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해외 대법제자
【명혜망 2007년 5월 20일】 금년 4월부터 대륙 대법제자들이 여러 차례 연달아 납치되는 사건을 겪었다. 동시에 개별적인 해외 제자들도 갑자기 납치되었고 나중에 또 직접 중국으로 송환되었다. 이런 여러 면들은 나로 하여금 만약 우리가 자신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우리 자신이 이 한 시기의 진정한 사명을 알지 못하며, 우리의 진정한 미래를 알지 못한다면 사람 속에서 걸어 나오기가 아주 어렵고, 우리 대법제자들이 정법시기에 마땅히 발휘해야 할 작용을 발휘하기가 아주 어렵다는 것을 발견했다. 내가 발견한 일부 문제들을 열거해 보겠다.
1. 정법의 정체적인 형세에 대한 인식이 똑똑하지 못해
일부 동수들이 지속적으로 대량의 진상 알리는 일을 하고 있지만 이번 박해는 이미 8년이나 지속되었다. 이러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지금은 바로 이러하다고 여기는데 바로 이런 조건 하에서 대법제자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고 여긴다. 사실 ‘이런 조건 하에서’라는 말 자체가 이미 이번 박해를 승인하는 것이고 만약 우리가 박해 속에 머물러 박해를 반대한다면 언제까지 한단 말인가?
우리 다시 한 번 사부님의 『2004년 시카고 법회 설법』중의 한 단락 법을 배워보자.
“물론 낡은 세력이 배치한 이 일체를 우리는 모두 승인하지 않으며, 나 이 사부가 승인하지 않으므로 대법제자도 당연히 모두 승인하지 않는다. (박수) 그러나 그것들은 필경 그것들이 하고자 하는 것을 하였는데, 대법제자는 더욱 마땅히 더 잘해야 하고 중생을 구도하는 중에서 자신을 잘 수련해야 한다. 수련 중에서 마난에 부딪힐 경우 자신을 닦아야 하고 자신을 보아야 하는데, 이는 낡은 세력이 배치한 마난과 그것들이 배치한 마난 속에서 어떻게 잘 할 것인가 하는 것을 승인하는 것이 아니며, 이런 것이 아니다. 우리는 낡은 세력 자체의 출현과 그것들의 배치한 일체마저 모두 부정하는 것으로, 그것들의 존재마저 승인하지 않는다. 우리는 근본상에서 그것의 이 일체를 부정하며, 그것들을 부정하고 배제하는 중에서 당신들이 행한 일체야말로 위덕이다. 그것들이 조성한 마난 속에 가서 수련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승인하지 않는 가운데서 자신의 길을 잘 걷는 것이며, 그것들 자체를 제거하는 마난의 표현마저도 승인하지 않는다. (박수) 그럼 이 각도에서 볼 때, 우리가 마주한 일은 바로 낡은 세력에 대한 전반적인 부정이다. 그것들이 최후로 발악하는 표현을 나와 대법제자들은 모두 승인하지 않는다.”
해외에서 ‘法輪功(파룬궁) 박해를 중단하라’는 현수막을 곳곳에서 볼 수 있지만 ‘法輪功(파룬궁) 박해를 중단하라’는 말은 이미 종종 평범한 말이 되어 그 배후의 내포를 체현하지 못하고 있다. 파룬궁 박해를 멈추라는 말이 마치 일종 법을 실증하는 활동의 형식으로 된 것 같다. 다시 말해 해외 대법제자들이 걸어 나와 각종 활동을 하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진정으로 마음을 썼고 진심으로 가서 하고 있으며 진정하게 정념을 써서 대하고 있는지 아니면 여전히 한번 행하고 그치는 형식에 그치고 있는지 자신조차 모르고 있다. 최근 몇 차례 법회 기간의 퍼레이드에서 나는 해외 대법제자들이 확실히 정체적으로 바로 잡을 필요가 있다는 것을 보았다. 아주 많은 동수들이 이쪽에서는 현수막을 잡고 저 쪽에서는 곁에 있는 동수들과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으며, 일부 동수들은 또 말을 하면서 각종 손 자세를 하고 있었는데 현수막이 비뚤어진 것도 모르고 있었다. 일부 동수들은 바로 주이스가 청성하지 못하여 자신이 무엇을 하러 왔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온 하늘이 온통 눈이며 모두 이 작디작은 지구를 주시하고 있는데 대법제자의 퍼레이드는 얼마나 신성하고 장엄한 기회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마땅히 어떠한 심태로 대해야 하는가?
