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대륙대법제자
【명혜망 2006년 7월 28일】
사부님께서 최근 《로스앤젤레스 시 설법》중에서 대법제자들에게 “가장 두드러지고 가장 크며 또한 장기간 줄곧 해결하지 못한 것”은 “바로 대법제자가 잘못이 있을 경우 남이 말하는 것을 싫어하며 누구도 말할 수 없는데 말만 하면 야단이라는 것이다. 옳을 때 다른 사람이 의견을 제기하면 좋아하지 않고 틀려도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말을 하기만 하면 바로 좋아하지 않는다. 이 문제는 이미 상당히 심각해졌다.”라고 말씀하신 후 나는 지금은 개인수련 역시 반드시 중시해야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사부님께서 정법노정을 여기까지 이끌어오셨기에 개인수련의 상태가 직접 정법 진도(進度)에 영향을 끼치며 우리 매 대법제자들이 모두 엄숙하게 자신의 수련을 대하고 진지하게 자신의 부족점을 찾고 자신으로 하여금 진정하게 제고시켜야만 우리는 비로소 자비하신 사부님께서 계속해서 기다리지지 않도록 할 수 있다.
아래에서는 자신의 최근 수련 체득을 써내어 동수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한다. 거칠고 얕은 인식이니 부당한 곳이 있다면 동수들의 자비로운 지적을 바란다.
1. 쟁투심, 질투심 및 수구(修口)
지금까지 수련해오면서 대부분의 동수들은 속인 중에서 명예와 이익과 같은 유의 것에 대해서는 모두 담담하게 보게 되었지만 수련인 사이에는 아직도 쟁투심과 질투심이 존재한다. 내 주변에 이런 현상이 있었다. 동수 사이에 법에 대한 인식과 이해가 달라 협력해서 일을 할 때 의견이 통일되지 못하며 시간이 오래 지나면 일정한 간격이 생긴다. 이리하여 우리 정체 중에 일종 아주 좋지 않은 물질이 형성된다. 이런 좋지 않은 물질을 제때에 발견하여 뿌리를 뽑아버리지 않고 그것이 멋대로 자라고 퍼지게 내버려둔다면, 수련인의 정념이 부족할 때, 쉽사리 그것에 의해 이끌리게 되며 그것을 따라 생각하고 그것을 따라 말하며 그것을 따라 일을 하는데, 그것은 끊임없이 강화되어 반대로 다시 와서 사람의 사상을 교란하고 다시 그것을 따라 좋지 않을 일을 하게 되는 일종의 악순환이 발생한다.
동수에게 부족한 점이 있음을 보고 마땅히 지적해야 할 때 말을 했으면 한 것으로 동수에 대한 관념이 생기지 말아야 한다. (동수에 대한) 이런 좋지 않은 관념은 자신에게나 다른 사람에게, 혹은 정체(整體)에 있어 모두 좋은 점이 전혀 없다. 주변에서 동수의 부족함을 논하는 사람을 보면 부화뇌동하지 말아야 하는데 이렇게 한다면 동수 사이의 집착을 조장할 수 있다. 정체를 원용시킨다는 태도를 가지고 사정을 잘 해결하고 동수 사이의 간격을 제거하도록 도와야한다. 물론 만약 동수에게 확실히 문제가 있음을 발견하거나 정체적으로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면 여러분이 모두 함께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토론하는 것은 문제가 없다. 그러나 단지 다른 마음을 갖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이것 역시 정체와 동수에 대해 책임지는 것이다.
