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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식’과 ‘받지 말아야 할 박해’를 말하다

글/대법제자
【명혜망 2006년 10월 2일】 몇몇 수련생이 불법 수감된 대법제자들이 단식하는 문제를 이야기했다. 나는 동수들의 이야기가 아주 좋고 아주 솔직하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에 대해 나 역시 생각한 적이 있다. 왜 단식해야 하는가? 어머니한테 물어보았던 기억이 나고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단식하는 방법을 취합니까, 또 어느 수련생이 단식하지 않으면 다른 동수들에 의해 잘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게 할까요?”라고 물었다. 어머니는 이것이 자신의 권리를 수호하는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권리를 수호할 때 단식하는 방식을 취하는 것을 보지 못했는가라고 했다.

나는 그 당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단지 사이트에서 단식하는 동수들이 야만적으로 음식물 주입을 당할 때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그 심정은…… 수련하지 않는 속인이더라도 그 역시 단식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권리를 수호하는 목적에 도달할 수 있다. 수련인으로서 우리는 정말로 반드시 잘 생각해야 한다. 이 몇 해 동안 우리는 왜 보편적으로 단식하는 방식을 취했는가? 불법으로 수감당한 후 단식하는 것은 자신을 제고하고 법을 실증하고 중생을 구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식인가?

비록 매 사람의 수련의 길은 어떻게 걸어가는 가에 대해 정연하게 한 가지 방법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 대법제자들이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관련 법리의 이해에서 아직도 부족한 점과 편극이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계속 제고가 필요하지 않을 까?

사부님께서는 《전법륜》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허다한 공법은 이런 하나의 전승[承傳] 과정을 거쳤으므로 그것은 벽곡을 가지고 있다. 또 허다한 공법은 벽곡을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 오늘날 사회에서 전한 공법 중 대다수는 이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는 연공은 전일(專一)해야 한다고 말하는바, 당신이 인위적으로 어떻게 하려고 하여 어떻게 해서는 안 된다. 당신은 그것이 대단히 좋다고 느껴져 당신도 벽곡을 하려고 하지만 당신이 벽곡을 해서는 뭘 하는가? 어떤 사람은 아주 좋고 신기하다고 느끼거나, 혹은 자신의 공부(功夫)가 높아서 과시하고 과시할 수 있다고 여기는데, 각종 심태의 사람이 다 있다. 설령 이런 방법을 채용해 수련한다 하더라도 역시 자신의 에너지를 소모하여 신체를 보충해야 하므로 역시 득보다 실이 더 많다. 여러분 알다시피 특히 종교가 건립된 후에는 당신이 절에서 좌선[打禪]이나 폐관(閉關)을 하더라도 당신에게 차와 밥을 공급하는 사람이 다 있기 때문에 이 문제와 연관되지 않는다. 특히 우리는 속인사회 중에서 수련하므로 당신은 전혀 이런 방법을 채용할 필요가 없으며, 또한 당신 그 한 법문에 없으면 당신 역시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정말로 벽곡을 하려고 한다면, 그럼 당신은 얼마든지 가서 수련하도록 하라. 내가 알기로는 흔히 사부가 고층차에로 공을 전하여 진정하게 사람을 이끈다고 한다면, 그의 이 한 법문 안에는 벽곡이 있으며, 아마 이 현상이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보급할 수 없는 것으로, 모두 흔히 도제(徒弟)를 데리고 비밀리에 수련하고, 단독으로 수련한다.”

나의 이해는, 우리 공법을 놓고 말할 때 항상 구치소 등 그러한 환경에서 부득이하게 ‘벽곡’의 방식을 취하는 것이 다시 말하면 그러한 정황 하에서 단식의 방식을 취하는 것이 우리 대법 수련의 일부분이라고 할 수 없다 이다. 물론 만약 동수의 심성이 제 위치에 도달하면 무슨 기적도 가히 발생할 수 있다. 많은 동수들이 오랫동안 식사하지 않아도 얼굴은 불그레한 것이 법을 실증하는 작용을 일으킨 것이 아닌가? 또 많은 동수들은 단식 때문에 결국 사악이 타협하게 하여 정정당당하게 마귀굴에서 나왔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수련하지 않는 속인이더라도 그 역시 똑같이 단식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권리를 수호하는 목적에 도달한다 이다.

그러나 우리는 동수들이 단식으로 인해 건강에 문제가 생기고 야만적인 음식물 주입으로 심지어 사람 몸을 잃었다는 것을 많이 들었고 많이 보았다. 그들을 박해한 악인 모두 그들의 용기에 탄복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나의 생각에 만약 정말로 그렇게 탄복했다면 그렇게 잔혹하게 박해하지 않았을 것이다. 최소한 법리에서 말하면 정말로 정념정행했다면 그 박해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고 최소한 박해는 그렇게 엄중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또 정말로 이 말을 하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갇힌 동수들은 너무나 많고 많은 고난을 당하고 있고 아주 많은 것이 낡은 세력이 강제로 주입한 것이며 대법제자는 이런 박해를 받지 말아야 한다.

일찍이 2001년 우리는 명혜망에서 허다한 대법제자들이 노교소 등 사악한 장소에서 잔혹한 박해를 받고 있는 것을 보았지만 발정념과 정념의 작용을 중시하지 못했다. 많은 정도에서 단지 수동적으로 감당하고 버텼는데 선량과 사람 속의 정념적인 생각이 사악한테 틈을 타게 된 것이다.

