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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전문화】절개를 지키고 뜻이 높으며 근검해야 복이 길다

글/ 청언(淸言)

【명헤망 2007년 4월 8일】선병(宣秉)의 자(字)는 거공(巨公)이며 동한(東漢) 펑익(馮翊) 운양(雲陽 오늘날 산시[陝西]성 춘화[淳化] 북서쪽)사람이다. 젊을 때 자신의 덕행과 절조를 수양함을 매우 중시하여 삼보(三輔)일대에서 이름이 있었다.

애제(哀帝), 평제(平帝) 시기에 간신 왕망(王莽)이 정권을 잡아 정국이 암담해지자 선병은 깊은 산에 들아가 은거생활을 했다. 관부에서 여러 번 불렀지만 그는 병을 핑계로 가지 않았다. 왕망이 그를 재상으로 청했지만 그는 말을 듣지 않았다. 왕망이 정권을 찬탈한 후 또 한 번 사람을 파견해 불렀어도 선병은 자신의 병이 중하다며 시종 응하지 않았다.

천리(天理)는 분명하고 선악에는 보응이 있다. 공명과 이익은 몸 밖의 물건이라 만약 눈앞의 개인 이익을 위해 악인(惡人)과 함께 악한 짓을 저지르고 악한 짓을 많이 하면 언젠가 악의 보응을 받기 마련이다. 명리에 담백한 선병은 선행을 하면서 절조를 지켜 “부귀하다고 하여 현혹되지 않고, 빈곤하다고 하여 의지를 굽히지 않는” 기개가 있었다. 사실 긴 안목에서 보자면 이것이야말로 시야가 넓고 진정하게 총명한 것이다.

간신 왕망은 결국 몰락했고 경시제(更始帝) 류현(劉玄)이 즉위했다. 선병은 시중에 등용되었고 건무(建武) 원년에는 어사중승(御史中丞)에 임용되었다. 경시제의 뒤를 이은 광무제(光武帝)는 특별히 그를 사리교위(司吏校尉)와 상서령(尚書令)과 같이 하게 했다. 경성 사람들이 “3인의 독좌”라고 했다. 그 이듬해 또 사리교위로 승진했고 벼슬은 대사도 사직(大司徒司直)에 이르렀다.

선병은 직위가 높고 권한이 막중했지만 그는 여전히 근검하고 소박한 본성을 견지했다. 자신의 봉급은 모두 친척들에게 주었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땅을 나누어 주었으며 그 자신은 한 말의 식량도 저축하지 않았다. 그는 비단 옷도 없었고 입는 것은 백성들의 보통 의복이며 이불도 천 이불이었다. 밥그릇은 금은(金銀) 그릇이 아니라 사기그릇이었다. 황제가 그의 집에 가보고 그의 검소한 생활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초나라에 청빈하고 절조를 지키는 공승(龔勝)과 공사(龔舍) 두 사람이 있다지만 그들 모두 당신만 못하다!”

사람의 돈과 재물은 모두 전생에 고생하여 쌓은 덕으로 교환한 것으로 모두 정해진 한도가 있으며 무궁 무진 한 것이 아닌데 절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자신의 다음 생을 고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사치하고 낭비하면 덕을 잃는 동시에 자신에게 재앙과 천벌을 초래하는 동시에 자신의 지조와 절개를 잃게 한다. 그러므로 자고로 자신의 덕행과 수양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근검절약을 중시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이것이 바로 덕을 쌓고 복을 이어가는 행동이다.

문장발표:2007년 4월 8일
문장분류 : 천인사이
문장위치: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07/4/8/152347p.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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