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혜망 2006년 10월 28일】
명혜망 2006년 10월 13일 제자교류에 발표된 《3가지 일을 하지 않아도 여전히 정법수련 중에 있는가?》라는 문장에서 한 흐리멍덩한 수련생(역주: 邪悟한 자)이 동수와 대화하는 중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그가 물었다. “당신은 왜 발정념을 하는가?” 나는 “사악을 제거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했다. 그는 “당신이 발정념으로 사악을 제거한다면 이는 사악의 존재를 승인한 것이 아닌가? 당신은 곧 낡은 세력을 부정하지 않은 것이다. 나는 아예 발정념을 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나는 낡은 세력을 전반적으로 부정하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사악은 존재하지 않으며 발정념을 할 필요가 없다.”
이 흐리멍덩한 수련생의 얼떨떨한 인식과 유사한 경우 속인들은 ‘귀를 막고 방울을 훔치’는 농담으로 간주한다.
옛날에 아주 어리석고 이기적인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라면 늘 온갖 방법을 찾아 손에 넣고자 했으며 심지어 훔치기까지 했다. 한번은 그가 어느 집 대문에 걸린 방울이 아주 맘에 들었다. 이 방울은 아주 세밀하게 만들어져 보기에도 좋았고 소리도 아주 맑았다. 그는 곧 그것을 훔쳐 집으로 가져가고 싶었다.
그는 손으로 이 방울을 건드리면 “딸랑딸랑” 소리가 나고 소리가 나면 발각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에 소리가 들리지 않게 자기 귀를 막고는 방울을 떼어냈다. 결과는 물론 주인에게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그는 자신이 소리를 듣지 못하면 남들도 모를 것으로 생각했으나 방울 소리는 진실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나중에 이 어리석은 사람을 비유하여 자신은 속여도 남을 속이진 못한다고 말한다. 이는 또한 사람들에게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이는 일을 하지 말라고 일깨워주는 일화이다.
우리는 오늘날 정법 수련 중에 있고 다른 공간의 사악(邪惡)은 진실로 존재하는 것이다. 반드시 발정념으로 이런 사악한 요소들을 제거해야 하며, 사람 공간 중에서도 사악에게 이용당하는 악인과 독해된 중생들이 있다. 그러므로 사악을 폭로하는 동시에 진상을 알려 이용당하거나 독해된 그런 사람들이 청성해져서 구도될 수 있게 해야 한다. 당신이 사악을 승인하지 않으면 곧 사악이 존재하지 않는단 말인가? 당신이 사악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여 그것이 곧 해체될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이 바로 ‘귀를 막고 방울을 훔치’는 것이 아닌가?
듣건대 우리 지역에도 이런 흐리멍덩한 수련생이 있다고 한다. 전문적으로 노교소(勞敎所)에서 나온 사람과 두려운 마음이 심한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소위 ‘교류’하고 자신의 ‘수련이 높은 것’을 과시하고 동수들의 수련을 교란하거나 법을 파괴한다. 이리하여 법리(法理)에서 분명하지 못한 개별적인 동수들에게 일정한 교란을 형성했다. 또한 어떤 수련생은 막 청성해지려고 하다가 이런 소위 ‘깨달음이 높은’ 사람과 교류한 후에 다시 흐리멍덩해졌다. 더욱 심한 자는 더 이상 법을 배우지 않고 대법서적을 태워버린 경우도 있다. 교란 받은 수련생은 반드시 근본적인 문제를 찾아보아야 한다. 정황을 아는 동수들은 마땅히 법을 수호하는 기점에 서서 제때에 이런 ‘교류’를 제지해야 하고 시장을 주지 말아야 한다. 아울러 그들의 법을 파괴하는 행위를 충분히 폭로해야 한다.
사부님께서는 《2002년 미국 필라델피아 법회에서의 설법》에서 우리에게 알려주셨다.
