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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 수 없는 지나간 일, 영원한 견증(見證)(상)

글 / 북경 대법제자

【명혜망 2007년 5월13일】 나는 1993년에 법을 얻었다. 당년에 행운으로 사부님을 몇 번 만나뵈었다. 《진귀한 회억》은 오래도록 나를 감동시켰다. 당시 그 진귀한 한 점 한 점, 한 방울 한 방울, 한 막 한 막은 눈앞에 똑똑하게 나타나 감개무량하다.

올해 사부님께서 법을 전하신 15주년을 경축하면서 나는 나도 응당 나의 이야기를 말하여 여러분과 향수하려 한다. 왜냐하면 매 하나의 대법제자의 심각한 체험은 곧 대법의 견정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일찍히 법을 얻은 노대법제자들은 사부님, 대법과 같이 공동으로 15년동안 비바람과 역정을 걸어오면서 눈으로 사부님께서 법을 전하신 일언일행을 친히 목격했기 때문이며 몸으로 대법의 신기하고 위대함을 체험했던 것이다. 우리는 사부님의 정직, 겸허, 자상한 사람의 일면을 견증했고, 역시 사부님의 홍대한 자비와 법신이 도처에서 시시각각 제자들에 대해 보살피심과 점화, 보호하시는 신의 일면을 견정했으며, 대법이 세간에서 사람을 위하여 질병을 제거하고 사람들에게 선한 것을 가르쳐 인류의 도덕이 신속히 승화하여 건전한 문화를 건립하는 등 특이한 효과를 견증했고, 대법이 다른 공간에서 요귀를 제거하고 마(魔)를 정복하여 중생을 구도하고 우주 신기원을 여는 위엄, 신기, 현묘함과 위대함을 견증했다. 우리가 걸은 매 일 보는 모두 파룬따파의 좋은 점과 공산사당(邪黨)의 악한 면을 보여주었고 사악의 선전과 거짓말이 이러한 사실 앞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기에 반박할 필요조차 없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행운스럽게 93년 8월에 항천부(航天部) 2원 강당에서 거행한 북경12기, 94년 3월 천진 8.1 강당에서 거행했던 텐진2기, 94년 12월12월 광주 체육관에서 거행했던 광주5기를 비롯한 파룬궁 설법학습반과 몇차례의 공을 가진 보고회 자문회에 참가했다. 93년 국제박물관 센터에서 거행했던 북경 동방건강 박람회에 참가했고, 95년 1월에는 북경 공안강당에서 열린 최초의 《전법륜》 발행식에 참가했다. 97년 10월27일(정확한 날자는 아니다) 북경 모수련생 집에서 있었던 번역 인원의 좌담회에도 참가했는데 이 활동 중에서 몇 번이나 사부님을 만나뵈었던 것이다.

이런 것은 오늘날 모두 비할바 없는 행복한 회억으로 되고 들은 이야기까지 다 써내려면 너무나 많다. 여러분들 이이 미 몇 번 쓴 것은 여기에서 중복하지 않겠다. 아래는 나의 경력이다.

* 각자의 풍모(風貌)