2. 명(名)을 구하는 마음(혹자는 과시심이라고도 한다)
나는 내 몸에도 여전히 일종 물질이 있음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늘 자신이 수련을 잘했다고 느끼며 다른 사람이 나를 깔보는 것을 용인하지 못하는데 매번 마음속으로 불평할 때면 모두 그것이 작용하고 있었다.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한번은 내가 어느 협조인에게 자료점에 사람이 충분한지 질문하고 만약 충분하다면 나는 마땅히 속인의 일을 찾아 가정과 사회관계를 잘 원용하겠노라고 했다. 그러자 수련생은 뜻밖에도 냉랭하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당신 마음이 불편하다면 (자료점) 일을 하지 마세요.” 당시 나는 표면적으로는 비록 참을 수 있었지만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평형을 이루지 못했다. 나는 대법을 위하여 목숨까지도 아까워하지 않고 누군들 전문적으로 대법 일을 하고 싶지 않단 말인가? 지난 몇 년 동안 이렇게 (자료점) 일을 하는데 최선을 다해왔는데 (협조인은) 어째서 아직까지 마음속으로 평형을 이루지 못하는 명(名)이 있을까? 나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라 정말로 견디기 힘들었다.
나중에 명백히 생각해보니 이는 동수(협조인)와는 관계가 없는 일로 나 자신의 몸에 이런 물질이 있어서 조성된 것이었다. 견디기 힘들어 한 것은 그것이었으며 그렇지 않다면 내가 그것에게 이끌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왜 다른 사람이 자신을 깔보면 견디지 못하는가? 왜 다른 사람의 호감을 얻어야 하는가? 이것 자체가 바로 명을 구하는 마음이다. 원만에 접근한 사람으로서 어찌 다른 사람의 견해에 마음을 둔단 말인가? 오로지 사부님의 요구에 따라 가서 잘하고 ‘하되 구함이 없으면’ 일체는 모두 그곳에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대법을 실증해야하며 중생을 구도해야한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이곳에 온 진정한 목적이 아니겠는가? 이 마음을 찾아낸 후 그것을 겨냥하여 공력을 들이되 의념 속에 반영되어 나오면 즉각 그것을 소멸시켜버리자 점차적으로 이 마음이 없어졌다.
3. 정(情)
나는 자신이 신변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 쉽게 조급해하며 태도를 잘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을 발견하는데 왜 이럴 수 있는가? 바로 정의 작용 때문이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속인 중의 친인으로 간주하여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누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서, 부모에 대하여, 자녀에 대해서도 모두 잘 대하고, 곳곳마다 다른 사람을 고려하는 이 마음은 곧 이기적인 것이 아니며, 모두 자선지심(慈善之心)이고 자비(慈悲)이다.”(《전법륜》)처럼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실 자기가 처한 환경 속에서 잘 할 수 있는가, 부모, 배우자, 형제자매, 자녀들에 대한 태도에서 시시각각 한 수련인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가 하는 이것이야말로 비로소 씬씽(心性)의 진정한 척도이다. 그래서 나는 주변의 수련환경에 대해 반드시 아주 중시할 것이며 수련인의 태도에 근거하여 매 사람을 대해야 겠다는 결심을 내렸는바, 여기에는 자신에 대한 태도도 포함한다.
전에 어머니(대법제자)의 부족을 볼 때면 나는 늘 비판을 했지만, 어머니가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는 고려하지 않았다. 어떤 때 어머니가 받아들이지 못하면, 나는 조급해 하면서 ‘핍박하여’ 기어이 받아들이게끔 했다. 그러나 다른 동수였다면 나는 상대방이 받아들일 수 있는 각도에 서서 선의(善意)적으로 지적했을 것이며 상대방이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이지 않거나 나 역시 집착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나는 정이 작용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인식했는데 나는 곧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어머니를 동수로 여기자 태도 역시 최대한 잘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어느 날 어머니가 후원에 있는 파를 가리키면서 내게 말씀하셨다. “이 파를 좀 봐, 우리가 매일 보면서 ‘정말로 잘 자랐네’라고 말하자 곧 크고 튼튼하게 잘 자랐단다. 하지만 동시에 문 앞에 심은 저 파를 좀 보거라. 우리가 볼 기회도 많지 않고 또 칭찬할 기회도 없었는데 정말로 작고 볼품없게 자라 후원에 있는 파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구나. 이것으로 보건대 우리 대법제자들이 내보내는 눈빛에는 모두 에너지가 있구나.”
