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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사를 깨닫고 공포를 내려놓다

글/대륙대법제자

【명혜망 2006년 8월 6일】사람들은 ‘사망’에 대해 일종의 공포가 있으며 자신은 이 세계에 속해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관념으로 우리는 많은 정황 하에서 정념이 없어진다. 비록 이런 공포는 수련과정 중에서 이미 크게 감소되었지만 여전히 수시로 표현되어 나온다. 일부 수련생은 생명의 위험이 나타날 때, 일부 수련생이 생명을 잃었을 때, 수련생이 악당에 의해 생체로 장기를 적출 당한 악행이 폭로된 후 일부 수련생은 두려워했다. 일부 수련생은 또 사부님을 책망하는데 주요한 원인은 법공부가 깊지 못하고 또 법의 내포를 이해하지 못하여 관념이 늘 사람의 관념에 머물러 있음으로 하여 자신의 정념이 없어 초래된 것이다.

나는 96년에 대법수련을 시작한 후 줄곧 사부님을 굳게 믿었고 99년 7월 악당이 대법을 공격할 때 파동은 있었지만 대법에 대한 높은 법리를 마음 속으로부터 느낄 수 있었다. 사악이 대법을 박해하는 몇 해 동안 큰 일에서는 잘할 수 있었지만 가끔 걱정이 생기고 두려운 사상이 생겼다. 법리를 모두 알면서 해내지 못했다. 나 또한 사색하고, 자신의 바르지 못함을 인식한 후 정념을 강화했다. 가끔 또한 아주 모순적이라고 여겼는데, 기왕에 사부님을 단호히 믿는다면 이것저것 무엇을 걱정한단 말인가? 이는 한 방면으로는 자신이 잘 하지 못할까봐 걱정함이요, 법의 표준에 도달하지 못함으로써 대 마난을 당하거나 생명을 잃을까봐 걱정하여 표현되는 것이며, 한 방면으로는 가능하게 이런 마음이 점차적으로 제거되는 과정 중에서의 한 개 표현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명혜주간》235기에 있는 한편의 문장 ‘우리가 사부님에 대한 바른 믿음은 도대체 얼마나 되는가’란 문장을 보고서 허다한 동감이 있었다. 또한 자신이 사부님을 단호히 믿는 동시에 완전한 믿음을 해낼 수 없으면 믿는 것도 아니다. 항상 중대한 일이 자신에게 미친 영향에서 깊이 파보는 과정 중에서 나는 한 개의 문제를 발견했다. 바로 사망에 대해 인식하는 문제이며 동수들과 교류하고자 한다.

허다한 사람들의 머리 속 깊은 곳에는 일종의 관념이 있는데 ‘사망’은 한 개 생명을 놓고 말할 때 바로 종결이다. ‘사망’은 일종의 고통이고 ‘사망’은 일종의 일체를 잃음이다……. 때문에 일부 수련생들은 이렇게 묻는다. “왜 수련생들은 그렇게 엄중한 박해를 당합니까?” “모모 수련생이 사망했는데 어찌된 일입니까?” “수련생은 법신의 보호가 있다는데 어찌하여 악인들에 의해 생체로 장기를 적출 당합니까?” 등등의 의문이다.

사실 사람은 신이 만들었고 왠선(元神,속인은 영혼이라고 말함)과 육신으로 만들어졌다. 왠선 이야말로 사람의 본질적인 한 개 생명이고 육신은 생명이 인간 세상에 올 때 반드시 걸쳐야 할 옷이다. ‘사망’은 좋은 사람을 놓고 말할 때 잠을 한번 잔 것이고 ‘잠옷’을 벗고 ‘꿈의 고향’에서 ‘현실’로 돌아가는 것과 구별이 없다……. ‘잠옷’이 바로 육신이다(불가는 가끔 썩은 껍데기라고 부름). ‘꿈의 고향’은 인간세상이고 ‘현실’은 그 사람의 생명이 온 고장과 나중에 돌아갈 곳이다(물론 극대한 죄업을 진 사람을 놓고 말할 때 그들의 돌아갈 곳은 더 이상 왔던 곳이 아니라 지옥에 내려가는 것이다. 더욱 심하면 형신전멸로서 말로가 두렵다.)

때문에 사람이 인간세상에서 사는 것은 단지 한 생명이 한 단락 동안 존재하는 상태, 일종의 표현형식이며 생명 과정 중의 한 개 시각구역 내의 수요이다. 당신이 이 인간세상에서 한번 살면서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하는 것은 사업에서 출장 가는 동안 여관에 머무는 것과 같다. 출장이 끝나면 영원히 여관에 머물 수 없고 어차피 집에 돌아가야 한다.(왠선은 항상 인간세상이란 이 여관에 머물 수 없다) 왠선이 가는 것이, 인간세상에서의 표현이 바로 어느 한 생명이 ‘죽었다’이다. 만약 그 왠선이 떠난 후 다시 육체로 돌아오면, 그것의 표현은 생명이 세간에서 부활함이다. 미륵일파의 수련이야기 중에 상사(上篩)가 우박에 맞아 죽은 작은 새를 부활시키는 이야기가 나온다. 며칠 전 명혜주간에서도 한 이야기를 보았는데, 한 어린 제자가 초기에 잘 하지 못하여 그의 세계의 사람들이 악마에 의해 잡아 먹혔다고 했다. 나중에 어머니의 격려 하에 정념으로 걸어 나온 후 파룬으로 악마를 때려죽였고 악마의 배가 터지면서 그의 세계의 사람들이 또 살아났다고 한다.

사실 사부님께서는 여러 차례 이러한 법을 말씀하셨는 바 생명이 이미 어떠한 모습으로 변해도 사부님께서는 모두 그것을 ‘되찾을 수 있다.’ 단지 우리 머리 속에서는 그것이 원만 이후의 일이고 다른 공간의 일이라고 여길 뿐이다. 사상의 깊은 곳에서 원래의 그런 관념을 지워버리지 못했다. 물론 사망에 대한 공포를 내려놓음은 우리 육신생명을 소중히 여기지 않음이 전혀 아니다. 반대로 마침 보귀한 사람 몸이 있음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이 미혹과 고달픈 공간에서 자신을 수련하고 대법을 실증하고 중생을 구도할 수 있다.

가끔 내가 잘 하지 못하고 마음 속으로 평온하지 못할 때 나는 늘 예수가 전법할 때의 한 가지 일을 떠올린다. 예수와 그의 제자가 바다에서 큰 풍랑을 만났을 때 예수는 잠이 들었고 그의 제자들은 배가 뒤집힐까봐 걱정했다. 나중에 정말로 견지하지 못하여 예수를 깨웠다. 예수가 눈을 뜨니 풍랑은 순식간에 아주 평온해졌으며 예수는 그의 제자에게 물었다. “당신들의 신심은 어디에 있는가?”

매번 이 이야기를 떠올리면 나는 마음 속으로 한 가지 일념을 내보내게 된다. 즉 사부님을 단호히 믿고 일체 모두 사부님의 장악 속에 있으며 일체는 모두 정법의 수요이다. 사악한 생명은 기어이 사악하고 극단적인 일을 하려고 하는데 그것들의 변이된 사악한 본성을 표현하여 정법 속에서 도태되는 것 외에 대법제자에 대해 전혀 추호의 영향이 없다.

문장완성 : 2006년 08월 02일
원문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6/8/6/134640p.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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