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ㅡ언제든지 박해를 철저히 끝내는 날이 될 수 있다
글/징위안(靜遠)
【명혜망 2006년 11월 26일】 한 달 전 오늘, 사부님께서는 《사악을 철저히 해체하자》란 신경문을 발표하셨다. 이로 말미암아 나는 또 다시 여러 차례 고려하고 있던 하나의 문제를 생각하게 되었다. 정법 가운데서 대법제자는 아예 박해를 받지 말아야 하며, 이번 박해는 더욱이 이렇게 여러 해 지속되지 말았어야 한다. 이것은 단지 신앙에는 죄가 없고 수련에는 죄가 없다는 문제뿐만이 아니다.ㅡ 이것은 속인 층차에서 하는 말이다.
수련의 각도에서 본다면 더욱 이러하다. 만약 우리가 정체적으로 진정 수련인에 대한 법의 기본 요구에 도달했다면 이번 박해는 전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며 설사 발생했다 하더라도 만약 우리가 즉각 자신을 조절하고 법의 요구에 도달했더라면 이번 박해는 일찍이 결속되었을 것이다. 7년 동안, 박해가 철저히 결속될 수 있는 기회가 이미 여러 차례 있었지만 매번 우리가 정체적으로 제대로 해내지 못했기 때문에 낡은 세력이 틈을 탈 기회를 주어 박해가 지속되도록 했던 것이다.
나는 또 한 가지 현상을 보았다. 7년의 박해는 아주 많은 수련생들의 머릿속에 하나의 인상을 조성했다. 박해는 이미 일종 방대한 객관적인 존재로 되었고 박해를 결속짓는 것은 우리 매 수련인의 힘으로는 미칠 수 없는 일이라고 여긴다. 그리하여 반박해(反迫害) 역시 우리 일상 수련중에서 불가피하게 받아들여야 할 ‘자연’적인 조성부분이 되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새로운 관념이지 정념이 강한 표현이 아니며, 박해가 인간 세상에서 한 해 또 한 해 연속될 수 있는 원인이 되었고 우리가 박해를 주동적으로 결속할 수 있은 기회를 한 번 또 한 번 잃게 된 주요 원인 중의 하나이다.
첫 번째 문제 : 속인 이 층의 이치로 볼 때 우리는 眞善忍을 추구하기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고 하는데 이는 절대적으로 무고한 것이다. 하지만 수련의 고층 이치로 볼 때 우리 매 사람은 정말로 완전히 ‘무고(無辜 역주: 허물이 없다는 의미)’한가?
사실 우리 많은 사람들은 수련에서 성숙하지 못하고 진정으로 법에서 빨리 제고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악이 틈을 타게 되었고 이번 박해를 발동했을 뿐만 아니라 박해가 오늘까지 지속될 수 있게 된 원인의 하나이다. 비록 이것은 수련의 문제이며 아울러 우리 모두는 사부님께서 관할하시어 낡은 세력 및 그것이 배치한 사악한 생명이 간섭할 자격이 없긴 하지만 필경은 우리가 법에서 성숙하지 못한 것이 그것들이 박해를 발동하고 유지할 수 있는 구실로 되었고, 사부님의 정법에 보다 많은 번거로움과 어려움을 주게 된 것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만약 1999년 ‘4.25’때 1억 대법제자 중 적어도 절반 이상이 대법을 수련하는 제자의 법을 수호하는 책임(천직)을 인식할 수 있고 모두 청성하게 일어나 법을 수호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더라면, 단지 만여 명의 대법제자들만이 북경으로 상소하러 가지는 않았을 것이며, ‘4.25’는 박해가 형성되기 전에 박해를 해체시킨 역사적인 기념일로 되었을 것이다.
