 했던 것이다.
2003년, 《전법륜》을 100번 이상 읽은 후, 내 자신의 본성의 일면이 이 법을 외우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전에 《논어》를 암송하려 했지만, 외우는데 거의 2년이 걸렸다. 나는 [명혜망]에 한 수련생이 올린 법을 외운 심득체험을 읽은 후, 《전법륜》 전권을 암송하기로 결정했다. 교류문장에서 그 중국대륙 수련생은 그녀가 《전법륜》의 처음 일곱 강의를 어떻게 암송했는지를 말했으며, 그 다음 사악에 의해 불법(不法) 체포되었다고 말했다. 감옥에 있는 동안, 그녀는 손으로 베낀 마지막 두 강의를 갖고 있던 다른 두 명의 수련생들을 만나게 되었고, 감옥에서 마지막 두 강의를 외웠다.
이 글은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중국에 있는 수련생들이 그런 험악한 환경에서도 여전히 법암송을 견지하는데, 내게 무슨 핑계가 있어 법암송이 너무 어렵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당시 나는 특히 일찍 법을 얻은 그런 수련생들이 오랜 기간 법을 공부했으니 법에 대한 이해가 깊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들을 부러워했다. 내가 법을 외우기 시작한 후 깨달은 것은, 매 수련생의 제고는 법공부를 잘 한 것에 기초한 것이 아닌가? 속인으로부터 시작하지 않은 수련자가 있는가? 이런 노수련생들을 따라잡기 위해 나는 법공부를 더욱더 부지런히 해야 했다. 지금 생각하면, 비록 내 본성이 법을 암송함으로서 법에 동화하려는 욕구는 있었지만, 여전히 위사위아(爲私爲我)의 기점에서 추구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렇게 하고 있었다. 이는 마치 사부님께서 《스위스 법회에서의 설법》에서 말씀하신 것과 꼭 같았다.
“사실 당신들은 아직 모르는데, 이 사(私)는 아주 높은 층차에까지 관통되어 있다. 예전의 수련하는 사람은 ‘나는 무엇을 하고 있다’, ‘나는 무엇을 하겠다’, ‘나는 무엇을 얻겠다’, ‘나는 무엇을 하고 있다’, ‘나는 성불하겠다’, ‘나는 무엇에 도달해야 하겠다’고 말하는데 사실 모두 그 사(私)를 떠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당신들로 하여금 진정으로 해내도록 해야 하는 것은 순정(純正)한 것, 무사(無私)한 것, 진정한 정법정각(正法正覺)의 원만(圓滿)인데, 그래야 만이 비로소 영원한 불멸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럼에도 내가 법을 암송하고 법에 동화하려던 애초의 생각은 정확하게 자신을 위하는 기점에서 나온 것이었다.
하지만 몇 년 간 법을 외우고 암송한 후, 나는 변했다. 내가 경험했던 근본적인 변화를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내가 법을 외우고 있을 때, 사부님께서는 내게 부동한 층차에서의 법을 깨닫게 해주셨고, 서서히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내가 붙잡고 있던 많은 집착들을 내려놓게 되었다. 점차 착한 마음이 층층으로 나왔으며 다른 사람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할 때면, 나의 마음은 진정으로 행복했다. 어느날 나는 하늘은 진정으로 사람의 가슴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가 매사에 다른 사람을 먼저 고려할 수 있을 때, 점차로 우리자신을 내려놓을 수 있을 때, 가슴이 포용하는 양이 점 점 더 커지면서, 본성이 아닌 부분들을 내려놓게 되었다. 법을 암송할 때, 나는 사적인 마음이 점차적으로 시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따라서 내가 있는 층차에서 느낀 것은 우주의 연화과정 중 낡은 우주의 생명들이 이렇듯 사심이 증가된 후 무섭게 변이된 과정, 그리고 사부님께서 우주중생을 구도하는 과정에서 마주하신 거대한 고난을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사부님의 자비고도(慈悲苦度)를 저버리지 않고 정법시기 대법제자의 매 한 걸음을 바르게 걷겠다고 결심했다.