나는 갑자기 자신이 선념(善念)의 힘을 소홀히 했음을 깨닫게 되었다. 수련생을 대할 때에도 마땅히 양성(良性)적인 정보에서 출발해야 하며 그냥 질책만한다면 단지 수련생을 한번 밀쳐버릴 뿐이다. 나는 뼈아픈 반성과 함께 앞으로는 어머니에게 조급해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나와 어머니가 어떠한 인연관계가 있든 상관없이 또 어쩌면 그녀가 전생에 나에게 무엇을 빚졌을 수도 있겠지만 수련인으로서 나는 이런 업력윤보가 필요치 않으며 어머니에게 무슨 빚을 받고자 하지도 않는다. 내가 원하는 것은 수련인의 씬씽의 제고이다.
내가 더 이상 어머니를 질책하지 않게 되자 나는 어머니 자신이 스스로의 부족을 깨닫는 것을 발견했으며 인식한 것도 아주 깊이가 있었다. 나는 너무나 부끄러웠다.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정말로 잘 하라고 가르쳐주셨다.
“수련인은 결코 지적해서 좋아진 것이 아니고 나 이 사부가 누구를 비평해서 좋아진 것도 아니며 당신들이 서로 비평하고 지적해서 좋아진 것도 아니며 여러분 자신이 자신을 닦아서 수련이 잘된 것이다.”(《로스앤젤레스 시 설법》)
4. 청정심에 대한 이해
어떤 때 사상 속에 늘 일부 좋지 못한 염두들이 튀어나온다. 가령 다른 사람이 어떠어떠하게 나를 오해한다거나, 이 일은 마땅히 어떠어떠하게 가서 해야 하며, 다른 사람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등이다. 심지어 발정념을 할 때도 늘 조용해지지 못하는데 이런 것들은 모두 사상업력이며 어떤 때는 아주 오랜 시간 그것을 따라 생각한 후에야 비로소 명백해지는데 이 때가 바로 아주 번뇌할 때이며 또한 아주 낙담하는데 왜 자신의 사상을 통제하지 못하는가? 법을 외우고 외우다 ‘청정심’이란 단락에 이르러서야 나는 끝내 사부님께서 이 단락에서 말씀하신 법에 대하여 분명한 인식이 생겼다.
나는 다음과 같이 이해한다. 조용해지지 못하는 이유에는 주객관적인 두 방면의 원인이 있다. 주관적으로는 내가 이미 점점 인식하고 있었지만 객관적으로 우리를 교란하는 것들 역시 매우 많다. 이전에 법에 대한 이해가 깊지 못할 때는 주관적인 원인이 깊기 때문에 쉽게 해낼 수 없다고 여겼으며, 객관적인 원인은 아주 얕아서 단지 인류도덕의 부패와 일체 문화와 문예, 미술 등에서 모두 변이가 발생한 문제로서 오직 우리 수련인이 물결에 따라 흘러가지만 않고 이렇게 미끄러져 내려간 표준으로 가늠하지 않는 동시에 이런 것들을 바로잡기만 하며 된다고 생각했다. 지금 나는 사실 객관적으로도 그리 싶게 해낼 수 없으며 또한 보다 깊은 원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것들이 사람 이곳에 반영된 것은 모두 고층생명이 가져온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현재 사회상 가장 난잡한 것을 포함하여 모두 부동한 신이 가져온 것이다.”(《2005년 샌프란시스코 설법》)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수련인에 대한 그것들의 교란은 단지 낮은 층차의 교란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주 중에서 정법에 의해 건드려진 고층 요소와 대응되기에 우리가 ‘신처럼 되기가’ 이렇게 어려운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이 낡은 세력은 마치 갱신(更新)으로 나가고 중생을 구도하는 데에서 가장 큰 하나의 가장 밀어버리기 어려우며, 가장 방향을 잃을 수 있으며, 진짜와 가짜를 분별하기 어렵고 가장 넘기 어려운 장애와도 같아 새로운 궁체가 탄생할 무렵의 생사존망의 열쇠이고 갱신해야 할 큰 관문이다.”(《2003년 정월대보름설법》) 낡은 세력은 대법제자의 일사일념(一思一念)에 대해 모두 그것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배치했으며 이런 것들은 우리가 감당해야 할 것에 속하지 않으니 반드시 단호하게 배제하고 소각해야한다.
