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혜망 2006년 11월 11일】한 시기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사악을 제거함은 먼지 쓸 듯 하여라”(《전 세계 대법제자, 중국 대륙 대법제자들 즐거운 한가위 되기를!》)에 대해 내심으로 인식하지 못했으며 또 자신은 이런 능력과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느꼈다. 최근에 발생한 몇 가지 일에서 사실 이런 능력과 경지도 매우 쉽게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오직 ‘내심으로’ 진정하게 법에 동화되기만 한다면 대법은 우리에게 끝없는 법력을 부여하여 하지 못할 일이 없으며 또한 법을 실증하는 가장 좋은 효과에 도달할 수 있다.
일사일념(一思一念)이 법에 동화되다
한번은 내가 신당인 안테나를 설치하러 가게 되었다. 길에서 마음속에 일종의 압박감을 느꼈다. 나는 ‘안테나 설치를 한두 번 한 것도 아니고 기술면에서도 문제 될 것이 없다. 이것은 분명 다른 공간의 사악이 가로 막으려는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이 올 수 있다는 것은 나 역시 인식을 제고하고 법으로 사악을 제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설명한다.
몆 차례 안테나를 설치한 과정을 회고해보면 나는 자신이 ‘안테나 설치’를 단지 ‘작은 안테나를 설치하는’ 속인의 일로 해왔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법공부 중에서 나는 다시 한 번 자신을 일깨웠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중생들이 구도 받을 수 있도록 ‘법기(法器)’를 가져다주는 것이자 중생들에게 희망을 가져다주는 것이며, 또한 신당인 동수들과 협력하여 진상을 알리고 있는 것이다. 이 공간에서는 위성 접시를 설치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다른 공간에서는 사악을 제거하고 거대한 에너지를 방출하는 날카로운 무기라고. 이렇게 관념이 확 바뀌자 가슴을 짓누르던 그 어떤 압박감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나중에 설치할 때에도 몸이 매우 가벼웠으며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나중에 발생한 일은 나로 하여금 더욱 더 청성해지게 했다. 하루는 아내가 몸이 불편하다고 하기에 내가 ‘파룬따파하오’를 묵념하라고 하자 아내는 예전과 달리 “소용없어요, 아무 효과도 없다고요.”라고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의아해 하면서 “당신 며칠 전에도 효과가 있다고 하지 않았소.”라고 하자 아내는 화를 내면서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어요?”라고 대답했다. 순간 나는 사람이 며칠 전에 한 말을 잊어버릴 수는 없다는 것을 의식했다.(며칠 전에 아내는 분명 파룬따파하오를 외우면 효과가 있다고 말했었다)
원래 아내와 이치를 따지려 했지만 자신이 이미 움직였고 화도 좀 나는 것을 발견하고는 잘못하다간 또 마성이 발작해서 씬씽(心性)을 지키지 못하고 ‘함정’에 빠질 것 같아 차라리 침묵을 지키기로 했다. 나는 잘 파악이 안 될 때면 ‘좀 느슨하게’하는 방법을 취하는데 이렇게 하면 적어도 속지는 않는다.
하루가 지난 후 나는 이 일에 대해 진지하게 사색했으며 내가 너무 쉽게 정에 이끌렸으며 부부의 정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파룬따파하오’에 대한 인식이 그리 똑똑하지 못하거나 혹은 진정 내심으로부터 ‘따파하오(大法好)’에 대한 체험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이 점은 많은 동수들에게도 존재하는 문제로 ‘대법이 좋다(大法好)’는 것을 표면적으로만 인식하고 있을 뿐 내심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이 아니다.]
문제를 찾게 되자 인식이 제고되었다. 저녁에 아내가 돌아오자 나는 말했다. “당신이 진정하게 경건한 마음으로 파룬따파하오를 외우면 반드시 효과가 좋을 거야.” 평소에 늘 불복하던 아내는 마치 어린 토끼마냥 곰상스러웠으며 연신 머리를 끄덕이더니 “맞아요, 나는 정말 성의가 부족했어요.”라고 했다. 아내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나는 깜짝 놀랐다. 어떻게 반나절 만에 사람이 이렇게 변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내 귀를 의심할 지경이었다.
돌이켜 생각해본 후에 나는 분명히 깨달았다. 내가 그 한 층의 법리(法理)를 인식하고 그 한 층의 법에 동화되자 그 한 층의 법이 힘이 나타난 것이며 그 한층 법이 이 일체를 제약하기 때문이었다. 만약 내가 사람의 이치로 아내와 따졌다면 아무리 옳게 말하고 이치가 아무리 타당하고 아무리 많던지 상관없이 역시 사람의 이 층의 이치이기 때문에 배후에 있는 요소를 제약하지 못하며 또한 쉽게 끌려갈 수 있다.