2. 각 대법 항목에 대한 동수들의 정(情)이 아주 무겁고 법에 있지 않다
1) 대법과 대법 항목 속에서 명(名)을 구함
몇 가지 예를 들겠다.
(1)동수 갑(甲)은 동수 을(乙)한테 물건을 가지러 갔다. 동수 을은 자신이 여러 박스의 소책자를 사서 대륙에 부치려 했지만 지금 모두 이곳에 방치되어 있다고 말했다. 또 이렇게 말하면서 눈물을 닦았다. 동수 갑은 경제적인 조건도 여의치 않았고 당시 대량으로 대륙에 소책자를 부치는 이 항목을 하려는 생각도 없었다. 그러나 여자 동수 을이 울자 갑은 남자인 자신이 마땅히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억지로 남아 있던 소책자들을 사왔다. 오랜 시일이 지났지만 당시 동수 갑이 산 그 소책자는 아직도 사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2)일부 지역의 신문은 장기간 적자이고 모두들 어떻게 조정해야 신문을 장기간 유지할 것인가를 연구했다. 일부 동수들은 우리가 계속 일간지 형식으로 유지해야 한다고 했고 일부 동수들은 마땅히 잘 고려하여 매주 두 번 발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렇게 하면 비록 일간지는 아니지만 사람들이 우리의 신문을 계속 볼 수 있고 우리가 박해당하는 진상을 볼 수 있으며 운송비 등의 비용도 절감할 수 있다.
사실 신문을 만드는 목적은 중생을 구도하기 위한 것이다. 중생을 구도하는 목적에 도달할 수 있다면 적합한 어떠한 방법이든 모두 고려할 수 있다. 계속 일간지 형식으로 만들고자 하는데, 만약 이런 일간지 형식을 유지하여 단지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뿐이라면 우리는 속인 중의 명을 구하는 것으로서 이 한 점에서는 진정한 수련이 아니다. 수련인으로서 대법에 대한 어떠한 항목 모두 마땅히 내려놓을 수 있고 다시 잡을 수 있어야 한다. 일종의 형식에 집착함으로써 내포를 소홀히 해선 안 된다.
수련인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수련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이미 아주 어려운데도 남에게 뭔가를 보여주려는 것은 스스로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만약 판을 새로 만들 필요가 있다면 솔직하게 독자들과 교류할 수 있다. “일부 요소의 영향으로 인해 우리는 현재 주보(周報) 혹은 일주일에 두 번 신문을 발행할 것이며 계속 독자들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대법제자가 일을 하는 출발점은 확실히 남을 위한 것이어야 하고 현실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한다. 독자와 광고주들에게 상황을 설명하면 그들은 이해할 것이다. 만약 속인 중에서 신문의 명분에만 집착한다면 작은 것을 얻으려다 큰 것을 잃을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누락이 있기 때문인데 이를 제거하지 않는다면 이 누락이 갈수록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3)또 일부 동수들은 함께 밖에 나가서 일을 하거나 다른 수련생을 소개할 때 그가 어느 어느 항목의 책임자라고 소개한다. 또 일부 수련생은 자신의 가족(동수)을 소개할 때 그가 어느 항목을 하고 있다고 말하며 일부는 또 그 가족과 어느 사회상의 유명인이 찍은 사진을 보이며 과시한다. 사실 수련인은 바로 조건 없이 수련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중생 구도의 수요에 의해 이런 항목을 하고 있고 이런 항목 배후에는 내포가 있는 것으로 속인의 사업 항목이 전혀 아니다. 남에게 자신과 수련생을 소개할 때 우리는 바로 대법 수련자이다. 만약 우리가 하는 대법 항목을 앞에 펼쳐놓고 어느 항목 중에서 우리의 지위를 부각시킨다면 그것은 자신을 과시하는 것이고 대법에 불경한 것이며 아울러 대법을 이용하는 것이다.
