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대륙 대법제자
【명혜망 2006년 9월 17일】2006년 하반기부터, 《명혜주간》에는 도시 대법제자들이 농촌에 가서 진상자료를 배포한 경험의 글들이 끊임없이 실렸다. 많은 농촌에서는 대법진상을 보지 못해 조급해 하고 있는데 많은 도시 대법제자들은 이런 글을 보고도 마비되어 있었다. 마치 농촌은 자신과 상관이 없다고 여기는 것 같았는데 협소한 도시만 고수하며 일년 또 일년 반복적으로 진상자료를 배포하고 있다.
그러나 정진하는 많은 대법제자들은 모두 근간의 《명혜주간》을 보고 깨달았다. 하여 전국의 대(大), 중(中) 도시의 대법제자들은 보편적으로 농촌에 가서 진상을 알리고 자료를 배포하는데 이미 이런 형세를 초보적으로 형성하였는바 가능하게 중생을 구도하는 새로운 천상변화 일 수 있다. 하여 우리 시(지급시)의 많은 협조인들은 교류이후 흩어져 도시의 동수들을 찾아가 다시 교류했으며 모두들 동감이었다. 즉 대륙 대법제자들은 대부분 대, 중 도시에 집중되어 대법의 소식들이 가장 풍부하지만 광대한 농촌은 대법제자가 희소하여 진상이 공백인 지역 면적이 도시의 몇 십 배에 이르며 인구의 수량은 몇 배 더 많다. 우리 수천만에 달하는 대법제자들은 바로 이 협소한 도시에서만 반복적으로 6,7년간 진상자료를 배포했다. 감옥과 노교소에서 돌아온 많은 도시 대법제자들의 첫번째 일이 바로 주위의 주택가에 가서 자료를 배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모두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이런 지역은 이미 일찍부터 다른 대법제자들이 허다하게 배포했기에 더 배포하면 중복에 불과하다. 하여 시민들은 대법제자들에게 이렇게 항상 말한다. “당신네들은 한 달이 넘도록 우리 그 작은 지역에 자료를 배포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파룬궁의 새로운 소식을 보고 싶습니다.” 그들은 진상자료를 신문으로 여기고 날마다 가져다 줄 것을 바라고 있었다.
이전에 우리는 이런 말을 들은 후 모두 좋아했다. “중생이 또 진보했구나.” 그러나 현재 시야를 넓은 농촌까지 확대한다면 우리는 기뻐할 수 없다. 광대한 농민들은 몇 년 동안 대법진상을 보지 못했는데 이는 마침 우리 모든 도시 대법제자들의 시야가 너무 좁아 해마다 고만한 곳만 고수했기 때문이다. 안일함을 구하는 마음은 산을 넘고 물을 건너는 고생을 하지 않게 했다. 그들은 똑같이 도시 대법제자들이 마땅히 구도해야 할 중생들이다!
과거에 우리는 적당한 일부 시간과 정력으로 그들을 구도하지 못했으므로 우리는 이미 그들에게 미안하다. 만약 우리의 구도방향을 더 이상 조종하지 않고 구도범위를 확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사부님과 대법에 미안하다. 심지어 죄를 짓게 되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고의적으로 대량의 농촌의 중생들을 누락시켜 구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도시의 중생구도 일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상당한 일부분의 인력과 물력을 배치하여 농촌에 가게 해야 한다. 동시에 정체적으로 협조를 잘함으로써 같은 향촌에서 많은 동수들이 중복적으로 배포하는 것을 방지해야 한다.
아래에 우리 시의 2,3달간의 경험을 소개하여 더 좋은 경험을 끌어내고자 한다. 그리고 전국의 모든 대, 중 도시의 동수들의 중시를 일으키고자 한다. 부족한 곳은 동수들이 더 좋게 원용시키기 바란다.