사부님께서는 설법할 때 종래로 연설문을 준비하지 않는다. 어쩌다 주머니에서 작은 종이를 꺼내 한 번 본다. 말씀마다 그대로 문장이 되고 얕은 데서 깊은 곳으로 흥미진진하게 이야기 하시면서 박대정심한 법리를 하나하나 보통 사람들에게 전해준다. 이후부터 이러한 사람들의 심신은 거대한 변화를 가져온다. 사부님께서는 물론 설법 도중 휴식 시간이나 설법 후의 문답 시간에 지극히 내심있게 참답게 수련생들의 각종문제를 회답하여 주신다. 백 번을 물어도 짜증내지 않고 백 번 물어도 싫증내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법을 얻게 하기 위해 사부님께서는 자신의 휴식시간을 짜내고 혹은 학습반과 학습반 사이의 틈새 시간을 이용하여 학습반을 보충하고 과목을 더 보태고 학습반을 꾸리고 강좌를 꾸린다. 수련생들의 각종 합리적인 요구를 모두 만족시켜 준다. 사부님께서는 우주 중의 모든 일체를 투철히 이야기할 수 있고 또 매 한 마디 말도 모두 사람들의 마음에 심어주어 마음속으로 탄복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이 뿐 만이 아니라 사부님께서는 매 하나의 작은 일에서도 직접 친히 수련생들에게 좋은 본보기를 보여주고 처처에서 우리에게 다른 사람을 위해서 생각하라고 했다. 기억나는데 어떤 때는 자리표대로 앉지 않을 때 많은 사람들은 사부님을 똑똑히 보려고 습관적으로 자리를 미리 차지한다. 사부님께서 선의로 이런 작법을 비평하시면서 동시에 알려주기를 수련인으로서 응당 어떻게 해야 속인과 같지 않은 수련 상태인가라고 하셨다. 사부님의 가르침 하에서 대법의 강의실에서는 다시는 미리 자리를 차지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노수련생들은 주동적으로 앞자리를 신수련생들에게 양보하고 표도 신수련생에게 양보하였다. 이런 행위는 내심에서 우러나온 것으로 그렇게도 자연스럽고 그렇게도 순정했다. 노수련생들은 또 사부님의 부탁대로 신수련생을 데리고 매번 강의가 끝난 후 쓰레기를 깨끗이 처리하고 강당을 잘 정리한 다음 떠난다. 복무원들이 있지만 이런 일들은 노수련생들의 자각적인 행동으로 되었다.

후에 대법의 장내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없고 침을 함부로 뱉는 사람도 없었고 떠드는 사람도 없고 물건들을 마음대로 버리는 사람도 없었다. 여러 사람들은 서로 도우며 문화적인 예의로 양보하여 전 강당에 비상하게 상서로운 상태가 출현했을 뿐만 아니라 사부님께서 설법을 시작하면 전 강당이 즉시 조용해져 아무런 소리도 없었고 질서를 유지할 필요도 없었다. 이것은 당시 중국 사회의 기타 어떠한 장소에서도 모두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곧 대법의 장인 것이다. 능히 일체 바르지 않은 것을 바로잡고 사람을 안으로부터 용해시켜 어떠한 좋지 않은 사상과 악습도 모두 억제당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후에 99년 4.25에서 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청원하였어도 길거리에는 “종이 조각 하나 담배꽁초 하나’ 없는 신화가 나온 것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다.

사부님께서는 설법할 때 매 번 모든 사람들이 똑똑히 보고 똑똑히 들었는가를 고려하셨다. 조건이 좋지 않을 때는 항상 일어나서 말씀하셨다. 박람회 때 사부님께서는 항상 그자리에서 일어서서 묻는 문제에 대답하시고 설법하신다. 한 번 일어서면 곧 한 두 시간이며 어떤 때는 한 나절이다. 사부님께서는 수련생들에게 이리 저리 끌려 악수, 서명, 사진을 찍어도 종래로 거절하시지 않고 모두 응해주셨다. 늘 치료받은 환자들이 사부님에게 천 만 번의 감사를 표시하는 것을 볼 수 있고 이때마다 사부님께서는 겸허한 자태로 어떠한 예물도 받지 않고 그들이 돌아가서 법공부와 연공을 잘할 것을 고무격려하신다. 학습반에서 여러 사람들이 동작을 배울 때도 사부님께서는 종래로 휴식하지 않고 전 강당을 한번 다 돌아다니신다. 내가 친히 본 것은 사부님께서는 매 구역마다 다니고 만약 강당이 몇 층이면 역시 모두 돌아다니면서 눈길은 모든 수련생들을 다 훏어보신다. 참답게 수련생들의 동작을 고치고 늘 매 어린 제자들의 이마를 만지면서 그들을 조절하여 주신다.

