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일언(一言)
【명혜망 2007년 3월 13일】 매번 사부님의 신경문이 발표될 때면 많은 대법제자들은 모두 그중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볼 수 있었고 법리를 보다 잘 인식하고 법중에서 더욱 정진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매번마다 늘 일부 동수들은 사부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신 것을 보기만 하면 고개를 돌려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바로 자신이 하고 싶었던 것으로 바꾸고, 자신을 증명하는 근거로 삼곤 한다. 그런 후에는 자신의 생각에 따라 하면서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법을 뒤에 놓았다. 짐작했겠지만 그 결과는 수련을 잘하지 못하고 시간을 허비하면서 또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모순을 만들어 주었다.
예를 들면 사부님께서는 대법제자는 반드시 법공부를 잘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어떤 사람은 법을 외우는 것이 법공부에 도움이 된다고 여겨 결국 법암송을 중시하는 이런 한 가지 방법 속으로 파고들어갔다. 결국 속인이 문장을 외우고, 지식을 배우며, 임무를 완성하는 식으로 만들어 버렸고 법공부를 하는 것이 대법 중에서 자신의 수련을 지도하기 위한 것임을 소홀히 했으며 법을 외운 후에는 여전히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자신의 관념을 표준으로 삼는다. 또 어떤 사람은 사부님께서 법공부를 강조하신 것을 보고 하루에 3-5강의 《전법륜》을 보고 5장 공법도 한번에 2시간씩 연마한다. 진상을 알리는 일이나 법을 실증하는 일에도 참여하지 않는데 참가할 시간도 없지만 또 참가할 생각도 하지 않는다. 사부님께서 “대법제자는 하나의 정체”라고 말씀하시자, 많은 동수들은 자신의 지역에서 문제가 나타나기만 하면 바로 두루뭉술하게 ‘정체’의 문제라고 말하면서 안으로 자신을 찾는 것을 자신이 속한 작은 정체와 작은 ‘내부(内部)’의 ‘내(内)’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으로 바꿔놓고 자신이 수련하고 제고하는 요소를 회피한다.
최근에 사부님께서 《정치를 다시 논함》을 발표하신 후, 정치에 대한 관심과 집착을 줄곧 내려놓지 못하는 일부 동수들은 “당신이 보라. 이제는 정치를 해도 된다.”라고 말한다. 사부님께서 《사악을 철저히 해체하자》를 발표하신 후, 일부 동수들은 바로 표면적으로 ‘근거리(近距离)’를 이해해선 안 되며 집에서 발정념을 해도 되고 이렇게 해야만 납치를 면할 수 있고 손실이 없다고 말한다. 비록 동수들이 손실을 입을까 염려하긴 했지만 도리어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공간의 간격 문제를 망각했고 아울러 수련인은 모두 사부님의 요구에 따라 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제고할 수 있다는 것을 잊어 버렸다. 사부님께서 《삼계 내에서 정법을 교란하는 데 참여한 일체 난잡한 신들을 전면적으로 해체시키자》를 발표하신 후, 일부 동수들은 도리어 사람 마음으로 근심이 쌓이게 되었다. 이렇게 하면 되는가? “어느 것이 난잡한 신인지 내가 어떻게 분별하는가?”라고 말한다. 수련인의 신의 일면은 알고 있고 대법 중에서 수련해낸 신통은 알고 있다는 것을 망각했다.
또 어떤 동수들은 상상력이 풍부하다. 사부님께서 무언가 말씀만 하시면 그는 단번에 다른 일을 생각하고 자신의 계획을 실현하려고 열중하면서 사부님의 요구에 대해서는 ‘어렵다(難)’는 한 마디 말로 가로 막힌다. 사실 이런 생각은 수련인이 말하는 ‘깨달음(悟)’이 아니고 일종 보편적인 현대인의 현상이다. 고대에 수도(修道)하는 사람, 수불(修佛)하는 사람들은, 비록 그들의 그 한 문에서 높게 닦을 수는 없었지만 그들은 자신의 사부에 대해 안에서부터 밖에까지 공경하면서 절대로 감히 흥정하거나 딴전을 피우지 않았다.