우리가 마땅히 명확히 해야 할 것은 중생을 구도하는 일은 근본적으로 사부님께서 하고 계시며, 우리가 법의 기점에 서서 해야만 비로소 법의 위력이 나타날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형식적으로 아무리 풍부하고, 규모가 굉장하던지 막론하고 중생을 구도할 수 없으며 또 대법에 많은 손실을 끼칠 수 있다는 점이다.
어느 지역의 대법제자들은 매우 견정(堅定)하여 잔혹한 박해 속에서도 종래로 굴복하지 않았으며 사악은 이 지역의 이름만 들어도 간담이 서늘해졌다. 동수들이 법을 실증하는 일을 할 때 정체적으로 협력을 잘했으며 하룻밤 새에 온 시내에 전단지를 다 부쳤다. 인근 지역에 있는 동수들도 이 지역 동수들에 대해 매우 탄복했다. 그러나 나와 여러 동수들은 그들에게 유일하게 부족한 부분을 보아냈는데 바로 자비로 중생을 구도한다는 법인식이 부족했다.
구체적인 사례를 들면 정말로 선량한 한 노인 대법제자가 악인들에게 맞아서 사망했고 장기는 잘려나갔다(‘검시보고서’를 만든다는 구실). 이 일은 현지 많은 사람들의 동정을 자아냈다. 악당 부서에서도 책임이 두려워 이 일을 피해 다녔다. 대법제자들은 추도회를 열었으며 상여가 나가는 도중에 악당의 ‘범법’부서를 지날 때 ‘파룬따파하오’를 높이 외쳤으며 대법 음악을 크게 틀었으나 악인들은 감히 누구도 얼굴을 내밀지 못했다. 명혜망에도 이것을 보도했으며 많은 지역의 동수들도 매우 분발했다. 3개월 후 사악은 대법제자들을 납치하기 시작했으며 커다란 손실을 조성했다.
사실 이 일을 잘하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며 이 일을 할 때 진정 내심으로 이런 ‘형식’이 정의를 주장하고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악인들을 포함한 중생들이 청성하게 인식하게 하는데 목적을 두어 진정으로 그들을 위하여 했어야 한다. 말하자면 이 한 층의 인식과 법이 (내심에서 우러나오는 인식) 있었더라면 사악은 결코 감히 어쩌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법이 일체를 제약하고 있기에 이 한 층의 법이 이미 사악을 깨끗이 제거했기 때문이다.
“수련은 엄숙하다. 내가 당신들더러 수련성취 하라고 한 것은 신이다. 동시에 법을 실증할 수 있어 비로소 대법을 당신들에게 전해주었고 당신들에게 종래로 있어본 적이 없는 영원한 영광을 주었다. 당신들더러 단순하게 박해를 반대하는 중에서 속인의 영웅이 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낡은 세력의 안배와 박해를 부정하는 속에서 법을 실증하고 이로써 신(神)을 향하여 나아가야 한다.” (《해외 전화회의에서의 설법》)
한번은 우리 지역의 많은 동수들이 협력하여 하룻밤 사이에 法輪大法 공고를 시내 전역에 붙였다. 이튿날 많은 경찰들이 난리가 났다. 도처에서 공고를 뜯어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떤 동수들은 매우 흥분했으며 ‘사악들이 바삐 돌아다니다’고 했다. 확실히 우리 동수들은 정념으로 이 일을 했고 또한 협력을 잘했으며 다른 지역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법에서의 인식은 끊임없이 승화되기 때문에 더욱 높은 경지에서 이 일을 볼 때 이런 상태는 옳지 못하다. 우리 한번 생각해보자. 우리가 공고를 붙인 목적은 무엇인가? 그들더러 공고를 뜯고 계속 악행을 저지르게 하려는 것인가? 당연히 아니다. 우리는 그들을 구도하려는 것이며 그들더러 악한 일을 하지 못하게 하여 나중에 무서운 끝장을 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며 그들 생명의 영원을 책임지는 표현이다. 절대 사람처럼 맞서는 일이 아니다. 얼마나 많은 동수들이 잠재의식 속에 이런 생각을 ‘발산’하거나 ‘미워’했는가?
법의 가지가 없었기 때문에 비로소 사악은 악인들을 지시하여 계속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데 이것은 매우 바쁘게 일만 하고 있는 동수들이 한번 잘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이다.