사실 대법제자가 아무리 많은 진상 일을 할지라도 모두 마땅히 할 것이며 또한 대륙이거나 해외이거나 모두 안전에 주의해야 한다. 모든지 다 말할 필요는 없으며 많은 동수들이 묵묵히 일을 하고 있다. 다른 동수들은 전혀 모르고 있지만 그 자신 역시 누구를 향해 과시하지 않는다. 사부님께서는 『정진요지』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책임자는 그가 속인 중에서 얼마나 일을 했든지 막론하고, 모두 대법을 위해 자원(自願)해서 일하는 것이다. 일의 성공은 다만 속인 중의 표현형식일 따름이다. 사람으로 하여금 능히 법을 얻고 대법을 널리 전하게 됨은 대법자체의 위력과 법신의 구체적인 배치인 것이다. 나의 법신이 이런 일을 하지 않는다면 널리 전함을 말하지 않더라도, 바로 책임자 자신의 보장(保障)마저도 얻기 어렵다. 때문에 늘 자신이 여하 여하하게 대단하다고 만 생각하지 말라. 대법은 명예가 없고 이익이 없으며 벼슬할 것이 없는 것만큼, 바로 수련이다.”
(4)일부 동수들은 어느 수련생을 맹목적으로 숭배하는데 그들이 능력이 있고 경험이 있으며 지위가 있고 또한 많고 많은 일을 했다고 생각한다. 일부 동수들은 법을 얻기 전에 속인 중에서 출세하길 원했고 수련에 들어온 후에도 이 마음이 여전히 있다. 표현되어 나오는 것은 보도원이 되고자 하는데 동수 중에서 일부 일을 상관하려 하고 동수들과 불학회(佛學會)의 중시를 얻고자 한다. 사부님께서는 경문 『가늠하는 표준을 다시 논함(再論衡量標準)』에서 말씀하셨다. “나는 일찍이 이야기하였다. 사람을 가늠하는 표준은 제자의 心性(씬씽)을 보아야 한다고. 아울러 나는 절대 어떠한 개오(開悟)되지 못하고 원만되지 못한 사람이 내 제자의 진실한 수련상황을 똑똑히 보게끔 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수련생을 볼 때 그가 얼마나 많은 일을 했고 그가 대법 항목에서 어떤 지위 혹은 어느 한 면에서 표현이 아주 두드러진가, 그녀의 외모가 어떤 변화를 일으켰는지 등을 보고서 그 또는 그녀가 어떻게 수련했는지 보는 것이 아니다. 그 心性(씬씽)을 보는데 이것은 또한 가늠하는 유일한 표준이다.
2) 법공부를 했지만 도리어 법을 배우지 못하다
사실 사악의 가장 심각한 박해는 대법제자로 하여금 바빠서 법을 공부할 시간이 없게 하고 또한 책을 보아도 법을 배우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법을 배우지 못하면 법으로 우리의 수련을 지도할 수 없고 자신이 제고할 수 없다. 또한 아주 많은 법을 실증하는 항목을 하고 있는데 자신도 모르게 이미 속인이 일을 하고 있는 것과 같다. 최근에 나는 몇 달간 법을 외웠고 아주 많은 법리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사부님의 설법을 10년간 읽었지만 오늘날 마치 많은 곳을 처음 배우는 것처럼 배우고 있다. 예를 들어 사람 천목을 결정하는 세 가지 큰 요소가 무엇이고 요시공능은 어떻게 형성 되었는가 등인데 법을 외우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 전에는 아무리 많이 읽어도 아무런 인상이 없었다. 때문에 나는 이 십 년 동안 줄곧 임무를 완성하는 식의 법공부 형식을 유지해왔으며 많은 시기에는 다른 요소에 이끌려 다른 공간에 가 있으면서도 자신은 전혀 몰랐다.
