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혜망 2007년 5월 16일】 며칠 전 내가 수련생이 고비를 넘는 것을 도울 때의 일이다. 마침 곤혹스러운 상황인데 한 수련생이 우리 집에 왔기에 그와 이 일의 곤혹스러움에 대해 말했다. 수련생은 병업이 나타나 사망한 동수들이 아주 많지만 모두들 취한 방법은 ‘상관하지 않음’이라고 말했다. 수련생이 돌아간 후 나는 더욱 ‘의혹’이 생겼다. 여기에서 나는 이 상황에 대해 간단히 서술하고자 한다.
이 노인 수련생은 사부님의 설법 학습반에도 참가했었고, 배우자와 딸 모두 노수련생이다. 99년 대법이 박해받는데 대해 이해하지 못했고 나중에 좀 막막해했으며 특히 동수들이 북경에 가는데 대해 당시 한무리의 수련생들과 함께 뒤에서 이러쿵저러쿵 많은 말들을 했으며, 이성적으로 대법을 인식하지 못했다. 2002년 이후부터 우리 지역 동수들은 이런 사람들에 대한 사업을 시작했다. 중간에 또 천목이 열린 한 수련생이 보니 다른 공간에서 그의 신체가 아주 심각한 박해를 당하고 있었지만 그에게는 직접 알려 주지 않았다. 그의 상태는 그의 배우자와 딸의 상태에도 심각한 교란을 주었다. 아주 많은 동수들이 그를 돕던 데서부터 떠나갔고 나는 2005년부터 그와 함께 법공부를 시작했다. 지금, 그의 집에는 또 법학습 팀이 생겼다.
단체 법공부를 통해 처음 시작할 때에는 매 사람이 그를 책망했다. 법에 대한 새로운 깨우침이 있기만 하면 즉각 그를 일깨워 주었다. 어느 수련생은 천목으로 본 것을 알려 주었고, 그를 위해 일제히 발정념을 했으나 효과가 없었고 신체에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이 중에서 우리는 각자 모두 그에 대해, 이 일에 대해 너무 집착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이미 우리가 법공부를 하는 다른 일종의 ‘동력’이 되었다. 우리는 모두 냉정해지기 시작했다. 법공부가 다시는 그의 이 일을 위해서가 아니었으며 법공부는 곧 법공부로 제고하고 씬씽을 닦는 것이다. 발정념은 곧 자기 신체의 사악을 제거하고 세인을 독해하는 일체 바르지 못한 요소를 소멸하여 가장 바른 마당이 되게 하는 것이다. 교류 역시 이 일 자체에서 뛰쳐나와 중점적으로 ‘9평을 전하고 3퇴를 촉구하는’ 심득으로 변했다. 그는 심득이 있으면 말하고 없으면 말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자신이 말하는 과정에 사오(邪悟)한 사상이 없는지, 지식을 탐구하는 마음이 없는지, 사부님을 믿지 않는 마음이 없는지 들어 보고자 했다. 있다면 곧 법에서 깨우치라고 그에게 말해 주었으며, 순정한 수련 환경에 불순물이 섞여선 안 된다고 그에게 말해 주었다.
하지만 그의 신체는 자신의 말에 따른다면 아직 뚜렷한 변화가 없었다. 발정념의 작용을 믿지 않았고, 천목을 추구했으며 결과를 추구하는 마음이 점점 더 심해졌다. 나는 좀 의심이 갔다. 수련생이 수련되어 올라오도록 하기 위해 나는 지금껏 있는 힘을 다했는데 그는 왜 아직도 이렇듯 집착하는가? 그와 나는 도대체 어디에서 뒤틀리고 있는 것일까? 나는 동수에게 이 일을 말하면서 답안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란 것이다. 그런데 내게 알려준 것은 놀랍게도 이 일에 대해 ‘상관 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아울러 우리 지역의 많은 협조인들은 이런 일에 대해 모두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대법제자 당신들은 법에서 깨달아야 한다.”(『2003년 정월 대보름 설법』). 우선 내가 생각하건대 이런 일에 대해 한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든 그것은 개인 문제이다. 그러나 두 사람, 세사람, 여러 사람이 모두 어떻게 생각한다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겠는가! “사실상 속인 사회에서 발생한 일체는 오늘날 모두 대법제자의 마음이 촉성한 것이다.”(『2002년 미국 필라델피아법회에서의 설법』) 이 일에 대한 큰 환경이 모두 이렇듯 선(善)하지 못한데 우리 지역이 어떻게 이 일에서 정체적인 제고를 할 수 있겠는가! 사악은 우리의 가장 큰 누락을 비집고 들어온 것이 아닌가. 우리는 이런 수련생들에 대한 도움을 방임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일에서 대법제자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심태였는가? 첫 번째 사람이 어떠한 상태에서 ‘상관하지 않는다’고 말했는지 추궁하지 않더라도 당시 그의 사상경지, 심태 및 내포는 뒤로 전해질 수 있다. 나중에 온 사람은 아마 이 말을 한 첫 번째 사람의 심태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 한번 추론해 보자. ‘상관 하지 않음’이 나중에 가면 자생(自生)자멸(自滅)로 변할 수도 있는데 그대로 발전하도록 내버려 둔다면 우리 대법제자의 사명, 사부님을 도와 정법하고 중생을 구도하는 홍대한 소원은 언제 실현할 수 있겠는가?
바라건대 이런 마음이 있는 동수들은 모두 그것을 버렸으면 한다. 이것은 이와 유사한한 일이 있는 사람에 대해 심각한 장애이다. 상관하거나 하지 않는다는 심태를 지니고 무슨 일을 진정으로 잘 할 수 있겠는가? 동시에 나 역시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다른 말씀이 생각났다. “움직이지 않는 하나가 만 가지 움직임을 제약한다.”(『최후의 집착을 제거하자』) 만약 우리가 교란에 이끌려 움직이지 않는 심태로 수련생을 도와준다면 결과는 과연 어떠할 것인가? 나는 나의 생각을 가지고 우리 팀 사람들과 교류했는데 우리 매 사람은 모두 마음이 움직였다. 모두들 자신이 문제를 보는 각도로 부터 보았고 출발점은 어떻게 수련생을 도와주었는가 가늠하는데 있었지 眞善忍 표준으로 자신을 가늠하지 않았다.
물론 어떤 때 낡은 세력도 그 누구를 박해하는 방식으로 대법제자의 주의력을 분산시켜 진상을 알리는 시간을 소모해 버리려는 목적에 도달하려 한다. 이런 정황에서는 모두들 반드시 감정 요소를 내려놓고, 계속하여 세 가지 일을 전력으로 해야만 비로소 개인에 대해 교란하려는 목적을 되도록 빨리 제거할 수 있다.
우리 법학습 팀은 여전히 계속해서 법공부를 할 것이다. 비록 우리의 사상이 어떤 때는 또 마음이 움직일 수 있지만 그러나 우리는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자신에게 경고할 것이며 가급적 법속에서 이지적으로 자신과 주변의 일체를 대할 것이다
문장발표 : 2007년 5월 16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원문위치 : http://minghui.ca/mh/articles/2007/5/16/15484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