* 대법의 위엄

사부님의 자상함, 상냥함으로 수련생들은 사부님 앞에서 긴장을 하지 않았고 도리어 매우 친절함을 느낀다. 그러나 누가 설법하는 것을 교란하면 사부님께서는 용서하지 않으신다. 이 한 점을 우리는 모두 감수할 수 있다.

나는 북경 12기 반에서 사악한 마가 교란하는 정황을 보았다. 당시 확성기의 음성이 갑자기 커지기도하고 작아지기도 하면서 비정상적인 소리가 들렸다. 무대 등불은 밝았다가 갑자기 어두워졌다. 사부님께서 위의 기계실과 대화할 때 목소리와 표정은 매우 엄숙했다. 우리는 당시 무엇 때문인지 몰랐고 사부님의 태도를 이해하지 못했다. 후에 천진 2기의 중간에 거행한 보고회에서 사부님께서는 서징(蛇精)이 교란하는 이야기를 하면서 북경의 이번일을 말하시어 우리는 비로소 깨달았다. 탠진(天津)반에서 어떤 사람이 사부님께서 왜 기침하시는가 묻는 물음에 사부님께서는 다른 공간의 교란이 비상하게 대단하고 법을 전하는 간고함을 말씀하시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류는 응당 회멸되어야 하는데 이렇게 좋은 법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은 너무나도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모두 뚫고 나온 것이다.

현재까지 많은 신과 부처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법을 얻고 법공부를 하는 것을 보고 점차적으로 수긍하면서 사부님께서 법을 전하시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 이유는 두 가지를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십악독세에 아직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선을 향하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수련을 이렇게 잘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부님께서는 이번 학습반부터 정식으로 공을 전하고 설법하신다고 말슴하셨다. 이전보다 더 깊이 이야기 한다고 하시었다. 곧 후에 출판한 《전법룬》의 내용인 것이다. 이전에는 예비 단계이고 주요하게 기공의 각도에서 《중국파룬궁》을 이야기한 것이다. 더 후에는 법만 전하고 공을 전하지 않은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농담하면서 말씀하시기를 이후에 어떤 시기에는 공을 배우려면 비행기를 타고 국외에 가서 배우게 된다. 출국한 다음 내부에 돌아와 전하는 것인데 현재 이렇게 된 것이다.

당시 적지 않는 수련생들이 무대 양쪽에 아미타불과 노자가 있고 또 8대 금강이 호법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앞 무대에 많은 불도신들이 꿇어 앉았고 강당은 모두 법을 듣는 다른 공간의 생명들이었다. 문 양쪽과 매 한 줄의 좌석마다 모두 천병천장들이 지키고 있었다. 사부님께서는 다른 공간에서는 누구도 감히 앉아서 법을 듣지 못한다. 당신들 만이 앉아 있는 것이다 라고 하셨다. 사부님의 후기 설법 중에서 왜 이렇게 대법제자를 진귀하게 여기는가 하는 문제를 이야기 하셨다. 애석하게도 미혹 중에서 우리는 자신을 진귀하게 여기지 못하며 이미 법을 얻은 사람들도 이번 홍색 공포 중에서 걸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경솔하게 이렇게 진귀한 대법을 잃어버린 것이다.

당시 나는 아무것도 몰랐고 보지도 못했다. 마치 이야기를 듣는 것과 같았는데 전 강당이 그런 초상적인 장엄, 숙연, 신성한 분위기였다. 이 장면은 지금까지도 나의 머리속에 기록되어 있다. 사부님께서는 매 번 학습반마다 엄숙하게 여러분들이 시간에 늦게 도착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이는 주로 한 마디도 적게 듣지않고 역시 다른 사람의 법 듣는 것을 영향주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현재 우리는 설법을 잘 듣는 것의 중요성을 알고 있다.

