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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사에 법도가 있어야

글/ 대륙 대법제자

【명혜망 2007년 4월 3일】 사부님께서는 경문 《취중》에서 다음과 같이 쓰셨다.
“제자들의 인식상의 차이로 말미암아, 일부 제자는 늘 하나의 극단으로부터 다른 하나의 극단에로 넘어간다. 매번 내가 쓴 법을 보고 과격(偏激)하게 한다. 그리하여 또 새로운 문제를 초래한다. 내가 당신들더러 사람의 인식을 전변하라는 것은, 당신들더러 사람이 대법을 인식하는 이 하나의 상태를 고수하라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역시 이지적이 못되고 이러쿵저러쿵 지껄이는 것이 아니라, 당신들더러 대법을 똑똑히 인식하라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이해한다.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수련에 중도를 취하여 한 가지 법도를 잘 장악해야 하며 극단으로 가지 말 것을 요구하셨다. 유가(儒家)에서 처세하는 중용(中庸)의 도로 이런 의미가 있다. 공자는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고 했다. 일을 함에 너무 지나치면 곧 극단이 되며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대법제자가 수련하는 선도 마찬가지로 이 선은 아무런 법도가 없는 선이 아니며 극단을 걸어가 선의 근본에서 벗어나선 안 된다.

가령 사부님께서는 《전법륜》에서 말씀하셨다. “당신은 그에게 화를 내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당신은 마음속으로 그에게 또 감사드려야 하며 정말 그에게 감사드려야 한다.” 어떤 제자는 이 문장을 극단적으로 이해한다. 남이 그를 업신여길 때도 기어이 그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하는데 마치 더욱 선량한 척 하지만 사실 그를 격노하게 하는 작용을 할 뿐이다. 또 이를테면 대륙 세뇌반에서 610 악도들과 사오한 자들이 수련생의 빈틈을 타고 들어와 대법이 선하지 못하다고 모욕하면서 일부 왜곡된 이치를 말한다. 어떤 수련생은 법공부를 잘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오한 자가 한 말에 도리가 있다고 여기면서 덮어놓고 ‘선을 베풀려’ 하며 악경이 자신을 지독하게 때릴 때도 도리어 악경에게 관심을 가지면서 힘들겠다고 한다. 양지가 없는 악경은 그가 악경의 비위를 맞춰 매를 덜 맞으려 한다고 여기며, 비천한 놈으로 여겨 결국 더 지독하게 때린다. 이것이 박해를 제거하는 것인가? 이것이 대법을 실증하는 것인가? 전혀 아니다!

대법수련은 덕으로 원한을 갚는 것이 아니다. 공자는 사람이 되는 도리 중에 덕으로 덕을 갚고 바름으로 원한을 풀라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서 정직으로, 바르고 곧은 것으로 굴욕을 대하라는 것이다. 내가 느끼건대 이 역시 사부님께서 《취중》에서 말씀하신 이치가 사람이 이 한 층에서의 체현이라고 본다. 이를테면 양심이 없는 악경이 당신을 때릴 때 당신이 도리어 그의 옷을 빨아주고, 초과근무 수당을 주는데 이것은 악경의 악행을 격려해 주는 것이 아닌가? 어떤 수련생은 아마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악경이 나를 때릴수록 나에게 더욱 많은 덕을 준다고 여길 것이다. 나는 이것은 바로 덕에 대한 집착이며, 선심이 부족한 사상이라고 여긴다. 진정한 선은 원칙이 있고 척도가 있는 것으로 과분하고 극단적으로 이른바 ‘선을 행하는’ 것은 바로 선하지 않은 것일 뿐만 아니라 위선이다. 물론 여기에서 덕으로 원을 푼다는 것을 전반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며, 법도에 맞게 덕으로 원한을 푸는 것은 양심이 아직 소멸되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는 정면적인 효력을 일으킬 수도 있다.

사람들과의 처세에도 법도가 있어야 한다. 상사와 지나치게 친밀하면 결국에 가서는 상사에게 치욕을 당할 것이며, 친구와 지나치게 친밀하면 결국은 멀어질 것이다. 진정한 사랑에도 법도가 있어야 하며, 자식에 대한 지나친 사랑은 편애가 되어 도리어 자식을 해치게 된다. 바로 소위 물극필반(物極必反)이란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취중’의 법리를 우리에게 알려주셨다. 우리는 대법제자이며 사회생활 가운데서 수련하고 있으며 처세 중에서도 수련할 수 있다. 때문에 우리가 어떤 일을 하든지 모두 취중에 법도가 있어야 한다.

문장발표 : 2007년 4월 3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문장위치 : http://minghui.org/mh/articles/2007/4/3/15203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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