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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학습을 잘해야만 비로소 안을 행해 찾을 수 있다

글/ 닝샤(寧夏) 대법제자

【명혜망 2007년 2월 5일】 얼마 전에 우리 지역 몇 동수들의 병업(病業)이 매우 엄중했다. 나와 다른 수련생은 함께 발정념을 했고 법에서 교류했다. 반드시 안을 향해 찾고 철저하게 낡은 세력의 안배를 부정해야 함을 이야기 했을 때 병업이 있는 이들 동수들에게 매우 유산한 점들이 있었다. 그것은 곧 “나는 안을 향해 찾아봐도 찾을 수 없다. 나 역시 낡은 세력의 안배를 승인하지 않고 세 가지일도 하고 있지만 도리어 이렇게….” 말 밖의 뜻인 즉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자신도 다 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일종 어찌할 수 없다는 정서를 무의식중에 나타냈다.

돌아와서 나는 생각했다. ‘사부님께서는 두 사람이 모순이 생겼을 때 제3자가 봤다면 그 사람도 모두 자신을 생각해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내가 이 일을 보았으니 틀림없이 내게 수련하여 버려야 할 것이 있을 것이다.’ 사실 내가 바로 ‘안을 향해 찾아도 찾지 못하는’ 그런 사람에 속했다.

내가 수련한지 이미 10년이 되었다. 온갖 역경 속에서 이렇게 여러 해를 걸어왔다. 어떤 동수들은 내가 수련을 잘한다고 말하고 나 역시 우쭐거리고 뽐내면서 자신이 그래도 괜찮다고 인정했다. 자신이 법도 학습하고 연공도 하며 자료를 배포하면서 진상을 알렸고 자료점을 건립하는 등, 비록 정진하는 많은 동수들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역시 걸어 나왔으니 정법시기 대법제자라고 할 수 있지 않는가?

그러나 내 자신을 돌아보니, 일에 부딪히기만 하면 각종 사람 마음이 모두 반영되어 나온다. 평상시 법공부하고 연공하며 발정념을 할 때도 늘 조용해지지 못하며 피곤해서 졸거나 아니면 잡념이 한꺼번에 밀려온다. 매번 안을 향해 찾아보려 했으나 법의 기점에 서서 찾지 않고 사람의 기점에서 찾으려했다. “보라. 나는 매일 법공부하고 정념도 발하며 또 ‘세 가지일’도 하고 있는데 어찌하여 제고를 보지 못한단 말인가? 어찌하여 병업이 중하며 교란이 이렇게 많은가?” 그러므로 ‘안을 향해 찾으나’ 찾지 못하며 때로는 찾고 찾았도 밖을 향해 찾았다. 이 어찌 대법제자의 태도란 말인가? 늘 이러했기에 마음속으로 매우 고민이 되었다.

사실 안을 향해 찾을 수 있는가는 수련인과 속인의 근본적인 구별이다. 뿐만 아니라 사부님께서는 이미 명백하게 말씀하셨다.

“이상은 연공(煉功)하여도 공이 자라지 않는 두 가지 원인이다. 즉, 고층차 중의 법을 모르기 때문에 수련하는 법이 없으며 안으로 수련하지 않고 씬씽(心性)을 수련하지 않으므로 공이 자라지 못한다. 바로 이 두 가지 원인이다.”(《전법륜》)

“법은 일체 집착을 타파(破)할 수 있고 法은 일체 사악한 것을 타파할 수 있으며 法은 일체 거짓말을 제거해 버릴 수 있고 법은 정념(正念)을 확고하게 할 수 있다.” (《교란을 배제하자(排除干擾)》)

대법제자가 수련 중에서 잘하지 못했다면 틀림없이 법학습을 잘하지 못한 것이다. 법리가 명백하지 못하고서야 어찌 안을 향해 찾을 수 있겠는가? 나는 일하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조용히 법을 잘 학습하리라 마음먹었다.

며칠 전 법공부를 할 때 갑자기 사부님께서 하신 한 단락 말씀이 새롭게 느껴지면서 깨닫는 것이 있었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다른 공간의 일체는 모두 생명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업 역시 마찬가지이다. 사람이 정법을 수련하려면 곧 소업(消業) 해야 한다. 소업은 바로 업을 소멸하고 전화시키는 것이다. 당연히 업력은 말을 듣지 않아 사람에게는 곧 난이 있고 장애가 있게 된다.” (《전법륜》)

나는 업(業)이라는 그것이 살아있는 것으로 ‘주동적’으로 당신의 수련의 길을 가로막기 때문에 우리가 제고하기가 그처럼 어렵고 또 어렵다는 것을 똑똑히 알게 되었다. 그런 업력과 낡은 세력의 층층요소, 그것들은 다른 공간에서 우리들의 집착과 약점을 똑똑히 볼 수 있다. 그것들은 살아있기 때문에 그것들끼리 연합하여 우리가 세 가지 일을 하는 것을 가로 막는데 특히 우리가 법공부하는 것을 교란한다. 왜냐하면 진정으로 법을 잘 학습하면 사람은 곧 갈수록 많은 법리를 똑똑히 알게 되고 자신의 몸에 존재하는 집착심과 변이된 관념을 똑똑히 알게 되며 그것들을 확실히 인식하고 그것들을 제거하기 때문이다. 또한 ‘수련은 자신에게 달렸고 공은 사부에게 달렸기에’ 사부님의 법신도 우리를 도와 이러한 쓰레기들과 좋지 않은 것들을 깨끗이 제거해줄 것인바 그런 업력들은 당연히 그렇게 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때문에 그것들은 목숨을 걸고 우리에게 장애를 설치할 것이다.