법을 암송하는 과정 중에 대법에 대한 나의 믿음은 더욱 견정해졌고 하나하나 내가 갖고 있던 사(私)적인 집착심이 타파되었다. 내가 속인 혹은 수련생들과 모순이 있을 때마다 표면적으로 내가 얼마나 옳든지를 막론하고 무조건 나는 나 자신의 내면을 보았고 밖을 향해 나를 교란하는 다른 사람의 결점을 찾으려는 집착심을 내려놓으려 애썼다. 너무 오랫동안 인간사회에 미혹되어 살았기 때문에, 후천적으로 형성된 많고 많은 변이된 집착들이 내 자신의 내면에 내 생명 중에 묻혀 있었기에, 이런 숨어 있는 집착심들을 찾아내는 일은 매우 어려웠다. 점점 법공부를 더 하고 법을 외울 때, 내 마음 속에 이런 집착심들과 관념들이 차지하는 자리가 적어짐을 느꼈다. 나의 마음은 점점 더 순정해졌고 점점 더 다른 사람들을 먼저 고려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법을 외우기 시작하고 나서 처음으로 맞은 크리스마스에 쇼핑하러 간 일이 기억난다. 쇼핑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나는 쇼핑을 끝내고 좀 피곤함을 느껴 앉을 자리를 찾아 정말 좀 쉬고 싶었다. 이 생각이 있자마자 나는 멀지 않은 곳에 빈자리 하나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과거라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가서 앉았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나는 ‘만약 내가 앉는다면 다른 사람들이 서 있게 될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매사에 남을 먼저 생각하라고 가르치셨으니 나는 다른 사람에게 자리를 주어야 한다.’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나는 앉지 않았다. 매 번 물건을 사고 요금을 지불할 때도 내 뒤에 나보다 물건이 적은 사람이 있는지 보며 그들에게 먼저 지불하게 한다. 나는 주위 사람들에게 나의 자비심과 인내심을 통해 대법의 아름다움을 느끼도록 한다. 나의 변화를 가장 마지막으로 인식한 사람은 나의 남편이었다. 나의 남편은 선량하고 겸손한 오스트레일리아 사람이지만 그는 성격이 아주 급하고 종종 일이 있기만하면 인내심을 발휘하지 못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나의 제고와 수련에 가장 큰 도움을 준 사람이다. 대법에 대한 그의 이해는 의심과 오해로부터 완전히 지지하는 쪽으로 옮겨갔다.
내가 수련을 시작하기 전에는, 그는 나를 칭찬해본 적이 없었고 우리에게는 종종 많은 모순이 있었다. 점점 법에 동화되어감에 따라 나는 내 층차에서 전시할 수 있는 자비심과 인내심으로 그를 감동시켰다. 그 결과 그는 자신도 모르게 사람들 앞에서 나를 칭찬한다. 어느날 교회에서 돌아온 후에 그가 말했다. “오늘 목사가 예수님이 가르치신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다.’의 도리를 말했는데, 나는 파룬궁을 생각했어… 파룬궁이 맺은 과일, 즉 수련생들이 그렇게 좋다는 것은 파룬궁이 좋기 때문이라는 것을.” 나와 내 주위의 파룬궁 수련생들을 관찰하면서, 그는 대법의 아름다움을 깊이 느꼈다. 그는 자신 있게 말했다. “오늘날 인류사회가 이 모양이지만, 아직도 정말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그처럼 많이 있단 말이야!” 그렇게 나의 남편은 나의 진상 활동을 지지할 뿐만 아니라 또 자신이 직접 참여하기도 한다. 그는 내가 전단지를 배부하는 것을 돕고, 내가 대기원에서 번역일을 할 때도 나를 많이 도와준다. 번역할 때가 되면 컴퓨터에서 번역할 자료를 서둘러 받는데 나보다 더 열심이며 내게 영어단어를 설명해준다.