2001년 7월 사부님께서는 《정념의 작용》이란 경문을 발표하셨다. 사부님께서는 이 경문에서 이렇게 지적하셨다. “내가 제자들에게 정념(正念)을 발하라고 한 것은, 이른바 그러한 사악은 사실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법제자의 자비가 도리어 낡은 세력에 의하여 이용당하고, 그것들의 보호 하에서 사악한 생명은 고의로 박해를 가하고 있다. 그렇다면 대법제자들이 감당하는 것은 이미 단지 자신의 업력뿐만이 아니며 사악한 생명의 박해 하에서 감당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감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사악한 생명 또한 극히 저질이고 더러운 것들로서 정법(正法) 가운데서 그 어떠한 작용을 일으킬 자격이 없다. 대법 및 대법제자에 대한 박해를 감소시키기 위하여, 나는 비로소 제자들에게 정념(正念)을 발하라고 하였으며 그것들이 정법에 대한 고의적 파괴를 깨끗이 제거함으로써, 대법제자가 박해 속에서 감당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감소시키는 동시에 중생을 구도(救度)하고 대법제자의 세계를 원만시킨다.”

《미국 서부국제법회 설법》에서 사부님께서는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만약 정말로 곤란 앞에서 염두가 아주 바르면, 사악의 박해 앞에서, 교란 앞에서 당신이 말한 정념이 단호한 한마디 말은, 사악을 즉석에서 해체시킬 수 있으며, (박수) 능히 사악에게 이용된 사람이 고개를 돌려 도망가도록 할 수 있으며, 당신에 대한 사악의 박해가 종적 없이 깨끗이 사라지게 할 수 있으며, 당신에 대한 사악의 교란이 소실되고 자취를 감추게 할 것이다.”

개인적인 이해로는 우리 대법의 수련은 ‘대도무형’이다. 우리의 수련과 법 실증을 위해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렇게 많은 법을 말씀하셨고 우리에게 그렇게 많은 신통과 그렇게 큰 능력을 부여해주셨다. 사부님의 정법구결 역시 우리에게 부여하여 사용하게 하셨는데 우리는 오로지 대법을 단호히 믿는 마음만 있으면 된다. 끊임없이 법의 요구에 도달하면(어느 한 층차 속의 법리에 머물러 있음이 아니다) 수련인 신분에 더욱 철저하게 더욱 부합되는 반박해의 효과에 도달할 수 있다.

때문에 나는 쉽게 단식하는 방식을 취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말로 부득이한 경우에 단식하는 방식을 취하더라도 최소한 정념을 강화하고 발정념을 더 많이 하여 정념으로 사악을 제압하는 것을 위주로 해야 한다. 동시에 안을 향해 찾고 집착을 내려놓아야 하는 즉 단식은 단지 보조적이다. 이렇게 해야 비로소 세인과 악인으로 하여금 대법제자의 금강위엄과 늠름한 정기(正氣)를 볼 수 있다. 무척 많은 고통과 초상적으로 박해를 감당하는 것이 아니다.

개별적으로 단식을 겪은 수련생이 이 문장을 보고서 아마도 남들이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게 사악한 환경 속에서 단식하지 않고 정념만으로 박해를 화해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사부님께서는 “난인능인(难忍能忍)”을 말씀하셨고 또한 “난행능행(难行能行)”을 말씀하신 적이 있다. 우리가 만약 정말로 현재까지 지속되는 박해 속에서 양성된 고유관념을 내려놓고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발정념하고 정념으로 악인을 반대로 제약하며, 정념으로 그 낡은 세력이 강제로 가한 우리가 근본 감당하지 말아야 할 박해를 타파한다면 마땅히 “유암화명유일촌(柳暗花明又一村)”일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법에서 또 경지를 승화하여 우리가 더 커지고 사악은 더 작아졌기 때문이다!

우리 본인이 바로 우주 대법이 만든 것이고 세상의 일체는 모두 우리 대법제자가 오늘날 정정당당하게 법을 실증하게 하기 위해 창조한 것이다. 세인들은 많은 사상 장애가 있고 “수련을 견지하면 박해를 받는다.” “진상을 알리면 붙잡힌다.” “보증을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상태는 우리 대법제자가 이 방면의 인식을 반사해준 것이 아닌가, 그리고 우리의 조우는 그들에게 남겨준 현실적 인상이 아닌가? 박해는 이미 발생했다. 만약 우리가 반박해 속에서 세인들에게 더 많은 ‘정념으로 악인을 반대로 제압한다’란 전기를 남겨준다면, 정념으로 박해를 화해한 더 많은 견증을 남겨준다면 세인들은 대법을 더욱 존중하고 대법제자를 더욱 존경하며 더 가깝게 하려고 하지 않을까?

진상을 알리는 과정 중에 나의 체험은, 대법제자 본인의 이지와 아름다운 형상은 바로 가장 유력하게 진상을 알리고 홍법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우리가 세인들에게 보여준 것이 더 많은 박해라면, 많은 인연있는 사람들이 대법을 동정하는 수준에 머물러 대법에 더 접근하지 못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정면으로 적극적인 방식을 취하여 반박해한다면 법 실증과 세인구도에 더욱 유리하지 않을까? 물론 전제는 법에서 행해야만 한다.

어떠한 정황 하에서 사악의 배치와 박해를 우리는 절대로 승인할 수 없고 끊임없이 그들을 폭로해야 한다. 동시에 우리는 또 끊임없이 이전의 부족한 점을 종결함으로써 불필요한 손실을 감소하고 진정으로 자신의 제고에 도달해야 한다. 아울러 법을 실증하고 중생을 구도하는 목적에 도달해야 한다.

약간의 집착을 내려놓으니 비로소 이 문장을 쓸 수 있었는데 동수들의 공동의 제고를 위해 적었다. 법에 입각하지 않았거나 극단적인 곳이 있다면 동수들의 자비한 시정을 부탁한다.

문장완성 : 2006년 10월 01일
원문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6/10/2/139111p.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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