우리가 아래로 한 층 한 층 걸어내려 온 과정을 생각해보면 매 층의 ‘껍데기’에는 모두 그 한 층의 이치와 좋지 않은 것들을 포함하고 있지 않겠는가? 제일 낮은 층인 ‘사람’ 여기에 오게 되면 변이된 관념과 부패한 사상들이 많이 쌓였을 것이며 과정도 길다. 그것은 정말이지 업이 구르고 구른 것으로 신체 주위와 자신의 공간 마당에 모두 이러한 쓰레기들과 업력 마당으로 충만 되어 있다. 만약 사존(師尊)의 자비하신 구도가 없었다면 우리는 돌아갈 희망이 아예 없는 것이다. 지금 대법의 가르침과 인도가 있기에 우리는 한 층 한 층 ‘위로 올라’ 가고자 생각하고 있는바 우리는 ‘반드시 속인(常人)의 관념을 근본적으로 개변해야 한다.’ 층층의 변이된 관념과 이치를 수련해버리고 업력을 없애버려야만 우리는 비로소 승화할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그 한 층을 돌파한 것이다.

때문에 마음을 조용히 하고 법공부를 하는 것이 관건이다. 오직 법리를 똑똑히 깨달아야만 비로소 안을 향해 찾을 수 있다. 대법을 가늠하는 표준으로 삼는다면 어느 집착심이든 숨을 수 없을 것이다. 이 도리를 똑똑히 알고 나서 나는 ‘내가 법공부를 했다.’는 그런 임무를 완성하려는 마음이 더는 있지 않고 법에 동화하여 자신의 견정한 일념을 바로 잡으면서 문제에 부딪히면 안을 향해 찾았다. 나는 과거처럼 그것에 의해 움직이지 않았고 도리어 조용히 하면서 자신이 무엇 때문에 괴로워하는지 분석해 보았다. 한 가지 일을 생각하면서 잘못하면 개인의 이익에 손실이 갈까 봐 두려웠고 또 동수 사이에 약간의 오해가 있을까 두려웠다. 사실 이런 일을 어떻게 대하며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는 법속에 모두 설명이 있다. 그렇다면 나는 왜 여전히 괴로운가? 그 위사위아(爲私爲我)하고 자아에 집착하는 마음을 건드린 것이 아닌가? 이 모두는 수련 중에서 반드시 제거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만약 느슨히 하거나 마비되고 태만하여 일을 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수련을 대한다면 진정으로 안을 향해 수련하고 안을 향해 찾지 못한 것으로 이런 좋지 않은 마음들이 저절로 소실되지는 않을 것이다.

오늘 아침 정공(靜功)을 할 때 나는 또 이러했다. 각종 염두가 마치 주마등처럼 이것이 오고 저것이 가고 하면서 매우 복잡했다. 무엇 때문에 이럴 수 있는가? 나는 갑자기 의식했다. 사실 모든 염두는 모두 ‘자아(自我)’라는 이 주제를 가지고 에워싸고 있는데 나도 이러한 염두가 내가 아님을 알고 있다. 그것이 내 대뇌의 통제를 받지 않는데 그것이 나일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것들은 손을 흔든다고 해서 쉽게 가지는 않는다. 깊이 생각해보니 나는 좀 명백해졌다. 그것들은 모두 나의 집착에 영합하여 온 것으로 후천적으로 형성된 ‘자아’라는 그 관념이 매우 애용하는 것으로 그것들을 원하기 때문에 그것들이 장기간 ‘합법(合法)’적으로 거기에 존재해왔다는 것을.

나도 그것들이 살아있는 이상 그것들이 꼭 ‘활동’하려 한다는 것을 인식했다. 한편으로 그것들은 ‘당신의 ‘소원(願望)’을 만족시켜 준다‘는 명분으로 우리들의 사상에 달라붙어 교란하고 기만하면서 사람의 주사상(主思想)을 대체하여 그것들이 장기적으로 남으려는 목적에 도달하려는 것이다. 다른 한편 그것들은 천방백계로 내가 우주 대법에 동화하는 것을 단절시켜 나로 하여금 졸리고 주의력이 분산되게 한다. 법공부, 연공, 발정념을 할 때 조금 있으면 이 생각이 나왔다가 곧 다시 다른 생각이 들어와 나로 하여금 ‘청정심’을 가지기 힘들게 한다. 그것들은 또 안팎으로 서로 호응하기도 한다. 사악이 무엇 때문에 우리를 박해할 수 있는가? 우리가 이런 것들을 불러들인 것이 아닌가? 중국 백성들 사이에 이런 속담이 있다. “집안에 도둑이 없으면 밖에 있는 귀신을 끌어들일 수 없다.” 때문에 우리는 외재적인 사악의 요소를 청리하는 것을 중시해야 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이와 같은 집안 도둑 청리도 중시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중에서도 매우 큰 하나의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사부님께서는 우리 대법제자 매 사람은 모두 매우 큰 우주 범위와 대응되어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우리가 자신을 잘 수련하고 자신 공간장(空間場) 중의 사악한 요소를 깨끗이 제거하는 것은 매우 큰 우주 천체가 모두 ‘천청체투(天淸体透)’하는 것이 아닌가? 중생들이 모두 바르게 돌아오게 하는 것이 아닌가? 만약 우리 대법제자들이 다 자신을 잘 수련한다면 정(正)의 요소가 상당히 강해질 것이다.