때문에 자신이 자신을 돌파하지 못한다면 낡은 세력이 설치한 각종 변이된 사유와 마장(魔障)을 돌파할 수 없으며 배워도 법을 배울 수 없다. 예를 들어, 법공부할 때 우리의 각종 사람의 관념이 밖으로 나오고 졸리게 하며 당장의 중요한 일 때문에 마음을 조용히 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글자를 틀리게 읽게 한다. 단체 법공부에 참석할 때 우리로 하여금 걸어 나가지 못하게 한다. 자신이 법공부 시간을 배치하고자 하지만 또 다른 일이 끼어든다. 이 몇 년 동안 우리 일부 동수들은 적지 않은 일을 했지만 법을 진정으로 배우지 못했으며 이 또한 일종의 장기적 박해이다. 우리는 그것을 진정으로 인식하지 못했고 그것을 간파하지 못했다.
어제 나는 속인의 고열 감기증세가 나타나 법을 외워도 외워지지 않았다. 나는 끊임없이 자신의 주이스를 강화하며 법을 외웠고 외우고 또 외웠다. 내가 외우려는 한 단락을 몇 차례 읽은 후 대략 외워 다시 한 번 보지 않고 써보았으며 쓴 후에 누락된 부분을 찾아보았다. 한 번 또 한 번 결국 외워낼 수 있었다. 법암송은 확실히 단호히 해야 하며 계속 견지해서 해야 하며 자신에 대해 책임져야 한다.
3. 정체 속에 용해되지 않고, 정법 각자(覺者)의 시각에 입각해 입체적으로 문제를 보지 않아
대법제자는 지금 정법시기 수련이지 개인 수련이 아니다. 대법활동 때 일부 동수들은 이 활동은 ‘내’가 참가하고 싶지 않고 ‘나’는 그 활동을 참가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일부는 이것을 ‘내’가 정통하지 않고 그것은 ‘내’가 괜찮게 한다고 생각한다. 단체 법공부 교류에 대해 일부 동수들은 바쁘면 곧 참가하지 않고 일부 동수들은 단체 법공부 후에 늘 일을 담론하여 참가하려 하지 않는데 서서히 동수들과 멀어진다. 일부 동수의 법공부는 ‘나’의 제고를 위한 것으로 문제를 처리할 때 ‘내’가 수련해야 한다고 한다. 가끔 우리는 우리가 정체 속에 있다고 여기지만 사실 우리는 정체 속에 있지 않았고 우리는 정체 속에서 우리 자신이 하려는 일을 배치하고 있었다. 전반적으로는 오직 나, 나, 나였다. 우리는 마땅히 시시각각 이 사(私)를 타파해야 하고 무조건적으로 정체의 환경을 원용해야 한다.
우리는 어떠한 문제를 고려함에 있어 ‘대법의 수요’를 첫자리에 놓아야 한다. 자신을 내려놓고 정체 속에 용해시키는 가운데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해야지 무슨 문제에 부닥치면 먼저 자신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원래 한동안 나 역시 단체 법공부에 참석하고 싶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법공부가 끝난 후 모두들 일을 담론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어느 날, 내가 여전히 기다리고 있고 또한 이 정체에 무슨 변화가 발생하기를 관망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내가 주동적으로 여러분들과 心性(씬씽)상의 것을 교류할 수 있었다. 이렇게 나는 또 단체 법공부의 환경 속으로 들어갔는데 교류할 때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한 수련생이 이미 심득을 교류하기 시작했다. 나의 심태가 변하자 환경이 변한 것이다. 나는 대법제자가 바르게 행하기만 하면 환경을 개변할 수 있고 우리가 환경에 의지하지 말고 환경에 의해 끌려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체적으로 종합해서 말하자면 우리의 일사일념(一思一念)을 바로 닦고 끊임없이 우리 자신을 진정으로 똑똑히 본다면 우리는 미래의 길을 올바르게 잘 걸어갈 수 있을 것이다.
문장완성:2007년 5월 19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원문위치: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7/5/20/155245p.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