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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수련할 것인가를 말함

글/ 대륙 대법제자

【명혜망 2007년 2월 26일】 며칠 전 저녁 식사를 할 때 허리가 아픈것 같아 누워서 좀 쉬려고 침대에 눕는데 갑자기 허리가 쑤시면서 참을 수 없이 아팠다. 나는 좀 움직이면서 제1장 공법을 연마했지만 통증은 낫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더 심해졌다. 허리가 전부 뻣뻣해져서 누우려 해도 몹시 아팠다. 나는 내가 대법제자라는 생각을 하고 사부님께 구해 달라고 했다. 하지만 별로 효과가 없었다. ‘이를 어쩌나?’ 하여 나는 얼른 안을 향해 찾았다. ‘이것은 무슨 마음이 일으킨 것인가?’ 아, 원래 내가 차를 몰 때 엑셀을 너무 세게 밟았기 때문에 조성된 것이라고 승인하였다(이것은 다만 표면 현상일 뿐이다). 이 일념은 본래 법에 부합되지 않을 뿐더러 도리어 속인의 생각에 부합된 것이다. 대법제자는 아무리 힘들어도 마땅히 결리는 것과 같은 나쁜 현상이 나타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대법은 신기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여 나는 먼저 자신의 바르지 못한 염두를 깨끗이 제거하고 다시 낡은 세력, 흑수, 썩은 귀신, 공산사령 그리고 참여한 모든 생명과 물질적인 요소에 대해 깨끗이 제거하였더니 잠시 후 절반쯤 누울 수 있었고 꿇어앉을 수도 있었다. 또 한참 후에는 아픔이 사라졌다. 저녁 8시에는 가부좌하고 발정념을 할 수 있었는데 이렇게 하는 데 걸린 시간은 모두 십여 분 정도였다.

이 일은 나로 하여금 아주 많은 법리를 깨닫게 했다. 마난(魔難)이 나타난 관건적인 시각에 사부님께서 나를 관할하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때 사람의 관념이 너무도 심했던 것이다. 자신의 일념이 바른가, 강한가에 따라 정념이 나오기만 하면 즉시 효력을 볼 수 있다(정념이 강하지 않으면 효력이 없거나 반면으로 발전한다). 이 고비를 넘은 동시에 빚을 갚았고 또 제고도 얻게 되어, 사부님 법리의 지도하에서 나쁜 일이 좋은 일로 변하게 되었으니 이것이야 말로 바른 이치인 것이다. 정법시기 대법제자의 일사일념(一思一念)이 바른가 바르지 않은가는 너무나도 중요한 것이다. 마난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며 오직 시시각각 안을 향해 자신의 어느 곳이 대법에 부합되지 않았고, 동화되지 않았는지 찾으면서, 자신의 일사일념, 일언일행을 바로잡고 영원히 안을 향해 찾는 이것이 바로 우리 대법제자의 수련에 대해 사부님께서 요구하시는 표준이다.

어떤 때 나는 동수들과 접촉하거나 교류할 때 많은 동수들이 대법 일을 하는 것을 수련으로 여기면서 실제로는 어떻게 수련하는지조차 모르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수련생을 논평하는 것이 아니며 자신의 현재 수련 층차에서 수련의 실질을 교류하고자 할 뿐이다). 이를 테면 ‘자비’ 는 어떻게 닦아 내는가 하는 것인데 내가 이해하기에 바로, 진정으로 다른 사람의 각도에 서서 자신의 그 어떤 관념도 지니지 않고 문제를 볼 수 있다면 곧바로 ‘자비’심을 닦아 낼 수 있다. 바로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당신들은 금후 일할 때 곧바로 먼저 남을 생각해야 하며, 무사무아, 선타후아의 정각으로 수련 성취하여야 한다.”(《정징요지》)

어떤 수련생이 한번은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넘어졌다. 그는 그때 머리가 아주 단순하여 다른 생각이 없었고 아주 자연스럽게 입에서 “파룬따파하오”, “쩐싼런 하오”란 말이 나왔다. 이어서 오토바이를 일으켜 세우면서 또 “괜찮아, 괜찮아”라고 말했으며, 또 정법구결을 외우고 발정념을 했다.(사고가 밤에 발생하여 구경꾼이 없었다). 얼핏 보건대 이 일념에는 잘못이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정법제자의 표준에 따라 대조해 보면 곧 틀린 것이다. 결국 수련생은 뼈가 부러졌고, 집에 돌아온 후 첫날은 그래도 정념이 있어 법공부를 견지했으나(그러나 연공은 견지하지 않았다), 이튿날은 모진 통증으로 정념이 약화되었고, 침대에 누워 일어나지도 못했다. 아내(동수)가 권유하면 그는 도리어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당신은 배가 불러서 배고픈 사람의 심정을 몰라.”, “나를 데리고 병원에 가 봅시다.” 분명한 것은 사부님과 법에 대한 그의 믿음이 이미 동요하기 시작했고 낡은 세력은 그에게 약점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에게 이 난을 설치하여 그것으로 그를 고험하거나 심지어 그의 의지를 무너뜨리려 했다. 이럴 때면 사부님께서 보셔도 도와줄 방법이 없다.

