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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 동수들의 손을 잡고 나란히 사부님을 따라 행하자

글/ 창춘(長春) 대법제자

【명혜망 2007년 1월 21일】 “혹은 도시에서 컴퓨터 기술을 아는 동수들이 농촌에 와서 농촌 동수들이 자료점을 세울 수 있도록 협조해주고 대법 자료점이 도시에서 농촌까지 전면적으로 꽃이 피게끔 하는 것이 정법 최후에 가장 좋은 선택이다. …중략…. 우리가 손을 잡고 함께 행동하여 함께 매 한 걸음을 잘 걷고 바르게 걷길 바라며 사부님의 가르침에 따라 원만할 때까지 공동으로 제고하기 바란다.”

이 두 구절은 《명혜주간》 제262호에서 헤이룽장 대법제자가 《농촌 동수들은 당신들의 도움이 시급히 필요하다》에서 쓴 것이다. 이 문장에서 나는 이 농촌 동수의 시급하고 또한 희망에 가득 차서 도시 동수들의 도움을 얻으려는 진솔한 심정을 느낄 수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나는 며칠 전에 부딪힌 일을 연상하게 됐는데 농촌 동수들의 손을 잡고 같이 대법을 실증하는 최후의 길을 잘 걸어가는 것의 중요성을 내심으로부터 느낄 수 있었다.

신년(新年) 전에 바쁜 관계로 고향에 돌아가 어머님을 뵙지 못했다. 며칠 전에야 시간을 내서 한 시간 넘게 차를 타고 창춘에서 5,60리 정도 떨어진 시골집을 가게 되었다. 일찍이 형제들로부터 이 마을에도 대법제자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늘 바삐 오가느라 만나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왠지 수련생을 만나고 싶었다. 그리하여 남동생에게 전화를 해서 그녀를 찾아 달라고 부탁했다. 가족들의 말에 의하면 그녀는 외출해서 언제 들어올지 모른다고 했다. 당시 마음속으로 왜 교란이 이렇게 심할까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발정념으로 교란을 제거했고 또 오늘 저녁에 남아서 그를 기다리기로 결정했다. 정념이 강해지자 상황은 바로 좋게 변했다.

막 식사를 마치자마자 그녀가 왔다. 그녀의 옷은 소박했고 상태는 매우 좋아보였다. 수련생을 만나니 더욱 친밀한 느낌이 들었고 교류 중에서 나는 그녀의 많은 정황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98년에 법을 얻었고 친정에는 대법을 수련하는 사람이 많으며 자기 자매 중에도 몇이 수련하고 있고 게다가 매우 정진한다고 했다. 99년 사악이 탄압을 한 후에도 수련을 포기하지 않았다. 2000년에 동수와 북경으로 법을 실증하러 갔는데 북경에 도착하기 전에 납치되어 3년 노동교양을 받았다고 했다. 나중에 가족들이 석방에 힘써 기한을 1년 앞당겨 나오면서 사악에게 2만 위안을 강탈당했다고 한다. 농촌에서 2만 위안이면 몇 년 동안 농사를 해도 벌수 없는 큰 금액이었다. 노교소를 나온 지 3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빌린 돈을 다 갚지 못해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의 땅을 사서 농사를 많이 지어 갚아야 했다. 게다가 그녀의 남편(속인)은 지금까지도 이 돈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시종 대법을 확고히 수련했고 처음 걸어 나올 때 남편은 그녀더러 대법을 포기하라고 압력을 가했고 다시 납치될까 봐 두려워했다. 남편은 그녀를 때리고 욕을 했고 또 모든 대법서적을 태우고 그녀와 이혼하자고 했다. 그녀는 “(당신이) 아무리 해도 소용없어요. 설령 돌아가신 친정 엄마가 살아난다 해도 다 소용없어요.”라고 말했다. 이렇게 하자 남편도 더 이상 그녀를 상관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책은 모두 없어졌고 지금까지도 완전하지 못했다. 평상시에도 자료를 제때에 볼 수 없었고 때로는 십여 리 혹은 몇십 리 떨어진 곳에 있는 동수한테 가서 가져온다고 했다. 그리고 사부님께서 2000년부터 2002년까지 하신 설법을 지금까지 구하지 못했으며 그중에서 오직 《북미순회설법》만을 한 번 보았으며 신경문 《사악을 철저히 해체하자》와 《중생들의 문안에 감사를》도 없다고 했다.

나는 당시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서 마음이 몹시 괴로웠다. 사부님께서 3년 동안 하신 많은 설법을 지금까지 보지 못했으니 이것이 얼마나 큰 손실인가? 나는 정말 후회했다. 왜 일찍이 그녀를 접촉하지 않았단 말인가? 그리하여 나는 곧 집에 돌아가 그녀에게 없는 사부님의 모든 설법을 보내주었다. 동시에 나는 그녀에게 《9평 공산당》, 《당문화 만담 시리즈》, 《온 세상이 대법이 널리 전해짐을 경축》과 《사부님과 함께한 날들》 등 VCD를 주었다. 그녀는 매우 기뻐하면서 당시 바로 우리(어머님도 있었다)와 같이 사부님의 《북미순회설법》을 학습했는데 우리는 단체 법공부의 기쁨을 공동으로 느낄 수 있었다. 유감인 것은 그녀의 집에는 장비가 없어서 내가 준 VCD를 보지 못했으며 생활 형편이 여의치 못했다. 이것은 나로 하여금 농촌 동수들이 법을 실증하는데 있어 어려움과 그들이 치른 대가를 직접 볼 수 있게 했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자신이 이번에 고향에 간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되었으며 내가 본 것은 절대 우연이 아니었고 모두 사부님께서 배치하신 것이었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당신이 접촉하는 직장환경, 가정환경 그건 모두 당신의 수련환경이며 대면해야 하고 모두 반드시 당신이 걸어야 할 길이다. 반드시 정확히 대면해야 한다. 어느 한 가지도 대충 얼버무릴 수 없다.”(《2006년 캐나다 설법》) 그렇다. 이런 환경에서 이런 때 이 수련생을 만나 이런 일에 부딪힌 것은 바로 내가 수련해야 할 부분이고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이 아니겠는가? 더욱 많은 세인을 구도하자면 더욱 많은 동수들을 잡아주어야 하며 여러 방면에서 그들이 법을 실증하는 곤난을 극복하도록 도와주면서 공동으로 정법노정을 따라가야 한다. 나는 비록 이미 몇 십 명 자료점의 책임을 짊어지고 있고 1년에 약 몇만 위안의 자금을 소비하고 있지만 되도록 가능한 정황에서 그들을 돕고자 한다.

오늘 이 동수의 문장을 보고 농촌 동수들을 돕는 것의 시급한 중요성과 광범위하게 중생을 구도해야 하며 농촌이라는 법을 실증하는 큰 무대가 더욱 중요하며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가 농촌 동수들의 손을 잡고 농촌과 도시가 협력하여 법을 실증하는 최후의 길에서 나란히 사부님을 따라 행할 것을 희망한다!

문장발표: 2007년 1월 23일
문장분류: 【수련마당】
원문위치: http://minghui.ca/mh/articles/2007/1/21/14732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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