만약 매 한 가지 일에서 우리가 모두 한번 ‘여과’시켜 우리가 법에서 인식한 것인가 아닌가, 구체적인 ‘일’에 대해 내심에서 우러나온 인식인가 아닌가를 살펴본다면 원래 상황을 철저하게 개변시킬 수 있으며 진정한 대법제자가 될 수 있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만약 당신들이 사람마다 모두 내심으로부터 법을 인식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비로소 위력이 끝없는 법의 체현 ― 강대한 불법이 인간에서의 재현이다!”(《정진요지―경언(警言)》)
2. ‘일하려는’심태를 개변
종전의 인식과 상태에 이미 ‘습관’이 된 동수들이 만약 이런 상황을 개변하려 한다면 나의 인식은 마땅히 세 가지 방면에 주의해야한다. 하나는 법을 인식하는 것과 일을 ‘하는’것과의 관계를 잘 파악해야 하며 법이 하고 있다는 점을 명확히 해야 한다. 어떤 수련생은 말한다. “당신은 말하는 것이 이론성이 너무 강한데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 일하려고만 집착하고 있는 동수들은 “당신처럼 그렇게 한다면 너무 번거롭고 복잡한데 간단하게 하는 것이 좋다.”라고 한다. 때문에 이런 동수들은 줄곧 일을 하고 일을 하느라 바쁘며 법에서 제고하지 않는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여전히 자신이 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대법이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며 본말이 전도되었기 때문이다.
확실히 하는 것이 적어도 안 되며 법리를 인식하는 것도 과정이 있지만 관건은 어느 것이 근본인가를 명확히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깨달은 정확한 관계는 이렇다. 진정으로 하고 있는 것은 사부님이자 대법이다. 우리가 ‘하’는 것은 반드시 법에 동화되는 것을 근본으로 해야 하며 법에 동화된다는 것은 바로 법의 가지(加持)와 법의 위력(威力)을 나타내어 법을 실증할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수련생이 말한 ‘이론성’이라는 것은 법리의 심오함과 박대함이며 바로 우리 대법제자들이 갖춰야할 기본이다.
물론 부동(不同)한 층차, 부동한 경지에 존재하는 일정한 시기의 상태가 있으며 이것이 틀렸다고 말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진정으로 법에 동화되자면 마땅히 법리에 대한 청성한 인식이 있어야 한다.
두 번째는 자아와 사람의 관념을 ‘과감히’ 포기해야한다. 왜냐하면 법이 우리 눈앞에 놓여있는 것으로 모두 이미 ‘갖추어져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관건은 우리가 과연 얼마나 우리의 눈을 가리고 있는 집착이라든가, 관념을 내려놓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며 이렇게 할 수 있다면 광명(光明)이 넘쳐날 것이다. 사실 소위 그 ‘자아’라는 것은 가짜 나인데 미련을 둘 게 뭐가 있단 말인가?
세 번째는 매우 작은 데로부터 자신을 바로잡으며 ‘기제(機制)’를 형성해야 한다. 이미 우리 예전의 인식에 ‘습관’되었다면 일단 개변하려 하고 새로운 인식이 있다해도 쉽게 고쳐지지 않으며 점차적으로 새로운 ‘기제’가 형성된다. 마치 그 ‘기(氣)’가 ‘공(功)’으로 변하는 것처럼 말이다. 속인도 일일삼성(一日三省)이라 하여 하루에 3번은 자신을 반성한다고 한다. 희망컨대 동수들도 매 하나의 일을 할 때 모두 사고해보아야 하며 즉 깨달아야한다. 진정으로 내심으로부터 이 일에 대해 인식하고 있는지? 전단지 한 장을 나눠주거나 다른 사람과의 한 마디 대화에서나 매 번 홍법활동에서 자신의 기점이 바른지 보아야 한다. 이렇게 한다면 대법이 위력이 나타날 것이다. 좀 가혹하게 말하자면 매 하나의 일에서나, 매일 모두 법에서 인식을 제고할 것이 있으며 이것이야 말로 비로소 가장 정확한 상태이다. 이렇게 되면 ‘기제’가 갈수록 강해져 법의 위력을 더욱 크게 발휘할 수 있다.
총괄적으로 법에서 인식해야만 비로소 법의 가지가 있을 수 있고 법의 위력이 체현될 수 있으며 비로소 진정하고 가장 좋게 대법을 실증하는 것이다.
문장발표 : 2006년 11월 11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원문위치: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6/11/11/142145p.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