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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을 비기고 수련을 비긴다”에 대한 나의 이해

글/대륙 대법제자

[명혜망2006년12월8일] 오늘 아침 《명혜주간》에서 정리한 “제3기 대륙 대법제자 수련 심득 교류 대회” 발언고를 보았을 때 나자신에게서 언제나 검증하는 것을 즐긴다는 것을 발견했다. 다른 수련생이 일하는 방법과 나를 대비하여 나 또한 응당 어떠어떠해야 한다고 여기면서 마치 나에게 스스로 일을 배치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것은 이미 법에서 빗나갔다는 것을 좀더 일찍 느끼지 못했다. “배움을 비기고 수련을 비긴다”는 그대로 옮겨 베끼는 것이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정법 가운데 사부님께서 일체를 장악하고 계시며, 어떠한 변화든 모두 정법의 수요에 의거하여 진행하기 때문에 오직 사부님께서만 어떻게 배치하고 어떻게 할 것인가를 알고 계신 것이다. 나 자신이 여기에서 앞으로 어떠어떠하게 하려 생각하는 것은 ‘자심생마’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닌가? 낡은 세력에 대해서 우리는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있는바, 곧 도태될 생명으로서 정법을 좌우지 할 그 어떤 자격도 없으며, 또한 조사정법하고 있는 대법도의 발걸음에도 그 어떠한 영향도 주지 못한다.

허다한 동수들이 부동한 사악과 압력에 직면하였을 때 응당 똑똑히 알아야 할 것은 그들이 능히 정념정행으로 걸어 올 수 있는 것은 사부님께서 이끌어 주심에 의지하었고, 법에 대한 자신의 정신정념에 의지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우리 모두가 다른 동수들이 겪어온 일체 경력을 모두 겪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왜냐하면 수련은 바람따라 차 가는 식으로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다른 동수들이 짠지에 찐빵을 먹으면서 지내온 경력을 보고 아주 감동하였다. 그리하여 사상 중에 만약 내가 그런 상황이었다면 나는 어떻게 했겠는가 하는 생각이 났다. 그때 갑자기 나는 아니다 하는 느낌이 들었다. 정법 수련은 매 사람마다 부동한 길이 있다. 그러한 생각자체가 낡은 세력의 배치에 부합 되는 것인데, 그렇게 생각한다면 어찌 낡은 세력을 부정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하는 것은 우주 중에서 가장 올바른 일이다. 수련생이 받은 박해는 낡은 세력이 억지로 가한 것이지만 수련생은 여러 가지 박해를 모두 부정하고, 각자 대법을 실증하는 길에서 걸어가고 있다. 그들이 그렇게 한 것은 그들이 음식에 대하여 집착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그들은 더욱 많은 시간과 정력으로 대법제자가 해야 할 세 가지 일을 하길 바래서이지, 그들이 응당 짠지와 찐빵을 먹어야 된다는 것은 아닌 것이다.

어떤 동수들이 박해로 인해 가족이 흩어진 것을 보았을 때, 나는 갓 결혼하여 평소에 일상적인 작은 일에서 수련과 가정과의 관계를 잘 처리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사악의 박해로 이혼하는 어떤 수련생을 보게 되면 바르지 못한 염두가 튕겨 나오긴 하지만, 그래도 그런 경우 다행히도 사부님께서 《전법륜》 제 4 강의에서 하신 말씀이 떠오른다.

“어떤 사람은 연공 때문에 부부가 이혼까지 하려 한다. 많은 사람은 왜 이런 정황이 나타날 수 있는가를 생각해보지 않는다. 그 후에 당신이 그에게 ‘내가 연공을 하면 왜 당신은 그렇게 크게 화를 냈나요? ‘라고 그에게 물으면, 그는 할 말이 없다. 정말로 할 말이 없어 한다. ‘그래요, 나도 그렇게 크게 화를 내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때는 그렇게 크게 화를 냈었어요’ 라고 한다. 기실 어찌된 영문인가? 연공하는 동시에 업력을 전화하게 되는즉, 잃지 않는 자는 얻지 못하는 것이라, 잃는 것 또한 나쁜 것으로 당신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

이를 통하여 나는 깨닫게 되었다. 머리속에 바르지 못한 염두가 있는 것도 실제로는 낡은 세력의 일종 박해이다. 이런 정신적 박해는 우리가 더욱 쉽게 홀시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정신과 물질은 일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점을 인식한 후에는 자신의 일사일념으로 사악을 제거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늘 소극적인 방면으로 문제를 사고한다면 없는 일도 낡은 세력은 구실을 대여 연화해 낼 것이며, 이 모양대로라면 그것들은 더구나 구실을 댈 것이다. 그러므로 배움을 비기고 수련을 비길 때 비기는 것은 법리상의 명확함이지 마난을 받고 있는 것을 비기는 것이 아니다. 이 한 집착을 똑똑히 인식한 후 마찬가지로 수련하는 가운데 훌륭하게 한 동수에 대하여 “영웅식”으로 숭배하는 심태도 제거해 버려야 한다.

매 개 대법제자의 수련 형식은 같지 않다. 사부님께서는 최근의 몇 편 경문에서 모두 수련 형식에 대해 강조 하셨다.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재삼 강조하신 것은 지금 우리가 응당 해야 할 일을 잘해야 하는데, 어떠한 본보기와 참조도 없이 다만 법을 스승으로 자신의 길을 걸어 가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라고 나는 깨달았다. 뿐만 아니라 사부님께서는 《미국 서부 국제 법회》중에서 말씀 하셨다.

”특히 대법수련은 세속을 떠나지 않고 수련을 하며, 각 사회 계층에 모두 제자가 있는데 어떻게 모든 제자와 같을 수 있겠는가? 또한 왜 기어코 업력이 가장 크거나 가장 곤란한 수련생과 똑 같이 생활해야 한단 말인가? “

그렇다. 우리는 대법을 위하여, 중생을 위하여 일체를 버릴 수 있는 흉금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일체를 잃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일체는 사부님께서 장악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사부님께서는 일찍부터 설법에서 강조하셨다. 법을 배워야지 사람을 배우지 말아야 한다고. 오늘 수련 체험을 쓰면서 나는 더욱 똑똑하게 수련에서의 이 한 부족한 점을 인식하게 되었는데 나는 꼭 잘 할 수 있을 것이다.

수련 체험을 쓰기 전에 허다한 대법제자들이 쓴 훌륭한 문장과, 그들이 아주 잘한 것을 보고 자비감을 가진 심태가 있었으나, 나는 그래도 그것을 극복하고 근간의 수련 체험을 써 내었다. 우리는 부동한 정법수련의 길을 걷는 대법제자이기 때문에 매 어느 한 동수의 체험은 바로 정법의 한 방면의 체현일 수 있는 것이다.

부족한 곳은 동수들께서 자비로 바로 잡아 주기 바란다

문장발표 : 2006년12월8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문장위치 : http://search.minghui.org/mh/articles/2006/12/8/14424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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