만약 99년 ‘7.20’과 ‘7.20’이후 그 한두 달 사이에 대법제자가 청성하고 무사(無私)하게 일어나 진상을 알리고 법을 수호하는 것을 첫 번째 임무로 여기고 개인의 원만을 추구하기 위해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면, 또한 많은 사람들이 순풍차(順風車 역주: 직역하면 순풍에 따라 움직이는 차라는 의미로 형세나 시류가 좋을 때를 틈 타 동승하는 것을 말함.) 타기를 기다리지 않았더라면(다른 사람들이 일어나기를 기다린 후에야 자신도 뒤따라 일어났다), 많은 사람들이 세간의 명리정(名利情)을 위하여 두려운 마음에 얽매임이 없었다면, 수많은 대법제자들이 그 속인 총리에게 의지하여 우리를 위해 박해를 끝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없었더라면, 한 무리 수련생들이 자신을 수호하기 위해 가짜 경문을 퍼뜨리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많은 대륙 수련생들이 문자 유희를 하는 것처럼 엄숙하지 못한 심태로 사악에게 연공하지 않겠다는 ‘보증서’를 쓰지 않았더라면, 그렇다면 속인 정부 중의 장(江) 마두가 단숨에 압도적으로 사악한 세력을 형성하지 못했을 것이며 “석달 안에 박해를 결속”짓는 것이 이치에 따라 순조롭게 되었을 것이다.
만약 2000년 5월 22일 사부님께서 《심자명》이란 시를 발표하신 후 대법제자가 정말로 즉각 억만 돛을 날리며 “대법을 견정히 수련하고 사부님을 바싹 따랐다면”(《심자명》), 만약 2000년 6월 16일 사부님께서 《원만을 향해 나아가자》를 발표하신 후 자신이 돛을 올리는 저애력을 느낀 대법제자들이 자신의 근본 집착을 즉각 찾아내고 내려놓을 수 있었다면, 만약 2001년 5월 명혜 편집부에서 사부님의 배치에 따라 《발정념》이란 문장을 발표한 후 대법제자 주체가 즉각적으로 발정념을 중시하여 날마다 발정념을 잘했더라면, 만약 1999년 이래 사부님께서 발표하신 130여 편의 설법, 시가, 단문, 축사 중에서 우리 대법제자 정체중의 매 제자가 제출한 문제에 대해 우리 모두 아주 빨리 정시하고 바로잡았더라면, 우리에게 반드시 잘해야 한다고 경고하신 일들을 우리가 모두 사부님의 말씀에 따라 태만함이 없이 했었더라면, 만약 사악이 대법제자 생체에서 장기를 적출한 죄악이 폭로된 후 대법제자 정체적으로 두려운 마음, 의혹과 방황이 그렇게 오랜 시간 가로 막지 않고, 박해를 폭로하는 힘을 강화하여 시기를 틀어쥐고 이전의 진상 알리기에서 마주쳤던 장애와 난관을 돌파했었더라면, 만약 우리가 박해를 철저히 결속 짓는 일을 사부님의 일로, 속인 속의 명인의 일로, 기타 대법제자의 일로, 아직 정법노정을 따라오지 못하는 동수들의 일로 여기지 않았다면 그러면 우리는 정말로 모두 자신이 무고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못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그렇게 무고하지 못하다. 우리는 박해가 오늘까지 지속될 수 있다는 이 일에 대해 모두 책임이 있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질책하려는 것이 아니다. 과거를 돌이켜 보는 것은 현재의 일과 앞으로의 일을 더 잘하기 위해서이며, 인식상의 부족을 될수록 빨리 없애고 법의 요구에 도달하기 위해서이다.