우선 우리는 일부 동수들이 현 도시의 교통지도책과 행정지도책(사본)을 살 것을 건의한다. 1. 보편적으로 한 개 현의 면적은 본 시내보다 몇 십 배 더 큰 것을 발견했다. 이전에 우리는 그들을 구도하러 아주 적게 갔었다. 2. 이 몇 년 사이에 농촌의 교통은 비교적 편리해져 현마다 모두 정규적인 국도(國道), 성도(省道)가 있고, 모든 향과 진 사이의 현도(縣道)는 시멘트길이다. 반시간 마다 버스 한대씩 지나간다. 향진 속의 마을마다 모두 향도(鄕道, 간이도로)가 있고 트럭, 화물차가 아주 많다. 우리는 이것이 대법이 대법제자가 농민을 구도하도록 만들어낸 물질환경이며 또한 중생의 복이라고 깨달았다. 우리 성의 경제가 비교적 낙후한데도 이런 정도이니 우리는 이런 조건을 잘 이용해야 한다.
그리고 바로 총체적으로 본 시의 농촌정황을 잘 알아보아야 한다. 시내 이외 몇 개 현성에도 대법제자들이 있지만 인원수가 적다. 그들 중 몇 명의 정진하는 동수들이 몇 년 전에 납치된 후 그 외 동수들은 걸어 나오려고 하지 않거나 사오했으며 도시 동수들과 연락하지 않고 있다. 시내의 몇몇 동수들은 이전에 현성에 가서 자료를 배포했지만 횟수가 많지 않았고 정법노정에 따라가지 못했다.
현 이하의 향진은 99년 7.20 이전에 분산적으로 십 여 개의 연공장이 있었고 매개 연공장에는 몇 명이 수련했다. ‘7.20’박해 이후 대부분 연락이 끊겼고 대다수가 걸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또한 농촌의 면적은 너무나 광활하여 몇 명의 농촌대법제자로는 거대한 많은 농촌 중생들을 구도할 수 없다. 우리는 일부 농촌에 전문적으로 가 보았는데 항상 몇 십리의 주위에서 대법진상과 9평, 3퇴를 사람들이 들어보지 못했으며 중공 사당TV의 거짓말만 알고 있었다.
소수 몇몇 동수들이 먼저 농촌에 가서 자료를 배포하고 다시 돌아와 경험을 소개했더니 한 달도 안 되어 전 시내의 20여명이 주동적으로 편벽한 농촌에 걸어가서 자료를 배포했다. 낡은 세력이 농촌 중생에 설치한 장애를 타파하고 대법진상을 농촌의 매개 구석에 배포했다. 중복 배포를 감소하고 동수들은 행군하며 싸우듯이 상세하게 본 성과 본 시의 지도책을 연구했다. 우리 시에는 몇 개의 현이 있다(현급시를 포함함). 매개 현마다 10개 전후의 진이 있고 매개 진에는 약 5개의 향이 있으며 매개 향에는 또 10개 전후의 촌이 있고 매개 촌에는 대략 5개의 촌민소조(즉 과거의 생산대)가 있었다. 매개 소조에는 약 40가구의 농민가정이 6-10킬로 이내의 산지, 강, 호수 사이에 있었다. 자료를 배포하려면 산을 넘고 물을 건너야 하기에 많은 고생을 하며 도시보다 많이 어렵다.
동수들은 협의한 후 모두들 통일적인 협조에 동의했다. 즉 매개 법공부 소조마다 한 개 현을 ‘감당’하기로 했고 소조 내의 동수들은 다시 교류하여 부동한 향촌에 갔으며 남자 동수들이 주동적으로 먼 농촌에 도보로 가서 배포했다. 작은 진, 향 정부의 소재지는 교통과 투숙이 좀 편리하고 주민들이 집중되었기에 여성 동수들이 가서 배포하도록 했다.
우리는, 만약 도시의 3분의 1에 달하는 대법제자들이 매달마다 한번씩 농촌에 간다면 얼마 안 가서 광활한 농촌에는 더 이상 진상 공백지역이 없을 것이라고 믿는다. 물론 일부 도시의 동수들이 농촌에 갈 수 없다고 하여도 괜찮다. 발정념하고 경제적으로 도울 수 있는데 왜냐하면 대법제자는 하나의 정체이기 때문이다.
(계속)
문장완성:2006년 09월 16일
문장발표:2006년 09월 17일
문장갱신:2006년 09월 16일 21:58:18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6/9/17/137987p.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