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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을 스승으로 삼는 것은 수련의 근본이다

[명혜망 2007년 5월28일] 사부님께서 일찍이 우리들에게 간곡히 타이르셨다. “당신들이 진정으로 수련하여 올라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나는 한 가지 방법을 채용하였으며, 당신들에게 내가 줄 수 있는 것과 내가 당신들을 도울 수 있는 것들을 모두 그 한 부의 법 속에 압축해 넣었는데 단지 당신 자신이 얻으려고 하는가 하지 않는가만 보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나를 보지 못하더라도 마땅히 법을 스승으로, 법을 스승으로 삼아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오스트레일리아 법회에서의 설법》)

대법제자는 오직 법을 스승으로 삼아야 비로소 수련의 길에서 바른 길을 걸을 수 있다. 특히 오늘 중국 국내의 이런 복잡하고 간고한 수련 환경에서는 법공부를 잘하고 법을 스승으로 삼는 것만이 수련의 근본 보장이며 조금이라도 편차가 있어서는 안 된다.

전 한 시기 나의 수련 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수련을 등한시하였으며 주변에 줄곧 확고히 수련하는 동수들에게 대한 일종 존경하고 심지어는 숭배하는 심태가 나타나게 되었다. 수련과정 중 구체적으로 체현되고 반영된 것은 동수들의 견해에 매우 쉽게 끌려들어가고 자신이 법리상에서 깨달은 이치를 동수들과 교류할 때, 만약 수련생이 다르거나 혹은 반대되는 의견을 제기하면 곧바로 자신을 의심하고 심지어 스스로 부정하고 자신의 깨달음을 포기했다. 동시에 번뇌하고 고민하면서 수련에 있어서 방황하며 앞으로 전진하지 못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예를 들면 전 한 시기 나는 자신에게 음식에 대한 집착심이 많다는 것을 느꼈다. 특히 단맛이 있는 식품과 과일만 먹으려 하는 것인데 역시 일종 집착이었고 역시 수련인이 반드시 제거해야 할 집착이었다. 한 번은 동수와 교류할 때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었는데 이 동수의 얼굴에서는 오히려 일종 간파하기 어려운 비웃는 기색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일부 부정적인 말을 했는데, 대략적인 의미는 내가 극단으로 나가고 쇠뿔을 파고든다는 것이다. 당시 나의 마음은 움직였고 후에 이 문제상에서 여전히 음식에 대한 욕심이 많은 것은 확실이 집착이라고 여겼지만, 오히려 줄곧 진지하게 그것을 제거하지 못했고 자신에 대한 요구를 느슨히 했다. 그러한 수련을 견지하는 동수들이 결코 그렇게 자신을 엄격하게 요구하지 못하고 있음을 느꼈으며 자신이 대략적으로 확실히 “지나치다”는 생각을 했다. 원래 이 분야에서 수련의 체득을 한편 써서 명혜망에 보낼려고 생각했었는데 이 때문에 취소했다.

한 번은 또 교류할 때 나는 평소 자신의 일사일념(一思一念)이 순수하지 못한 것에 대해 언급했는데, 늘 잡념의 방해가 있고 때로는 동요하여 수시로 발정념을 하는 표준에 도달하지 못했다. 개별적인 동수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아직 사람 중에 있는데 어찌 사람이 생각이 조금이라도 없을 수 있겠는가?” 이 말은 나에게 대해 매우 큰 충격을 주었으며 스스로 자신을 엄격히 단속하여 일사일념에 있어서 정진하려는 마음을 동요시켰다. 심지어 어떻게 수련해야 할 것인지를 모르고 법공부도 참답게 하지 못하였음을 느꼈으며 오랫동안 오지 않았던 수마(睡魔)도 나를 교란하기 시작했다. 유사한 상황이 또 적지 않았다.

오늘 나는 인터넷에서 한 수련생이 쓴 《음식물에 대한 집착을 제거하자》라는 문장을 보았다. 나는 이렇게 오랜 시기 동안 줄곧 나를 괴롭혀온 문제의 답안을 비로소 찾았다는 것을 느꼈다. 이 문장의 작가가 쓴 그녀의 이전의 상황은 그야말로 나와 완전히 같았으며 집착한 음식물조차도 모두 같았다. 나는 만약 당시 내가 쓴다면 긍정하고 이렇게 썼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마음은 곧바로 확 트이기 시작했다. 이 일은 나를 진일보로 사고하게 하였고 분발하게 했다. 사부님께서는 줄곧 우리에게 “법을 스승으로 삼아야 한다”고 요구하셨다. 또한 제자들에게 책임자, 보도원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설법도 많이 하셨다. 사부님께서 이야기하신 적이 있는데 수련인을 가늠하는 것은 마음을 보아야 하지 수련시간이 길고 짧은 것을 보는 것이 아니며, 또한 사람의 지위를 보지 않으며 또한 책임자, 협조인을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자신의 사람 마음을 제거하지 않았기 때문에 늘 사람의 마음으로 주변 동수들을 대하고 법을 스승으로 삼지 않았기에 비로소 자신의 수련의 길에서 어려움을 초래하게 되었다. 지금 전 한 시기 정진하지 못한 자신을 돌이켜 보면 사부님의 말씀을 듣지않아 온 자신을 책망하게 된다. “왜 사부님의 말을 듣지 않고, 수련생이 여하하게 수련했는가는 그의 心性(씬씽)을 보지 않는가?”(《 가늠하는 표준을 다시 논함》)

이로써 나도 자신이 속인중에서 형성된 마음을 보아내게 되었다. 명예를 구하는 마음, 타인의 인정을 추구하는 마음, 자신을 실증하는 마음 등이다. 우리의 수련은 바로 자신을 수련하는 것이며 자신에 대하여 책임져야 한다. 수련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며 우주대법에 동화되고 자신이 조사정법(助師正法)의 사명을 완성하기 위해서이다. 만약 사람에 의해 인정하고 가서 한다면 틀림없이 할 수 없으며 그러면 당신은 누구에게로 수련하겠는가? 이 역시 자신의 주의식이 강하지 못한 표현이며 함부로 사람에게 이끌려 사람을 따라가는 것이다. 심지어 수련생이 틀렸을 경우에, 사부님께서는 동수 사이의 교류를 진행하고 동수들로 하여금 법에서 서로 각성하고 공동으로 정진하라고 배치한 것인데 자신이 사부님의 말씀에 따라 잘하지 못함으로 하여 스스로 어리둥절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을 쓰면서 내가 또 생각하는 것은, 오늘 명혜망에 나와 같은 견해의 글이 발표되었으며 사부님께서 글이 오른 명혜망을 긍정하셨기 때문에 나는 감히 자신의 견해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면 명혜망에 올리지 않는다면? 필경 수련상태는 천천만만이고 수련중의 문제도 천천만만인데 명혜망에 발표할 수 있는 문장도 한계가 있다. 그밖에 명혜망에서 편집하는 동수와 문장을 발표하는 동수들 또한 수련중에 있다. 만약 당신이 또 명혜망에 발표한 문장을 기준으로 한다면 법을 스승으로 모신다고 말할 수 있는가? 즉 관건적인 것은 그래도 법공부, 법공부, 법공부이다.

자신의 체득을 써내어 나와 같은 상태의 동수들이 나의 교훈을 고려하여 진짜로 법을 스승을 모시기를 바란다.

문장 발표 : 2007년 5월28일
문장 분류 : [수련마당]
중문 위치 : http://search.minghui.org/mh/articles/2007/5/28/155767p.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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