법암송은 내게 매 순간 법에 용해되게 하며, 행동을 통해 내 주위 사람들에게 法輪大法(파룬따파)의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더욱 더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게한다. 한 친구가 내게 말했다. “난 너를 존경해.” 내가 답했다. “네가 나를 존경하고 싶다면, 정말은 나의 사부님을 존경해야 해. 내가 오늘 이런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사부님이 계셨기 때문이니까.” 매 번 “당신이 해주신 모든 것에 감사한다.”라든가 혹은 “당신은 정말로 선량합니다.”와 같은 글이 담긴 생일축하 카드를 받을 때마다 나는 마음속으로 사부님이 안 계시고 대법이 없었다면, 이렇게 온 몸에 업을 가지고 아래로 미끄럼질치는 사회조류 속에 사는 사람으로서, 자신의 이익이 충격을 받을 때 이렇게 담담할 수 있을까? 속인사회의 미혹 중에 잃어버렸던 본성의 그 마음을 끊임없이 바로 잡아주는 것이 바로 대법이다. 법공부와 법암송은 머리속에 가득찬 오염된 사상을 깨끗이 씻어준다. 법공부가 가져다준 변화는 사부님과 대법, 특히 사부님의 정법시기의 가르침에 대한 나의 신념을 더욱 견정하게 해주었다. 이것은 나로 하여금 진상의 긴박성, 진상의 중요성, 사악한 공산당 박해를 폭로하는 중요성을 깊이 깨닫게 해주었다. 이 몇 년 동안, 나는 부지런히 전단지를 배부하는 형식을 취했고, 온라인으로 진상하며 대기원에서 번역 일을 하고 음악을 통해 나의 조사정법 서약을 충실히 했다. 온라인에서 진상할 때, 한 온라인 친구가 말했다. “나는 파룬궁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나는 당신이 진지하다는 것을 믿는다. 왜냐하면 나는 당신에게서 나오는 바른 에너지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수련하기 전에 나는 모르는 사람들과는 교제하기를 꺼렸다. 처음으로 매체에 진상하러 갔을 때 나의 가슴은 마구 빠르게 뛰었다. 그렇지만 요즈음 우리 지역 국회의원에게 장기적출에 관한 진상을 하러 갔을 때, 나는 굉장히 차분하면서 상화하게 말하는 나 자신을 보고 놀랐다. 내가 법을 실증할 음악을 작곡할 때도, 끊임없는 법공부를 통해 내 마음 안에 심어진 법리가 나를 인도해주었고 과시심, 환희심, 질투심, 쟁투심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게 해주었다. 이것은 또한 나 자신을 실증하려는 욕망을 내려놓도록 돕고, 대법을 실증하려는 마음을 이용해 음악을 작곡할 수 있게 한다. 바르지 않은 생각이 올라올 때마다, 법을 외우고 암송하는 과정에서 깨달았던 법리가 즉시 나를 시정해준다. 나의 가슴이 점 점 더 가볍고 순정해짐을 느낀다.
법을 암송하는 과정 중에는 사심도, 모순도 없다는 것을 인식했다. 모순은 우리의 마음이 법에서 이탈했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자신을 보호하거나 우리자신을 붙잡고 있는 사적인 마음이 있기 때문에 나타난다. 우리가 “자신”에 집착하고 있을 때, 법의 기점에서 문제를 보고 법에 동화되는 대신 우리의 관념에 집착하고 있을 때, 우리는 떠도는 입자가 된다. 하지만, 우리가 완전히 법의 기점에 서 있을 때, 그리고 상대방의 각도에서 일을 고려할 수 있을 때, 그 때 우리는 강한 “정체”를 이룰 수 있다. 오로지 매 수련자가 끊임없이 법에 동화되고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할 때, 비로소 우리는 파괴할 수 없는 정체를 형성할 수 있다.
내가 한 층차의 법리를 깨달을 때, 대법에 대한 바른 믿음(正信)이 강화되면서 끊임없이 나 자신을 바르게 해주시는 사부님의 무한한 자비에 감사드린다.
다음은 내가 법을 외운 방법을 동수들에게 소개하고자 한다. 일부 수련생들은 한 번 앉아서 할 수 있는 만큼 법을 외우려고 하는데, 내게는 이 방법이 단지 짧은 기간 동안만 통할 수 있었다. 내가 법을 외우는 방법은 매일 한 단락씩 외우는 것이다. 비록 이 방법이 비교적 느리긴 하지만, 법을 외우는 목적이 법에 동화되기 위한 것이라면, 서둘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만약 서두르게 되면 그냥 법을 읽는 것이나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내가 처음 법을 외우기 시작했을 때, 나는 《전법륜》을 하루에 한 강의씩 공부하는 것을 견지했고, 사부님의 정법 경문도 읽었다. 외우는 것은 저녁식사 후 부엌을 청소하는 시간을 이용해서 밤에 한 단락씩 외운다. 다음날은, 이 단락을 마음속으로 반복해서 암송하고, 자신 있게 암송할 때까지 반복한다. 그런데 어느 시기 머리속에 들어간 것이 더욱 많아졌을 때부터는 한 편으로 새 것을 배우면서 또한 전에 외운 것을 기억한다는 것이 어려워졌다. 그래서 나는 앞에 외운 것을 머릿속에 깊이 새겨두기 위해 나 자신에게 엄격히 요구했다. 시간이 있을 때마다 나는 전에 배운 부분을 반복해서 복습했다. 이것은 기차를 타고 여행할 때, 쇼핑을 할 때, 전단지를 배부하러 가는 길에서, 그리고 집안일을 하면서 했다. 하지만 내가 제5강의에 들어갔을 때, 외우는 속도가 갑자기 느려졌고, 아주 많은 교란을 경험했는데, 종종 하루에 한 단락도 끝낼 수 없었다. 이것은 내가 돌파해야 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나는 하루에 《전법륜》 한 페이지를 암기하는데 전념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하루에 약 45-50분이 소요되었다. 다음날은 내가 전 날 암기한 것을 복습하는 것은 물론 전에 암기했던 전체 한 강의를 암기할 수 있는 시간을 찾는다. 티끌모아 태산이라고 올 2월, 이 책을 외우기 시작한지 3년 이상이 걸린 후, 마침내 《전법륜》 이 한 부의 천서(天書) 외우기를 끝냈다.