기왕에 모두에게 책임이 있으니 더욱 소홀히 할 수 없다. 적지 않은 동수들이 몇 년 동안 일을 하고는 나태해졌는데 나 자신에게도 이런 문제가 존재한 적이 있다. 나는 해외 수련생이다. 99년 ‘7.20’전부터 날마다 큰 면적으로 진상을 알리기 위해 대량의 일을 했는데 온갖 어려움을 겪으면서 몇 년을 지냈고 오랫동안 휴일이라고는 없었다. 한 밤 3시전에 잠을 자 본 적이 극히 드물다. 최근에 와서 좀 늘긴 했지만 마땅히 아주 노력하는 축에 속해 있었다. 하지만 거의 일 년 동안 스스로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시종 피로와 소극적인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감을 느꼈다. 사부님의 경문 《최후일수록 더욱 정진해야 한다》가 발표 된 후에야 매우 큰 진감(震撼)을 받았고, 자신이 여러 해 동안 일부 방면에서 법의 요구에 도달하지 못한 원인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자신을 더욱 빨리 법의 요구에 도달하게 할 수 있는가에 대해 사로(思路)가 더욱 똑똑해졌으며 매일의 일언일행(一言一行)이 더욱 법속에 용해됨을 느낄 수 있었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수련이란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하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 여기거나, 혹은 이미 아주 노력했고 상당히 제고되었다고 여기거나 혹은 자신이 어느 정도로만 수련되면 그만이라고 여기면서 더 높은 것을 바라지 않거나, 혹은 이 집착은 긴요하지 않으며, 저 관념은 큰일에 영향이 없다는 등등. 이런 것들은 모두 사람 마음으로 수련을 대하는 것으로 ‘당연시’ 하는 것이다. 수련인은 매 시각마다 수련인에 대한 법의 중요성을 명백히 알아야 하며 심령(心靈) 속에서 법에 대해 겸허하고 공손하며 조용히 들어야 하며 법공부에 정진함을 유지해야만 비로소 끊임없이 배워낼 수 있고 비로소 끊임없이 자신의 집착을 인식할 수 있으며 비로소 속인의 관념과 가상에 막히지 않고 법리상에서 승화할 수 있다. 사실 자신이 나태하고 오성이 나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도리어 속인 가운데 가정의 영향으로 인해 진지하게 일을 하고, 부지런히 사고하며, 남을 먼저 배려하고 자신을 뒤로 하며, 천하를 앞세우며 자신의 집을 뒤로 하는 사람이 되었다. 다만 속인 중에서 좋은 것을 법이 요구하는 좋은 것과 함께 논할 수는 없으며 격차가 너무나도 멀고 순정(純淨)한 정도 역시 차이가 너무나 먼 것이다,
사부님께서 《최후일수록 더욱 정진하자》를 발표하신 후 한 동안을 경과하면서 나는 원래 발견하지 못했던, 틀린 관점을 버릴 수 있게 되었다. 바로 오래고 먼 역사적인 전생(轉生)과정중에 일부 정(正)과 부(負)의 일들이 가져온 집착과 영향을 포함하여 비로소 진정으로 원용할 수 있는 사고와 일을 행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으며, 더욱이 사부님 정법의 수요와 자신에 대한 법의 요구를 더욱 체험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따라 우리가 과거에 수련한 것과 한 일이 얼마나 제대로 하지 못했으며, 현재 정법이 우리에게 필요로 하는 많은 일들이 제대로 소통되지 못했으며 때문에 지금의 매 하루가 아주 긴박하다는 것을 점점 더 명백히 알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날마다 법공부를 잘하고 자신을 잘 수련하며 세 가지 일을 잘해야 할 뿐만 아니라 또 다른 동수들을 잘 도와주어야 한다. 왜냐면 우리는 하나의 정체(整體)이며, 모두 사부님께서 정법하는 시기에 법을 얻은 생명이기 때문이다. 우주 중에서는 우리를 이렇게 보고 있다. 수련은 누구도 누구를 대표할 수 없으며, 누구도 누구를 대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수련인 정체에 법의 요구가 있다. 만약 ‘4.25’ 때 만 명의 상소가 여러 사람을 대표할 수 있었더라면 그러면 ‘7.20’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낡은 세력은 우리 정체의 틈을 뚫지 못했을 것이다) 정체적인 틈은 일정한 수의 개체들이 일부 문제에서 장기간 제고하지 못해 조성된 것이다.