어떤 동수들은 대법을 오랫동안 접촉했음에도 도리어 어떻게 닦아야 하는 지 아직도 모르고 있고 이 동수들의 몸에는 상술한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법에 대해 아주 진실하고 줄곧 열정적으로 일을 하며 진상을 알리고 많은 대가를 지불한 많은 대법제자들의 몸에서도 역시 이런 형상이 나타났다. 그중에는 환희심, 과시심, 자아를 집착하는 마음이 가져온 영향, 또 현대 사회에서 사람의 사상에 대한 변이도 있다. 모두들 속세에서 너무 오랫동안 구르고 굴러 아마도 후천적인 관념에 대해 습관이 되어 아주 예사로운 일로 여기며 배제하려고 하지 않으며, 또한 여기에는 다른 공간에서 낡은 세력의 직접적인 교란이 있다는 것을 더욱 생각하지 못한다.
사실 사부님의 설법은 제자로서 우선 마땅히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표면 문자를 기억하고 받아들이려 노력하면서 수련 제고 중에서 잘 해야 한다. 정말로 해냈고 잘 했다면 더욱 높은 법리가 비로소 당신에게 나타날 것이다. 만약 사부님께서 대법제자들을 위해 쓴 표면문자마저도 우리가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혹은 단번에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너무 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면 자신이 생각해낸 어려움이 작은 ‘목표’로 바꾸어 사부님께서 우리더러 하라고 알려주신 것을 대체한다. 이것이 어찌 제자의 심태와 사상행위일 수 있겠는가? 어찌 더욱 ‘높이 깨달았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현대인의 많은 사상습관, 예를 들면 교활하고 진부하며 교만한 것은 아마 제거하지 않아도 일정 정도까진 수련할 수 있겠지만 결국에는 그런 제고해야 할 문제들을 피해갈 수 없다. 어려움을 모르고 제고해도 일시적으로 비교적 편안하고 안일할 수는 있겠지만, 이런 안일은 정말이지 수련인이 구하는 것이 아니다. 또 어쩌면 자신이 하고 싶은 것에 따라 일을 하는 것에서 더욱 성취감을 얻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도리어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질서 있게 안배하신 일을 지체하는 것으로 다른 공간에서 효과의 차이는 너무나도 클 것이다.
대법제자들이 오늘날 직면한 것은 우리에게 우주 대법을 전해주신 지고무상하신 사존(師尊)이시다. 법이 크기 때문에 우리는 사부님을 따라 오늘까지 걸어왔으며 우리 개개인이 단지 끝까지 수련을 견지하기만 한다면 결국에는 정과(正果)를 얻을 것이다. 그러나 과정 중에서 만약 영원히 자신을 제멋대로 구는 아이처럼 여긴다면 법 중에서 수련할 수 없는 그런 시기는 바로 하나하나 손실을 조성한 시기이다. 게다가 만약 자각적으로 자신을 엄격히 요구하지 않는다면 언제 사부님께서 요구하신 ‘성숙(成熟)’이란 2글자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사실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부님을 위해 무엇을 하라고 요구하신 적이 전혀 없으셨으며 모두 사부님께서 우리를 묵묵히 도와주시고 용인(容忍)하신 것이다. 사부님의 설법, 사부님의 경문 표면 문자의 요구를 만약 우리 매 사람마다 자신부터 해내고 착실하고 완전하게 해낸다면 이것이 바로 사부님을 도와 세간에서 행하다 가장 큰 것이며 대법의 위력과 아름다움이 우리를 통해 세간에서 더욱 잘 펼쳐질 것이다.
문장완성: 2007년 3월 11일
문장분류: 【수련마당】
원문위치: http://minghui.ca/mh/articles/2007/3/13/150628p.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