나와 일부 동수들과 진상을 알리는 과정 중에 때로 신심이 부족하다고 이야기 했다. 무엇 때문인가? 이 사악한 당이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는 표현은, 표면상으로 볼 때 아직도 매우 창궐하여 동수들이 중생을 구도하는 과정 중에 끊임없이 박해 받거나 체포되는 일이 존재했다. 신문, TV 방송은 아직도 사악이 조종하고 통제하는 소리로 가득 차 있다. 매우 많은 중생들은 마비되어 사악의 통제에 순종하면서 대법 진상을 듣지 않는다. 정의의 힘은 표면상에서 볼 때 표현됨이 부족하지만 사실 참답게 자신을 되돌아보며 자기 사상 중의 나쁜 염두, 좋지 않은 관념, 일사일념(一思一念) 중에 반영되어 나오는 사람의 변이되고 부패한 이치, 때때로 정념이 주도적인 표현을 차지할 수 없는 것은 이런 외재 환경의 반영과 유사한 것이 아닌가?

만약 신체 중의 매 세포의 미립자가 모두 자신의 형상과 같다면 지금 이 외재적인 형세의 표상은 우리 매 대법제자들이 자신을 잘 수련하지 못한 요소가 그 안에 있는 것이 아닌가? 박해받은 지 7, 8년이 되었다. 압력 중에서, 고통 중에서 매우 많은 동수들은 모두 법정인간의 도래를 기다리고 있다. 사실 법정인간이 어느 때 도래할지 물을 필요가 없다. 우리 자신을 보면 곧 알 수 있다. 우리의 정념이 이미 일마다 모두 자신을 주도 하는가? 좋지 않은 의념이 층층마다 청리되었는가? 우리의 일사일념이 이미 우리에 대한 대법의 요구 표준에 부합했는가? 만약 모두 할 수 있다면 그럼 내 생각에 곧 법정인간이 도래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이해한 안을 향해 수련하고 안을 향해 찾는 것의 또 다른 한 가지 함의이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어떤 관념도 형성되지 않고 문제를 봄에 있어서 모두 자신의 선량한 본성의 견해. 진정한 자신의 견해가 있다면 자비로움으로 이런 일을 결정하게 된다. 당신 자신이 자기를 더욱 나타낼 때에 당신의 사상은 더욱 높으며 더욱 귀진(歸眞)한 것이며 당신의 선천적인 선량한 본성의 경계를 더욱 갖고 있게 된다.” (《불성》)

나는 이 단락의 설법이 곧 우리가 마땅히 도달해야할 표준에 대한 요구라고 생각한다. 또 이러한 요구에 도달하려면 오직 마음을 조용히 하고 법공부를 해야만 해낼 수 있다. 왜냐하면 마음이 조용하지 않으면 법리를 보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법공부를 할 때 법의 높은 층차의 내포를 보아내지 못하면 그것은 곧 고층차 중의 법리를 모르기에 수련할 방법이 없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무엇 때문에 안을 향해 찾을 수 없는가? 비록 사악한 요소의 교란과 방해가 있지만 이 역시 법리가 명확하지 못하여 똑똑히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때문에 내가 생각하건데, 진정 내심으로부터 이 만고의 기연을 소중히 여긴다면, 견정하게 사부님을 믿고 법을 믿고 일체를 돌파하는 강대한 정념이 있다면, 법공부 중에서 우리는 마음을 조용히 할 수 있으며 그러한 장애와 교란은 모두 대법제자의 정념에 의해 청리될 것이다.

업력이란 속인 속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그것은 그리 미시적인 데에 도달하지 못한다. 오직 대법제자들의 집착이 없고 누락이 없는 정념이 나오기만 하면 일체는 모두 대법제자의 정념에 의해 개변될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법공부의 중요성을 알려 주셨다. 우리 매 대법제자들은 모두 정진하며 법공부를 잘 하고 안을 향해 수련하고 안을 향해 찾아 끊임없이 자신의 상태를 순정하게 하는 과정에서 ‘세 가지 일’을 잘하여 진정으로 대법제자의 사명을 완성해야 한다.

이상은 개인의 체득이다. 옳지 못한 점이 있다면 동수들의 자비로운 시정을 바란다.

문장발표 : 2007년 2월 5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원문위치 : http://minghui.org/mh/articles/2007/2/5/148274p.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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