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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 수 없는 베이징, 다롄 행(상)

글/북유럽 대법제자

【명혜망 2006년 7월 11일】1998년 크리스마스 기간동안 30여 명의 해외 파룬궁수련생들은 모처럼 힘들게 얻은 휴가를 이용하여 자발적으로 파룬따파의 발원지인 중국으로 갔다. 그곳 중국수련생과 법공부하고 교류활동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그 때는 박해 전이었고 우리는 마지막으로 중국에 들어간 것입니다. 비록 몇 년이 지났지만 많은 일들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데 영원히 잊을 수 없습니다.” 스웨덴의 파룬궁수련생 왕(王)여사는 감개무량해 하며 이렇게 말했다.

위대하신 사부님께서 1995년 스웨덴 제2의 도시 예테보리(Goteborg哥德堡)시에 오셔서 7일 반을 열었는데, 이는 서방나라에서는 유일하게 계획적으로 열게 된 설법반이었다. 금발머리에 파란 눈동자의 인연있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로 인해 대법 속에 들어와 수련을 시작했다. 사부님의 홍대한 법리의 진감 하에 일찍이 법을 얻은 서방 수련생들은 중국의 전통문화에 대해 깊이 동경했으며 파룬따파의 발원지 중국에 대해서 더욱 깊은 경의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중국을 자신의 집으로 여겼다. 이후 매년 크리스마스 새해 휴가 때면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천리길도 마다않고 ‘집으로 돌아갔다’. 중국에서 대륙의 대법제자들과 함께 법공부하고 교류하며 함께 정진했다.

1998년 대륙에 들어가 교류할 때 주로 베이징과 대련에 갔었다. 수련생들은 유럽과 미국에서도 왔으며, 대부분 수련생들은 북 유럽의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 덴마트에서 왔다. 그들 중에는 백인도 있고 화교도 있었으며, 몇 년 수련한 노수련생이 있는가 하면 갓 시작한 신수련생도 있었다.

“그 해 우리가 베이징에 간 첫날이 크리스마스였는데 우리는 문화궁에서 꼬마친구들과 함께 연공을 했습니다. 그후 며칠동안 새벽에는 베이징 수련생들과 함께 공원에서 혹은 창안거리에서 연공을 했습니다. 기타 시간에는 사부님의 설법 비디오를 보았고 우리가 머무는 호텔로 베이징수련생을 청해서 수련체험을 교류했습니다. 사실 이전에는 모두 수련생의 집에 가서 교류를 했는데 98년 말 베이징의 분위기가 상당히 긴장되어(이전에 96년 광명일보 사건이 터졌고, 98년 베이징TV 사건 등 중공 정법위의 조종 하에 나타난 파룬따파의 비방사건이 나타났다). 현지수련생들에게 번거로움을 주지 않으려고 우리는 그들을 호텔로 청했습니다.” 왕여사는 이렇게 회고하며 말했다.


문화궁에서 꼬마친구들과 함께 연공


새벽에 베이징 대법수련생들과 함께 연공

배우기를 비기고 수련을 비기며 함께 정진하다

왕여사는 그 시기의 정경을 회억하며 말했다. “우리는 베이징과 다롄에서 매일마다 사부님의 9일 강의를 보았는데, 매일 한 강의씩 보았습니다. 그 후 몇 개 소조로 나누어 현지 수련생들과 교류를 했습니다.”

대법을 수련하면서 매 개인은 신체에서 정신까지 모두 환골탈태의 변화를 겪었고 사람마다 한 단락 잊을 수 없는 경력과 사람을 진감시키는 이야기가 있었다.

“다롄에는 해군학원이 있었는데 학원의 많은 관병들은 파룬궁을 수련했습니다. 일부 사람들의 계급이 아주 높아 사복을 입고 왔는데 일반인과 같아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대학생, 교수, 주부, 각양각색의 업종의 사람들이 모두 있었습니다. 모두다 아주 진솔하고 자신이 수련에서 어떻게 심성을 수련하고 어떻게 고비를 넘겼는지 말했습니다.분위기는 상당히 상서로웠습니다.”

한 수련생은 보기엔 신체가 아주 건장하여 어느 누구도 그가 이전에 암 말기 환자였음을 생각하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사진 속의 그는 뼈밖에 없었고 죽음의 문턱에서 시달리고 있었다. 생명의 길이 곧 끝날 무렵에 그는 법을 얻었다. 처음 수련을 시작할 때 가족들이 그에게 《전법륜》을 읽어주다가 천천히 그가 스스로 볼 수 있었으며 연공도 할 수 있었다. 바로 이렇게 법공부와 연공, 심성수련을 거쳐 그는 암에서 벗어났고 수련 속에서 새로운 삶을 얻었다.