사부님께서 학습반을 꾸리실 때 비용을 아주 적게 받는다. 어떤 때 갖가지 원인으로 더 받게된 돈은 모두 돌려 주었다. 나는 두 개 학습반에서 표를 사지 않고 듣는 정황을 보았는데 어떤 사람이 파룬을 얻지 못했다고 의문을 제기하니 사부님께서는 당신이 표를 사지 않았기에 당연히 당신에게 주지 않은 것이다 잃지않으면 얻지못한다 얻으려고 한다면 내려가서 표를 사야한다 라고 하셨다.

* 사부님께서 지하철을 타고 설법하러 다니시다

북경 12기 학습반의 이튿날 강의를 마치고 나와 6세 되는 딸이 지하철 우커송(五棵松)역에서 차를 기다려 집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 뜻밖에도 사부님과 몇 몇 수련생들이 이야기하면서 우리에게 걸어오고 있었다. 내가 기뻐하면서 앞으로 나가 사부님께 인사를 드리니 사부님께서는 답례하시면서 어떠한가? 알아들었는가? 하시고 그후에 계속 수련생과 이야기했다. 어떤 수련생이 나에게 사부님을 둘러싸지 말라고 알려주었고 여러 수련생들도 매우 자각적이었다. 내가 사부님께서도 지하철을 타시는가 하고 물으니 그 수련생이 말하기를 사부님께서 거처하는 곳이 멀어 수련생들에게 시끄러움을 줄까봐 매일 혼자서 지하철을 타고 다니신다 라고 했다. 그도 우연히 사부님과 같이 가게 되었다고 한다.

차에 오른 후 사부님과 같은 문쪽에 있지 않아 나도 사부님을 볼 수 없었다. 몇 개 역을 지나자 차 안의 사람들이 적어졌고 나는 갑자기 사부님께서 나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앉아계신 것을 보았고 비상하게 자상하신 모습을 보았다. 현재 내 머리에는 의연히 이 자부(慈父)의 그림이 새겨져 있다. 당시 나는 격동되어 곧 수련생이 한 말을 잊어버리고 어린 딸을 데리고 사부님 근처로 가서 여쭈었다. “이렇게 작은 어린이가 능히 배울 수 있습니까?” 사부님께서 방해하지 말라고 하시어 나는 두 발자국 물러서 있었다. 사부님께서는 머리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 조금 지나 갑자기 우리에게 손짓을 하셨는데 나는 어리둥절했다. 사부님은 나의 딸을 끌어 당겨 다리에 앉힌 다음 이야기하시면서 어린이의 앞이마를 누르셨다. 딸은 사부님의 다리에 앉자 미소로 대답하면서 다리는 흔들거렸다. 수시로 나를 보면서 아주 즐거운 모양이었으며 생소해 하지 않았다.

푸싱먼(复兴门)역에서 우리는 사부님을 따라 차에서 내렸다. 갈아타는 방향이 서로 달라 사부님과 인사한 후 떠났다. 그 이후부터 딸은 매일 밥도 먹지 않고 일찌기 우리가 문을 나서기를 재촉했다. 사부님께서 늦게 도착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고 한다. 평상시 잘 앉아 있지 못하는 어린 딸이 나를 따라 이 학습반의 설법을 다 들었다. 동시에 《중국파룬궁》 이 책을 들고 순리롭게 다 읽을 수 있었다. 딸은 책 속의 사부님 법상을 보기 즐겨하였다.

삼일째 우리가 집에 가려할 때 지하철 출구에서 또 묘하게 사부님께서 혼자 가시는 것을 보았다. 내가 금방 사부님하고 부르니 사부님께서는 즉각 방해하지 말라고 하였다. 후에 설법 중에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알려 주시기를 사부님은 매일 강의 후 거처로 가면서 수련생들을 조리할 뿐만 아니라 수련생들이 신청한 사진을 볼 때부터 청리하는데 매일 24시간씩 학습반 기간 동안 끊임없이 여러분들을 위해 각개 공간을 청리하고 학습반을 결속짓고 수련생이 쓴 심득교류를 볼 때도 또 조리한다고 하셨다. 왜냐하면 작업량이 매우 크고 설법시간은 제한되었기에 여러분들이 방해하지 말기를 희망하고 여러분들의 양해를 구한다고 하신 것이다.