무엇 때문에 동수의 첫 번째 일념이 틀렸다고 말하는가? 왜냐하면 그의 첫 번째 일념은 속인이 대법에 보호를 바라는 마음이지 대법제자의 정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차이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 수련생은 나와 교류한 후에야 명백해 졌고 그는 감개하며 말했다. “이렇게 여러 해 수련을 해왔으면서도 어떻게 수련하는지도 몰랐으니 참으로 후회스럽습니다.” 하마터면 하루아침에 무너질 뻔 했다. 지금 그의 심성은 점점 제고 되고 있으며 정상적인 연공도 회복하였고, 생활, 일도 스스로 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서 한 가지 문제를 설명 하고자 한다. 자신을 진정으로 착실히 수련하지 않고, 진정으로 안을 향해 찾지 않으며, 집착과 좋지 못한 관념을 닦아 버리지 않는 동수들은 표면적으로 아무리 잘한다 해도 단지 속인이 대법 일을 하는 것과 같으며, 수련인이 대법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마난이 나타날 때 아마 자신이 신념을 동요할 수 있기 때문에 사악에게 박해받을 수도 있다. 때문에 마난이 나타난다 해도 절대 사부님과 법에 대해 동요하지 말아야 하며 안으로 찾아야 한다. 무엇 때문에 마난이 생겼고 무엇 때문에 다른 사람은 아무 일도 없거나 혹은 고비를 넘어갈 수 있는지 찾아보아야 한다. 찾고 찾다보면 틀림없이 자신의 문제이지 사부님과 대법의 문제가 아니다. 법리는 모두 사부님과 법에 대한 우리의 정신정념(正信正念) 중에서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평소의 수련 가운데서 더위에 대한 두려움, 추위에 대한 두려움, 모기에게 물릴까 두려워하는 마음을 당신은 일일이 다 닦아 버렸는가, 청정심(淸淨心)은 또 어떻게 닦았는가? 등등. 또 예를 든다면 우리가 법공부를 할 때 사부님께서 자동차에 옷이 걸려 넘어진 노부인의 의념이 아주 바르기에 아무 일 없다고 하니 정말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이 단락 법을 말씀하실 때 당신은 자신을 대조해 보았는가? 자동차에 부딪힐 때 생사를 내려놓을 수 있고, 악경 악인이 박해할 때 생사를 내려놓을 수 있는가? 어떻게 해야만 비로소 생사를 내려놓았다고 할 수 있는가? 사부님께서 공능, 신통을 말씀하실 때 당신은 관건적 시각에 자신도 쓸 수 있다고 생각해 보았는가? 사부님께서는 무엇이나 다 우리에게 가르쳐주셨다! 생각할 수 있다면 할 수 있어야만 비로소 수련인 것이다! “법을 배우고 법을 얻어 배움을 비기고 수련을 비기나니 일마다 대조하여 할 수 있음이 수련이노라.”(《홍음》) 부동한 층차에서 우리에 대한 법의 요구를 비기고 정진하는 동수와 비겨야 한다.

이 몇 년 동안, 나는 모두 사부님과 법에 대한 확고한 믿음에 의지하여 걸어 왔다. 매번 문제에 마주칠 때면 나는 모두 법으로 대조하고 안으로 찾아보면서 깨우쳤다. 사부님께서는 일찍이 《전법륜》에서 말씀하셨다. “누가 깨달으면 누가 얻는다”라고. 이를테면 사부님께서는 늘 우주의 구조, 천체의 홍대함을 말씀하신다. 내가 어느 한 층차 중에서 천체의 홍대함을 깨우칠 때면 꿈속에서도 내가 곧 그렇게 큰 우주이며, 지구는 내 뱃속의 한 세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진실하게 감수할 수 있다.

쓰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지만, 여기에서는 다만 명혜를 통해 마난 중에서 깨우치지 못하고 난관을 넘지 못하는 동수들에게 한마디 하고자 할 뿐이다. 정진하는 동수들이 어떻게 수련하며 어떻게 하고 있는가를 많이 보며, 또한 명혜망에서 교류한 동수들의 문장을 많이 보면 자신의 제고에 좋은 점이 아주 많을 것이며 이렇게 해야만 비로서 ‘배움을 비기고 수련을 비길’ 수 있다 .

문장발표 : 2007년 2월 26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문장위치 : http://minghui.ca/mh/articles/2007/2/26/14964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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