“물론 우리 대법제자들 매 개인은 모두 말하기를 우리는 낡은 세력의 배치를 승인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것은 입으로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대법정법(大法正法)의 요구에 따라 가서 하고, 당신의 역사상에서 배치된 그 일체를 곧 부정하는바, 나는 당신의 그 낡은 세력 자체를 포함해서 나는 모두 승인하지 않는다. 정념(正念)이 아주 충족하면 곧 그것을 배척할 수 있으며 그것의 배치를 부정할 수 있다.”
내가 이해하기에 대법과 정법의 요구에 따라 잘 한다는 것은 법속에서 글자만 파고들면서 함부로 제고했다거나 난잡하게 깨닫는 것과는 다르다. 사부님께서 요구하신 3가지 일, 곧 법학습, 발정념을 잘하고 진상을 알리는 구체적인 일을 잘 하는 동시에 대법의 요구에 따라 자신을 잘 닦으며 낡은 세력이 배치한 환경의 열악함이나 좋아짐에 이끌리지 말아야 한다. 일관되게 안정적으로 3가지 일을 잘 해야 한다. 우리가 엄격하게 사부님께서 요구하신 것에 따라 해야만 곧 낡은 세력의 배치를 승인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엄격하게 사부님의 요구에 따라 잘한다면 사악의 배치도 말할 것이 없으며 자연히 낡은 세력의 배치를 부정하는 목적에 도달할 수 있다.
우리는 매 사람의 수련의 길은 사부님께서 잘 배치해주셨지만 길이 아주 좁다는 것을 모두 잘 알고 있다. 수련 과정 중에서 어떤 때는 잘하지 못하고 빗나간 곳이 있으면 우리는 대법의 요구에 따라 끊임없이 바로잡아야 한다. 이 역시 낡은 세력의 배치를 승인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 새롭게 수련을 잘한다면 마찬가지로 낡은 세력의 배치를 부정하는데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대법에서 아주 멀리 빗나가거나 혹은 장기간 빗나갔음에도 바로잡지 못한다면 그럼 곧 낡은 세력이 배치한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사실 정법수련, 낡은 세력의 배치를 전반적으로 부정하고 발정념을 하는 등의 방면에 관해 사부님께서는 설법 중에서 이미 여러 차례 각종 각도에서 상세하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사오(邪悟)’는 그것이 서 있는 기점이 틀리기 때문이다. 중생을 구도하는 동시에 자신을 바로 잡기 위한 것이 아니라 높은 경지를 추구하고 원만을 구하는 것을 제1위로 놓아 위사위아(爲私爲我)하고 더러운 것으로 대법을 이용해 자신의 두려움을 덮어 감추며 자신이 법을 실증하는데 참여하지 않는 구실을 찾는다.
수련이란 바로 무조건적으로 사부님을 믿고 무조건적으로 대법에 동화되는 것으로 자신이 이해하면 믿고 자신이 감수할 수 있어야만 비로소 가서 하는 것이 아니다. 사분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모두 법이며 마땅히 모두 백분의 백 해내야 하는 것이다. 해내지 못했거나 잘하지 못했다면 안을 향해 자신을 찾고 수련을 통해 점차적으로 도달해야 하는 것으로 법속에서 자신을 위해 단장취의(斷章取義)하여 해내지 못하고 잘하지 못한 것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다.
법리상에서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는 사부님께서 이미 아주 명확하게 말씀하셨다. 법을 실증하는 구체적인 일 어떻게 할 것인가는 명혜망을 보면 역시 참조가 된다. 아직도 흐리멍덩한 수련생들은 빨리 청성해져야 하며 자아를 내려놓아야 한다. 자신의 그 가련한 자존심을 수호하는 것은 정법수련의 기연을 잃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다. 천백만년동안 생생세세 기다려온 것은 바로 오늘날 사부님을 도와 정법 하려는 홍대한 소원이 아니었던가? 사부님께서는 거대한 대가와 감당을 치르셨고 이미 우리에게 일체를 창립해주셨다. 우리는 절대로 사부님의 기대와 자기 세계의 중생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말아야 한다. 이 우주 중에서 더 이상 있을 수 없는 정법수련의 기연을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된다.
문장발표 : 2006년 10월 28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원문위치 :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06/10/28/141258p.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