이일은 나를 오랫동안 격동시켰으며 지금도 말할 수 없는 심정이다. 행복한 것은 사부님과 이렇게 얻기 힘든 기연으로 만난 경력이 있는 것이고 불편한 것은 우리가 능력이 없어 사부님에게 조금이라도 나은 조건을 마련해주지 못한 것이다. 더욱이 북경 8월달의 뜨거운 나날에 우리의 사부님께서는 우리를 제도하기 위하여 간고한 피로를 무릅쓰고 매일 혼자서 사람이 많은 지하철을 탄 것이다. 또 뜨거운 햇빛 아래에서 오랫동안 걸어야 하는 것이다. 곧 이러하지만 사부님께서는 길에서 일분의 시간을 놓칠세라 수련생들을 위해 많은 일들을 하시는 것이다. 그때 사람들은 많은 보통 기공사들도 모두 차로 모시고 다니면서 앞뒤로 둘러싸여 다녔는데 내가 생각하건대 유일하게 우리의 사부님께서는 이러한 것들과는 근본적으로 같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본 진실한 사부님인 것이다. 처처에서 수련생을 위하여 고려하시는 모습은 정말로 사람을 감동시킨다. 동수들은 사부님께서 매일 지하철을 타고 설법한다는 것을 알고 모두 비상하게 감동되었다. 우리는 우리가 얻은 이 일체를 너무도 진귀하게 여겨야 한다.

* 사부님께서 북경 수련생들이 걸어나갈 것을 언급하셨다

93년 동방건강박람회에서 많은 북경 수련생들이 북경에서 더이상 학습반을 꾸리지 않는다는 소식을 접했다. 왜냐하면 학습반 기일이 길고 또 다른 각종 원인으로 북경을 떠나기 싫어하고 타지역으로 가기를 원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사부님에게 북경에서 학습반을 또 꾸리자고 사정했다. 사부님께서는 줄기차게 반복적으로 우리에게 권하시기를, “북경수련생들은 왜 타지에 가서 법을 들을 수 없는가? 전국 각지의 그렇게도 많은 수련생들이 법을 얻어야 하고 북경으로 오게 되면 제일 먼 곳은 신쟝(新疆), 광주에서도 사람이 올 수 있는데, 북경에서 먹고 자는 것은 모두 비싸고 소비성도 높다. 북경 수련생들의 경제조건은 그들보다 많이 좋다. 왜 곧 나갈 수 없는가? 당시 제일 가까운 곳은 탠진(天津)에서 신청하기 시작했다. 북경은 탠진과 이렇게 가까운데 당신들이 곧 선두적으로 나갈 수 없는가? 매일 오고가도 될 수 있는데 타지 수련생과 비하면 많이 우월한 것이다. 내가 볼 때는 곧 게으른 것이다. 기실 북경에서 학습반을 제일 많이꾸렸다. 이미 아주 우월한 것이다. 당신들은 온당히 만족해야 한다. 이후에 당신들은 각지 수련생과 마찬가지로 그들을 향해 따라 배워야 한다. 수련은 곧 고생을 해야 하고 곧 버릴 줄 알아야 한다. (이상의 말씀은 이런 의미이고 그러나 절대로 진실한 것이다. 왜냐하면 대화였기에 말을 많이 하신 것이다. 아래도 같은 것이다.)”라고 하셨다.