어느 한 할머니는 새벽에 연공장으로 가다가 날씨가 어두워 조심하지 않아 한쪽 다리가 길 옆 모래 우물 속에 빠져 버렸다. 그 당시 할머니는 연공하러 가야지 아무 일 없다고 생각하면서 일어나 걸어갔다. 연공이 끝난 뒤 집으로 돌아가면서 계단을 오를 때 새벽에 넘어진 일이 생각났다. 아주 심하게 넘어졌었는데 무릎을 만지니 조금 아팠다. 무릎관절이 곧 부었고 후에 갈수록 부어서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후에 할머니는 동수들과 교류를 하고 깨달았다. 넘어갔을 때는 연공인의 심태여서 연공하러 가야 한다고 생각하여 자연히 아무 일도 없었다. 그러나 돌아올 때 이 일을 우물에 빠졌기에 평지에서 넘어진 것이 아니라 아주 심하다고 생각하여 자신을 연공인으로 여기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자 곧바로 나타날 상태가 나타나 붓고 통증이 생긴 것이다. “좋고 나쁨은 일념에서 나온다”라고 깨달은 후 2일 뒤 다리의 부기가 사라졌다.

또 심장병 환자가 있었는데 수련 후 신체가 건강해졌다. 이러한 예는 특별히 많았다.

스웨덴 백인 수련생 마리아는 몇 년전 다른 스웨덴 대법수련생들과 함께 중국에 간 적이 있었고 중국수련생들의 법공부 교류활동에 참석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번에는 오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자신의 고향인 핀란드로 돌아가 제1차 핀란드어로 된 9일 법공부 교공반을 열기 때문이었다. 현지의 수련생들과 사부님의 설법비디오를 보면서 현지 수련생들과 함께 핀란드어로 《전법륜》을 번역해야 했다. 다른 수련생들이 중국에 갈 때 그녀도 매우 가고 싶어하면서 동수들이 대신 그녀의 마음을 중국으로 가져 가기를 것을 바랬다.

많은 백인수련생들은 중국수련생들과 함께 법공부를 교류하면서 ‘수련’이라는, 동방문화 속에만 있는 단어를 점차적으로 알게 되었고 파룬따파의 심원한 내포를 알게 되었다. 매 개인 모두 자신이 몸소 겪은 경력과 수련 중에 집착심을 제거한 과정을 이야기했다. 모두들 열심히 교류했기에 매 개 사람의 마음을 더욱 감동시킬 수 있었다. 매 개인의 수련 제고에 도움이 아주 컸다. 인간세상에서 유일한 정토였고 사람마다 모두 매일 심성에 거대한 변화를 일으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으며 매일마다 달랐다. 이미 오래된 그 심령의 먼지를 털고 진정한 자아 본성이 각성하고 있었다.

잊을 수 없는 새해 저녁파티

1998년 12월 31일 신정, 해외 수련생들은 다롄으로 갔다. 동서방 수련생들은 함께 모여 낮에는 법공부를 교류하고 저녁에는 새해 저녁파티를 열었다. 사실 사전에 모두들 준비가 되지않아 수련생들 모두 즉흥적으로 공연했다. 다롄 보도참 참장 가오츄쥐는 자신이 만든 경극을 노래하며 사부님의 자비하신 고도(苦度)에 감사를 드렸다. 그녀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나오는 노래는 사람을 특별히 감동시켰으며 사부님에 대한 모든 이들의 경의과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여 그 자리에 있었던 모든 이들은 눈물을 흘렸다.

일부 사람들은 3,4년간 악기를 만지지 않았지만 감동하여 그 무대에 나가서 연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스웨덴 백인수련생 안더스(Anders)는 대중가요 가수로서 서방의 민요를 불렀다. 적지 않은 수련생들이 자기 국가의 민요를 불렀고 많은 중국수련생들은 어린이의 천진함이 가득한 즐거운 동요를 불렀다. 그렇듯 상서롭고 순정한 마당에서 모두들 열심히 노래하고 연주하고 공연을 했는데 아주 감동적이어서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파티는 새해 종소리가 울릴 때까지 지속되었고 모두들 심상치 않은 1999년의 첫날을 맞이했다.

문장완성:2006년 07월 10일
원문위치:http://www.minghui.ca/mh/articles/2006/7/11/13273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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