두 번째 문제 : 사악을 철저히 해체하는 것은 수련인에 대한 법의 요구가 너무 높은 것이 아닌가?
아니다. 수련인에 대한 대법의 요구는 확실히 아주 높다. 우리가 ‘무사무아(無私無我), 선타후아(先他後我)의 정각(正覺)’으로 수련성취 할 것을 요구하며, 속인 속에서 수련하는 우리 이런 생명들더러 자신을 잘 수련해야 할뿐만 아니라 가급적 중생을 보다 많이 구도하라고 요구한다. 이는 쉽사리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며, 착실하게 수련해야만 표준에 도달할 수 있다. 동시에 법은 부동한 층차에 부동한 요구가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매 대법제자가 가는 경지가 부동하여 어느 층차로부터 말한다면 ‘왔던 곳으로 되돌아간다(歸去來處)’고 형용 할 수 있다(물론 낡은 우주로 돌아간다는 말이 아니며 단지 층차를 형용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수련의 길이 부동하고 매 대법제자에 대한 법의 요구도 높낮이가 다르다. 하지만 수련인에 대한 법의 기본 요구는 우리 매 대법제자마다 모두 반드시 도달해야 한다. 특히 박해가 발생한 후 비록 박해를 결속 지으려고 생각하지만 반드시 박해가 발생하기 전보다 표준은 더욱 높아야 하고 더욱 잘해야 한다.
예를 들면, 개인의 체험인데. ‘4.25’전에, 만약 대법제자의 주체가 병업(病業) 문제에 대해 청성한 인식이 있었다면 그 건달과학자들이 이 문제에서 크게 떠들어 대지 못했을 것이고 건달과학자들이 만들어낸 거짓말이 나왔을 때도 우리는 스스로 청성한 인식이 있어야 했을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사람들에게 그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방식으로 이 문제를 똑똑히 알려주었어야 했다. 이 요구는 바로 틈을 타기 전보다 좀 높아야 한다. 만약 대법제자 주체가 당문화(黨文化)와 무신론의 영향을 그리 엄중하게 받지 않았다면 어떠한 상황 하에서든 모두 명리정(名利情)을 내려놓을 수 있고, 대법과 대법수련을 마땅히 놓아야 할 신성하고 숭고한 위치에 놓을 수 있으며, 아울러 이성적이고 심오하지만 쉬운 언어로 홍법하여 사악이 우리의 집착과 누락을 이용해 상응하는 거짓말을 만들어 중생을 독해할 방법이 없게 했어야 했다. 이번 박해는 사람이 사람에 대한 박해가 아니고 다른 공간의 사악이 속인 가운데서 수련하는 사람을 겨냥하여 하는 박해이다. 이 방면의 박해가 이미 발생한 이상, 우리는 과학과 수련의 관계를 바로 놓아야 할 뿐만 아니라 속인 중의 명리정과 대법의 위치 관계를 바로 놓아야 하며 직접 몸으로 실천하여 자신이 법속에서 얻은 인식을 실증해야 한다.