어떤 때 그것들은 내 사상 속에서 극히 강렬하게 반영되는데 청리할 때면 매우 힘이 들고 어떤 때는 마치 뜻대로 되지 않는 것 같다. 왜 이럴 수 있는가? 나는 ‘청정심’을 외우다 갑자기 사부님의 말씀이 떠올라다. “당신은 그 나쁜 에너지를 너무나 두려워하고 있다. 온다면 당신이 그것을 용해시킬 수 있으며 원시적인 기로 변화시켜 자신을 위해 사용할 수 있다.”(《2003년 정월대보름설법》)
그렇다. 만약 자신의 업력에서 온 것이라면 그것을 소거하면 되는데 소거하면 소거할수록 공은 그만큼 자라 오르게 된다. 이것은 아주 좋은 일이 아닌가? 만약 낡은 세력에서 내원한 교란이라면 곧 그것을 전화시키면 되는데 하필 두려워하거나 낙심하고 고뇌할 것이 있겠는가? 오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것을 소각시킬 기회가 많아질 것이며 또한 도처로 다니면서 그것을 찾아 소각하지 않아도 된다.(물론 우리는 일부러 그것을 구하러 다닐 필요는 없으며 자연스럽게 따르면 된다.) 이 한 층의 이치를 깨닫자 나는 아주 가뿐한 감각을 느꼈으며 이 일체 교란은 제아무리 변해봤자 역시 아무것도 아닌데 그것들을 대처하는 것은 너무나 싶다. 바로 ‘새끼손가락 하나로 비빌 나위도 없는 것이다’
5. 생명은 ‘위타(爲他)’의 기제 중에서 승화할 수 있다
요 며칠 어머니와 교류하는 중에 어머니는 내가 대법 일을 하고 있을 때 비록 어떤 때는 태도가 조급하지만 그러나 기점은 법을 위한 것으로 ‘남’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는데 이 한 점이 오히려 가장 중요하고 중요한 것이라고 하셨다.(물론 태도가 조급한 것은 반드시 닦아버려야 할 것으로 누락이 없어야만 비로소 최종적인 원만이다.)
한 수련인으로서 수련이 어떠한지는, 가장 근본적으로 사부와 법에 대한 그의 견정한 믿음의 정도를 보아야 하며, 시시각각 법을 수호할 수 있는지, 우주 중의 일체 바른 요소를 위하여 책임질 수 있는지, 중생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을 수 있는지 하는 이것이 바로 정법시기 대법제자에 대한 요구이다. 일에 부딪히거나 문제를 생각하거나 간에 크고 작은 일 중에서 선택해야 할 때 늘 자신을 둘러싸고 먼저 다른 사람을 생각하지 못하는, 이것은 낡은 우주 변이된 생명의 특징이다. 미래 신(新)우주의 근본속성은 위타(爲他)적인 것으로 갱신(更新)으로 들어가려면 낡은 우주의 이 위사(爲私)한 기제는 반드시 해체해야 한다.
전에는 이 문제에 대해 자세히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어머니의 한마디 말에서 나는 문득 크게 깨달았다. 그렇다. 일체를 다른 사람을 위하여 하고, 법을 위하여 하는 동시에 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승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자신을 생각하지 않고 일체를 법의 각도에 서고, 다른 사람의 각도에 서서, 무사(無私)하게 감당할 때면 사부님께서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과 미래가 필요로 하는 일체 아름답고 고귀한 것을 우리에게 주시는데, 이는 우리 생명의 영원으로도 보답할 길이 없는 것이다.
