简体 | 正體 | 대법서적

가늠하는 표준을 다시 깨닫다

【명혜망 2007년 5월 4일】 사존님께서는 《가늠하는 표준을 다시 논함》(《정진요지》 중)에서 “왜 사부의 말을 듣지 않고, 수련생이 여하하게 수련했는가에 대하여 그의 心性(씬씽)을 보지 않는가?”라고 말씀하셨다. 최근 동수들이 교류하는 문장을 보면서 나는 이에 대해 더 깊은 인식을 갖게 되었다. 전에는 이런 정황이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었다.

첫 번째 정황은 공능의 많고 적음으로(천목의 본 것이 어떠한지를 포함하여) 가늠하는 표준을 삼는다. 사존님께서는 “공능은 본디 작은 재간이요, 대법이 근본이노라”(《홍음》 중, ‘정법문을 구하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사람의 마음이 공능에 대해 집착함으로 조성된 것이며 그 속에는 사람의 과시심리가 섞여 있다.

두 번째 정황은 수련생이 박해 받은 정도로 가늠하는 표준을 삼는다. 감당한 ‘난’이 클수록 수련을 더 높이 했다고 인식하며 심지어 이런 것을 자본으로 여긴다. 또 한 가지 인식은 박해를 심하게 받을수록 문제가 더 많으며 수련을 잘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이 두 가지의 극단적인 인식은 모두 사람의 각도에서 문제를 보는 것이고 문제를 절대화 시킨 것이며, ‘정법’과 개인수련의 관계를 인식하지 못하고, 낡은 세력이 강제로 가한 마난(魔難)을 정말로 ‘시금석(試金石)’으로 잘 못 인식하게 되는데 그 속에는 ‘영웅주의’를 추구하는 마음이 섞여 있다. 낡은 세력을 전반적으로 부정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고 “그의 일이 바로 당신의 일이다.”라는 것을 모르며 마찬가지로 낡은 세력을 ‘시금석’으로 간주했는데 이것은 구함이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것이 바로 낡은 세력의 사악한 박해를 인정하는 것이 아닌가?

세 번째 정황은 한 일의 많고 적음과 영향 정도를 가지고 가늠하는 표준으로 삼는다. 거창하게 얼마 많은 ‘큰 일’을 했고 얼마나 큰 영향을 조성했다면 바로 높이 수련했다고 인정하는데, 이것은 일종의 ‘일하는 마음’이고, 사람 마음에서 비롯된 생각이다. 자신의 심성을 제고하지 않고 ‘세 가지 일’만 한다면 합격된 대법제자라고 할 수 없다. 사실 모든 드러내고자 하는 심리와 많은 표면적 사물에 대한 집착은 모두 사람 마음의 체현이다.

사람 마음의 각도에서 수련과 ‘세 가지 일’을 인식한다면 표현되어 나온 것은 복잡한 각양각색의 법에서 빗나간 후의 혼란스러운 현상들이다. 법의 각도에서 문제를 인식하고, 심성으로 수련생의 수련이 여하한가를 가늠하며, 수련자의 정념으로 각종 문제를 대해야만, 비로소 진정하게 가늠하는 표준이고, ‘정법시기 대법제자’에 부합되는지 여부를 가늠하는 표준이다.

문장완성 : 2007年05月03日
문장발표 : 2007年05月04日
문장수정 : 2007年05月03日 20:13:27
문장분류 : [제자교류]
원문위치 : http://search.minghui.org/mh/articles/2007/5/4/154089.html

ⓒ 2024 명혜망.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