하지만 수련인에 대한 법의 기본 요구는 너무 높은 것이 아니며 모두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본요구는 어떤 것을 포함하는가? 개인적인 이해로는 단지 법공부와 연공의 형식을 부지런히 해야 할뿐만 아니라 더욱 중요한 것은 사부님의 법공부에 대한 요구 가운데서 점점 더 많은 정념으로 대법의 내포를 알며, 정념으로 대법과 대법수련을 이해할 것을 요구하는데 도달해야 하며, 시시각각 대법과 자신 및 대법과 중생의 관계를 단단히 기억해야 한다. 수련은 속인중의 그 어떤 일보다 신성하다는 것을 알아야 하며, 정법시기에 법을 얻고 수련할 수 있는 기회는 비할 바 없이 얻기 어려운 기회임을 알아야 한다. 사부님께서는 최대한도로 일체 중생을 구도하고 계심을 알아야 한다. 또한 수련인은 속인 중의 좋은 사람, 비교적 좋은 사람임을 알아야 할뿐만 아니라 하늘의 책에 이름이 있으며, 지옥에서 관할하지 않는 대법제자는 비록 속인과 마찬가지로 세간에서 의식주를 행하고 가정과 직장이 있지만 우리가 여기에 있는 목적과 속인이 생활하는 목적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우리는 신의 길에서 걸어가는 생명으로서 날마다 모두 사람에서 걸어 나가야 하며 신이 되는 하늘 사다리를 오르기에 힘써야 한다.
7년 동안 우리는 법속에서 성숙을 향해 걸어가고 있으며 진보가 아주 크다. 하지만 어떻게 박해를 해체시킬 것인가 하는 이 문제에서 아직도 자신을 속인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지는 않은가? 예를 들어 반박해 중에서 어려움을 만나기만 하면 자신을 속인 중에서 불공평한 대우를 받는 사람으로, 무고한 박해를 받는 좋은 사람으로, 아무런 권리도 재간도 없는 보통 백성으로 여긴다. 실지로 이것은 진상 알리기에서 속인이 하는 말과 우리가 마땅히 수시로 파악해야할 수련의 실질을 뒤섞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중생을 구도하는 가운데 속인이 능히 이해할 수 있는 개념과 방식으로 박해를 폭로해야 하지만 그러나 우리는 박해를 폭로하는 의의를 속인이 억울하게 재난을 당할 때 도움을 바라거나 동정을 바라는 것과 한데 뒤섞지는 말아야 한다. 이번 박해의 근본원인은 다른 공간에 있다. 낡은 세력 및 그 각종 요소들의 목적은 생명을 도태시키려는 것이지 구도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한사코 도태시키려는 것은 세인(世人)뿐만 아니며 그들이 보기에 합격되지 않은 대법제자를 포함한다. 대법제자가 만약 속인들처럼 억울하게 박해 받는다는 심태로 3가지 일을 한다면, 아무리 박해를 폭로한다 해도 역시 속인이 속인 일을 하는 것이며, 아울러 속인은 박해를 해체할 방법이 없다. 이 방면에 대해 더 이상 착각과 오해가 있어서는 안 된다.
이 방면의 오해와 정념 사이에는 아마 단지 일념의 차이만 있을 것인즉, 이 일념의 차이가 곧 천지의 차이이다.
최후의 사악을 소탕하려면 전체 대법제자의 진념(眞念), 신념(神念), 정념(正念)에 의거해야 한다. 이상은 개인이 현 단계에서 제한적으로 약간 인식한 것으로 써내어 여러분과 교류하고자 한다. 주요하게는 우리가 박해 가운데서 수련한 시간이 너무 긴 것을 보고, 낡은 요소에 대해 너무 방임하고, 종종 자신을 너무 속인처럼 보는 것 등이다. 우주 중의 무수한 생명들은 시시각각 우리를 지켜보고 있으며 그들은 우리를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 우리 자신도 세간의 가상에 미혹되지 말아야 한다. 이번에 사부님께서 《사악을 철저히 해체하자》 를 발표하셨는데 내가 이해하기에 이는 우리 전체 대법제자들, 특히 중국 대륙에 있는 대법제자 정체에 울린 돌격 신호이다. 대법제자들이 모두 법공부를 잘하는 것에 중시를 돌려야지만 머릿속의 속인 관념과 외래 교란을 자신으로 여기고 수호하려 하지 않을 수 있다. 매 하루는 아마 모두 우리가 박해를 철저히 결속 짓는 그 날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문장발표 : 2006년 11월 27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문장위치 : http://search.minghui.org/mh/articles/2006/11/26/143170p.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