사부님의 말씀은 북경 수련생들이 수련해야 하는 요점을 말했던 것이라 우리는 몹시 부끄러워 했다. 그렇다 왜 우리는 타지수련생보다 특수한가? 당시 많은 사람들이 사부님의 말씀을 듣고 생각을 바꾸어 탠진으로 가는 표를 샀다. 후에 많은 북경수련생들이 큰 버스를 전세 내어 매일 왕복하고, 낮에는 출근하고 밤에는 탠진에 도착하여 설법을 들었다. 확실히 고생스러웠지만 체험한 것은 잊을 수 없는 회억으로 남았다. 이로부터 북경수련생들은 곧 여러분들과 같았다. 사부님께서 어디에 가면 우리도 따라서 거기로 갔다. 이것은 사부님께서 처음으로 “나간다” 이 명사로 나를 앞으로 향하도록 한 것이었다.

이후의 수련 중에서 사부님께서는 우리를 데리고 속인의 관념 중에서 일보일보 걸어나와 우리가 부단히 승화할 수 있게 하셨다. 더욱이 엄혹(严酷)한 정법단계에 어느 한 발자국을 속인중에서 걸어나오지 못해 곧 침통한 대가를 치른다. 교훈은 극히 많다. 그러므로 나는 “걸어 나간다” “포기” “버린다”는 이러한 명사에 대해 심각한 깨달음이 있었던 것이다.

* 사부님의 눈빛

내가 제일 잊지 못하는 것은 사부님의 눈빛이다. 설법하실때 사부님의 깊은 눈빛은 극히 엄숙하고 성실하고 수련생과 교류할 때는 친절하고 자연스러웠으며 해설할 때는 상냥하고 친절하였고 사악을 대할 때는 위엄이 있고 예리한 것이었다. 이 몇 년동안 나는 사부님의 눈길을 형용하기 어려웠는데 자석처럼 단단하게 나를 흡수하는 것이었다.

당해 박람회 때 기회가 있어 사부님의 신변에 있었는데 나는 곧 한 두 시간씩 한번도 한눈 팔지 않고 사부님의 그 자상하고 부드러운 얼굴을 보면서 단 일 초라도 놓치기 싫어하였다. 시간만 짜낼 수 있다면 곧 뛰어나가 사부님을 보았다. 매 번 사부님을 볼 때 마다 모두 이러했고 영원히 보는 것도 모자랐다. 마치 오래 전에 익숙한 것처럼 하나도 생소하지 않았다. 사부님의 눈길은 내가 평생동안 본 어떠한 눈길과도 같지 않았고 비할 바도 안 되고 형용할 수조차 없는 것이었다. 사부님께서는 한 눈에 우리를 꿰뚫어 보는 것 같았고 사부님 앞에서 나는 완전히 어린이와 같았으며 머리는 깨끗해져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한 마디도 말할 수 없을 때가 많았다. 사부님께서는 당시에 아주 젊어 보였는데 머리카락은 새까맣고 머리숱은 조밀하였다. 피부는 초상적으로 부드러웠다. 주름살도 없는 것이 마치 갓난 아기의 피부와 같았다. 사부님의 손은 넓고도 부드러웠으며 손을 잡으면 마치 의지할 곳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런 든든하고 따뜻한 감각은 역시 잊지 못하는 것으로 사부님과 악수하기 전에 들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사부님과 동갑이기 때문에 사부님의 형상은 상상조차 못한 것이었고 인상은 극히 깊었다. 사부님을 안 후 나는 마치 40여 년 간을 헛되이 살았다는 감촉이 들었다. 사부님께서 나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시고 이후의 고생과 마난 중에서 사부님의 눈길은 항상 나의 머리에 심어져 있어 나를 동반하여 하나하나의 관을 넘기고 나의 신념을 견정히 하고 요언을 듣지 않고 영원히 포기하지 않게 하였다. 이는 나에게 영구한 아름다운 기억으로 된 것이다.

(계속)

문장완성:2007년 05월12일
원문위치 :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07/5/13/154682p.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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