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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거로움을 두려워하는 마음

글 / 이름을 밝히지 않음

[명혜망 2006년 6월11일] 사부님께서는 《2006년 캐나다에서의 설법》에서 ‘당신들은 일률적으로 그것을 교란으로 여기고 이 번거로움을 해결하기 위하여 이 번거로움을 해결하는데 당신은 해결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당신이 제고하기 위하여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라고 말씀하셨는데, 최근 몇일 동안 발생한 일들을 결부시켜 볼 때 나는 자신에게서 하나의 아주 강렬한 마음, 즉 ‘번거로움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수련 중에서 모순이 나오면 나는 언제나 그것을 심하게 배척했고, 자신도 모르게 사람의 방법으로 회피했다. 처음에는 번거로움을 의식하고, 그것으로 자신을 제고하는 계기로 삼으려 하지만 매번 자신에게 극복할 힘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러다 보니 쌓인 번거로움은 점점더 커지게 되고, 그만큼 고비도 넘기기 힘들어 지는데, 이때부터 안에서 찾느라고 애쓰고 또한 정진에 박차를 가해보려고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또 느슨해진다. 긴 시간 동안 나는 문제점이 구체적으로 어디에서 나오는지 몰랐고 자신의 사람 마음이 너무나 강하고, 안락을 희망하며, 고생을 두려워하는 관념이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진정으로 모순에 부딪혔을 때면 자신을 정법시기 대법제자의 요구에 따라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고, 문제점을 의식하게 될 때면 모순도 이미 격화된 상태였다.

지금 나는 ‘번거로움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교란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번거로움에 부딪혔을 때, 나는 매번 ‘번거로움을 두려워하는’ 사람의 마음으로 내 정념이 가로 막히게 하는데, 나는 그것을 해결하려고만 했고, 진정으로 깨닫지 못했다. 그러다가 모순이 커지면 안으로 찾기도 하지만 그것이 심각하지 않을 정도라고 생각하면 또 자신을 느슨히한다. 후에 정말 엄중한 후과가 나타나면 그제서야 또 안으로 찾는다. 한동안 나의 수련은 계속 이런 식으로 반복되었다.

내가 이 문제에 대하여 중시하고, 관념을 돌리기 시작하자, 많은 일들이 변화를 가져왔다. 나는 다시는 신변의 일들을 번거로움으로 생각하지 않고, 또한 추진하지도 배척하지도 않았으며 일체 일들이 나타나게 되는 것은 모두 우리들이 세가지 일을 잘하는데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한번은 어머니가 나더러 쌀을 일라고 하시기에 나는 어머니께 밥을 하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느냐고 물었다. 이에 어머니는 나의 질문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쌀을 몇 컵 떠야 하는 것만 강조하였다. 예전같으면 아마 어머니가 자신의 사고방식대로만 생각한다고 하였을 것인데, 이번에 나는 이것은 내가 진상을 어떤 식으로 해야한다는 점화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즉, 몇일 전 내가 동창에게 삼퇴를 권할 때 나는 나의 사고방식대로만 이야기 했고, 동창의 마음속의 매듭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머니는 오늘 또 아버지께서 일을 하는데 있어 준비성이 없다고 원망하셨다. 이 말을 들은 나는 그것 역시 내가 발정념할 때 미리 자신을 청리하는 시간을 넉넉하게 두지 않았다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법공부 할때도 나는 집중을 하지 못하고, 어떤 단락은 그냥 눈으로만 읽어나갔는데, 이런 현상을 나는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한번 나는 그냥 지나친 그 단락을 다시 읽어보니 마침 그 단락은 똑똑히 알지 못했던 곳이었고, 바로 나의 집착을 짚어주는 곳이었다. 그러고 보니 책을 볼때 생각이 다른 데로 샌다는 것은 바로 사람의 마음을 개변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이젠 됐다. 네가 교란을 하면, 나는 곧 너를 잡을 것이다.’

현 층차에서의 얕은 인식이니, 잘못된 부분은 선의로 지적하여 주기를 바란다.

문장완성 : 2006년 6월8일
문장발표 : 2006년 6월11일
문장갱신 : 2006년 6월10일 19:37:38
원문위치 : http://www.minghui.ca/mh/articles/2006/6/11/129978p.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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