최근에 나는 이 ‘위타(爲他)’의 기제를 점점 더 뚜렷이 느낄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성심성의껏 수련생을 도울 때, 나는 온몸에 열이 남을 느낄 수 있는데 특히 복부가 그렇다. 그런 후 자신의 집착심이 그것을 따라 소멸되어 없어짐을 느낄 수 있다. 매번 정체의 각도에 서서 정체의 간격을 없애고 동수의 제고를 도우며 추호도 자아가 작용하지 않을 때면 모두 이런 감각이 있었다. 원래 생명은 ‘위타(爲他)’적인 기제 속에서 비로소 진정한 승화를 얻을 수 있다! 설사 자신의 집착을 찾고 자신을 제고한다할지라도, 생각하는 것은 또한 법을 위하고 정체를 위하며 중생구도를 더 잘하기 위한 것이다.
나는 동수들과 서로 약정을 했다. 수련의 길에서 우리는 반드시 시시각각 상대방을 고무하고 격려해야하며 단지 우리가 의식상에서 진정하게 서로 신뢰하고 서로 원용할 수 있어야만 비로소 정체로 하여금 진정하게 강대한 힘을 발휘하게 할 수 있다.
6. 신의 일면을 부활시키자
사상속에 반영되어 나오는 사람의 사유논리를 우리는 반드시 부정해야 하며 신의 사유방식으로 가서 문제를 생각해야 한다. 단지 끊임없이 신의 방식으로 문제를 생각할 수 있어야만 비로소 점차적으로 신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 반면 늘 속인의 사유로 문제를 생각한다면 그럼 사람을 돌파할 수 없다.
최근에 나는 갑자기 사부님의 경문 《도법(道法)》을 외우고 싶은 생각이 들어 한 번 한 번 끊임없이 외웠다. 집에서는 소리를 내서 외웠는데 큰 소리로 외웠고 길을 가면서는 조용히 외웠다. 보기에 지극히 완고한 그런 사람 마음과 사상업력이 단번에 전부 해체되었고 전반 신체는 법에 흠뻑 빠져들어 정말로 ‘하늘은 깨끗하고 몸은 투명해짐(天淸體透)’을 느낄 수 있었으며 정념이 매우 강해져서 신의 일면이 육신의 사상을 주도하는 상태를 체험할 수 있었다. 내가 일부러 가서 무엇을 한 것은 아니지만 주위 환경은 부지불식간에 개변되었고 생각만 하면 무슨 일이든지 이루어졌다. 이것이 바로 신의 일면이 부활된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정법시기 대법제자이며 우리의 책임은 사부님을 도와 법을 바로잡는 것으로 우리는 사부님께서 생각하시는 것을 생각해야 하며 사부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원해야 한다. 낡은 세력이 배치한 일체를 승인하지 말고, 낡은 세력이 망령되이 정법을 좌우지하기 위해 억지로 가한 일체를 승인하지 않으며, 일체 사람의 것과 일체 낡은 우주 생명의 구성요소를 포기해야한다. 오로지 우리에게 ‘수련은 자신이 하나 공은 사부에게 달렸다’는 견정한 신념만 있다면 최후에는 반드시 사부님께서 요구하시는 상태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마난에 부딪혔을 때 첫 번째 생각은 바로 사부님을 생각하고 사부님의 도움을 청하는 것임을 일깨우며 이 글을 맺고자 한다.
이상은 개인이 수련 중의 일부 체득이니 부족한 곳이 있다면 동수들의 자비로운 지적을 바란다.
(영문: http://www.clearwisdom.net/emh/articles/2006/8/10/76606p.html)
문장완성 : 2006년 7월 27일
문장발표 : 2006년 7월 28일
문장갱신 : 2006년 7월 29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원문위치 :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06/7/28/134144p.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