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허베이 대법제자
[명혜망 2007년 2월 14일] 정법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아직도 일부 동수들은 감히 나와서 진상을 알리지 못하며, 법을 실증하고 중생을 구도하지 못하고 있다. 매회 발행되는 명혜주간, 각종 진상자료도 한 부만 가져가 자신만 보고 있다.
어느 수련생이 그런 사람에게 일깨워 주기를 “당신은 주간에 써 있는, 어떤 동수들은 날마다 아주 많은 사람에게 3퇴를 권하고, 어떤 사람은 대량의 자료를 배포하고 있다는 글을 읽지 않았는가” 라고 했다. 그랬더니 그는 당장 “당신이 그러는 것은 다른 사람과 높이를 비기는 마음이다. 비기지 말라, 시기에 따라 행해야 한다. 사람마다 길이 다르다.”라고 항변한다. 길이 다르다를 이렇게 이해한다는 말인가?
길이 다르다는 것은 수련 과정에, 대법 사업을 하는 과정에서 매개인의 특점과 정황에 따라 사부님께서 배치한 길이 다름을 가리킨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그가 어떻게 집에서 책을 보든지를 막론하고 어떠한 제고도 없을 것이다. 당신이 대법제자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제고되지 못할 뿐더러 아래로 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2004년 뉴욕 국제 법회 설법》
도리대로 말한다면 오늘까지 수련해 오면서 한 사람이 만약 정말로 참답게 법공부를 하였다면, 많은 문제는 사부님께서 각지 설법에서 모두 여러 번 말씀하신 것을 보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 대법제자로서 무엇 때문에 사부님의 말씀대로 할 수 없는가? 사부님께서 우리더러 세 가지 일을 잘 하라고 하셨으며, 세 가지 일을 잘해야 하는 중요성도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다.
그 가운데는 바로 진상을 알려서 악당에게 독해된 중생을 구도하는 것도 들어 있는데 당신은 도리어 한사코 걸어 나오지 않고 장기적으로 집에 숨어서 혼자 법공부를 하고 혼자 연공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당신을 “정법시기 대법제자”로 부를 수 있겠는가? 천만년 윤회 중에서 대법도가 되어 세간에서 조사정법 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수성하고 위대한 일인가. 이는 만고에 만날 수 없는 기연으로 절대로 두번 다시 없는 것이다. 우리는 역사상의 그 어떤 시기의 수련과도 모두 같지 않는 것으로서 바로 우리 자신의 원만을 초월한 더욱 큰 책임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대법을 실증하고 중생을 구도하는 것이다.
집에 숨어서 혼자 책을 보면서 감히 걸어 나오지 못하고 자신이 보는 자료만 상관하는데, 까놓고 말해서 이는 안일을 추구하는 마음이 아닌가? 고생할까 두려워하고 시끄러울까봐, 제보 당할까봐, 진상을 사람들이 듣지 않을까봐 잡힐까봐, 가족들이 좋아하지 않을까봐 두려워 한다……이것도 두렵고 저것도 두려워하는 것은 당신은 당신이 대법제자라는 것을 잊은 것이다. 당신의 책임, 당신의 자비심은 어디로 갔는가? ” 집에 숨어서 이른바 법공부하는 그런 사람들은 무슨 구실이든 막론라고 모두 놓지 못하는 집착심으로 조성한 것이다. 《역시 방할 하노라》 고생을 두려워하고 안일을 추구하는 이것 또한 대법제자에게 있어야 할 것인가? “세상의 고생 겪을 대로 겪고 세상에서 나오면 부처이노라”《홍음》 수련인에게 만약 고생이 없고 시끄러움이 없다면 당신이 어떻게 자신을 제고하며, 당신이 편안하고도 편안하다면 어떻게 원만될 수 있겠는가?
깊이 파 보면 이것 저것을 다 두려워 하는 것은 바로 낡은 우주의 “사”가 궤변을 부리는 것이 아닌가? 당신의 사상, 당신의 행위는 낡은 세력의 배치에 곧바로 부합되는 것이 아닌가?사부님은 우리를 지옥에서 건져 주셨고, 우리를 대신하여 생생세세의 거대한 업력을 감당 하셨다. 대법과 대법제자가 난을 당하고 있을 때 당신은 도리어 “두려운 마음”, “사심”으로 인하여 감히 나와서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사업을 하지 않으며 해야할 책임을 다 하지 않고있다. 생각해 보라, 자신의 안일을 구하는 마음, 자신의 “두려운 마음”을 위하여 어떠한 구실과 이유를 찾지 말라. 많고 많은 대법제자들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보라. 60~70살 되는 어떤 대법제자는 날마다 대량의 진상 자료를 배포하고 있다. 어떤 이는 학교와, 농촌으로 가서 고생을 마다하고 “3퇴를 권유”하고 있으며, 어떤 이는 날마다 제때에 끊임없이 발정념을 하느라고 아주 적게 잠을 잔다. 어떤 이는 자신의 아주 적은 생활비로 대법자료를 만들고 있다. 《주간》에는 언제나 이런 교류 문장들이 있는데 우리가 이를 본 후 감동하지 않고 탄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자신이 더 잘 할수 있도록 고무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 남은 길은 얼마 남지 않았으니 더 잘 걷고 더 바르게 하도록 하라” (《2004년 부활절 뉴욕 법회에서의 설법》)
정법의 길은 멀지 않지만 아직 결속되지 않는 한 우리에게는 기회가 있다. 대법제자의 원만은 우리 개인의 원만뿐만이 아니다. 만약 당신이 잘 수련하였다면 당신과 대응된 방대한 우주의 생명은 적게 도태될 것이며, 당신이 잘 수련되지 못했다면 당신에게 무한한 기대를 걸고 있던 허다한 생명들이 도태되어 버릴 것이다. 당신의 원만은 하나의 주의 원만이며, 하나의 거대한 생명군의 원만이다. 생각해 보라, 우리가 우리의 일언일행, 일사일념에 대해 책임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에게 법을 실증하고 중생을 구도하는 위대한 책임, 사명을 부여한 것은 대법이다. 걸어 나오라, 오늘까지도 집에서 자습하고 있는 동수들, 우리의 사전 홍원을 완수하기 위하여 더욱 많은 중생을 구도하기 위하여 어서 빨리 걸어 나오라! 대법제자는 대법이 박해를 받을 때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 중생구도이며, 어떻게 대법을 실증할 것인가이다.
동수들, 당신들의 자비심을 불러 깨우라, 분발하라,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어서 빨리 걸어 나와 조사정법하여 한 사람이라도 구도하자!
이상은 개인의 깨우침으로서 틀린 곳이 있다면 동수들의 자비로운 시정을 바란다.
문장발표 : 2007년2월 14일
문장위치 :http://minghui.ca/mh/articles/2007/2/14/14885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