나는 자신에 대한 집착으로 수련의 길을 시작했고, 여러 집착심을 가지고 법암송을 시작했다. 하지만 법공부를 하고 법을 외우는 과정에서, 나는 완전히 법에 동화되는 대법의 한 입자가 되었고, 사부님의 홍대한 자비 속에 용해되면서, 점차로 내가 아닌 가짜의 후천적 자신을 제거했다. 사부님이 안 계셨고 대법이 없었다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님을 알고 있다. 이런 더러운 집착심을 가지고 반본귀진하려는 나의 길을 막을 이유가 무엇이며, 사부님을 더 걱정시켜드리게 할 이유가 무엇인가? 현재 나는 《전법륜》 제6강을 제외하고는(제6강은 길어서 암송하려면 이틀이 걸린다), 하루에 전법륜 한 강의씩을 암송한다. 법암송과 더불어 나는 하루에 한 강의를 읽으려고 애쓴다. 그런 다음 나는 사부님의 최근 경문을 공부할 시간을 찾는다. 이것은 내가 하는 대법 일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다. 지금 나는 여전히 다른 일을 하는 동안 법을 암송하는 방법을 채용하며, 내가 그렇게 할 때 내 주변환경에서 오는 교란도 거의 없다. 이것은 나의 마음이 법을 외우는데 초점을 두고 있고, 세속적인 일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법을 암송하는 속도는 책을 읽는 속도와 똑같다. 나는 또한 법을 외우는 것과 일부 일반 속인의 지식을 외우는 것과는 차이가 있음을 느낀다. 내가 법을 외울 때, 나는 내가 외우고 있는 법이 초상적이며 전법륜의 매 글자가 살아있음을 느낀다. 더구나 매번 법을 외울 때마다 내게 다른 이해가 온다. 내가 《전법륜》을 그냥 읽기만 했을 때는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들이 지금 법을 암송한 후에는 명백해졌다. 법을 외울 때, 나는 종종 눈물을 흘린다. 나는 사부님께서 정법하시고 법을 전하시는 과정에서 겪으셨던 고난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린다. 나는 우주가 성, 주, 괴, 멸의 과정을 지나오면서 훼멸된 신들과 생명들을 위해 눈물을 흘린다. 나는 법에서 빗나간 생명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며, 그런 위대한 법을 수련하다가 박해받은 중국대법제자들을 위해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내가 역사적 사명을 인식하고 이번 생에서 조사정법할 수 있음에 눈물을 흘린다.
매 대법제자들은 인간세상까지 층층이 밑으로 내려왔고, 윤회전생 중에서, 미혹 중에서, 생생세세 무수한 고생을 겪고, 무수한 마난을 겪으며 오늘의 이 우주대법을 기다려왔다. 우리가 법공부를 게을리할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 요즈음 매 정진하는 대법제자들은 진상, 발정념, 법공부, 연공, 직장, 가족 등의 일로 정말 매우 바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가 법을 외울 조건이나 시간을 가졌느냐 하는 것이 아니다. 관건은 우리가 법을 외우려는 이 일념이 형성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다른 수련생들과 비교하면 정법수련 중에서 내가 한 일은 아주 적고 사부님의 요구와도 거리가 아주 멀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대법 중에서 무사무아(無私無我)를 수련해내고 선타후아(先他后我)의 정각(正覺)을 수련해낸다면, 나는 점점 더 잘할 것으로 믿는다. 이것은 내가 가장 자비롭고 가장 바른 사부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말법 이 시기에, 인간의 도덕이 급속히 미끄럼질치는 이 시기에, 나는 《전법륜》에 담긴 우주의 대법을 얻는 가장 진귀한 기회를 가졌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발표일자: 2007년 3월 5일
원문일자: 2007년 3월 5일
문장분류: [수련마당]
중문위치: http://minghui.ca/mh/articles/2006/12/4/143813.html
영문위치: http://www.clearwisdom.net/emh/articles/2007/3/5/8322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