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중국대륙 베이징 대법수련생
[명혜망] 오랫동안, 나는 이론적으로는 낡은 세력의 배치를 부정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수련 실천 중에서 때로 이 난(難)이 사부님의 배치인지 또는 낡은 세력의 배치인지 분별하지 못했다. 최근, 사부님의 《로스앤젤레스 시 설법》을 공부하면서 정념으로 낡은 세력의 박해를 제거하는데 대한 제자질문에 답해주신 한 단락 사부님의 설법을 재차 공부한 후 다음의 인식이 따라왔다. 우리 매 사람의 수련 중에 일어나는 대부분의 고험과 난은 우리가 수련을 시작한 날로부터 배치된 것이다 (자신이 잘 하지 못해서 부가적으로 온 일부 난을 제외하고는). 그러나 낡은 세력은 그들이 참여할 것을 주장했고 실제로 정법과정을 교란했다. 그러므로 표면상으로는 마치 사부님께서 배치하신 것 같이 보이지만, 고난의 결과는 다르다. 만약 사부님의 요구를 따른다면 누구나 고험을 통과해 지나갈 수 있지만, 낡은 세력이 배치한 길을 따른다면 이것을 통과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1. 낡은 세력의 배치를 꿰뚫어보다
사부님께서 배치하신 수련의 길은 가장 바르지만, 또한 매우 좁다. 이 길 위에 있기 위해서는 우리가 매 순간 강한 정념을 가질 것이 요구된다. 당신의 정념이 충족하다면, 일찍이 이것을 법 중에 배치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 사부님께서 무엇이든 하실 수 있다. 하지만 정념이 부족하고 표준에 미치지 못한다면 실제로 우리는 사부님께서 배치하신 길에서 떨어진 것이며, 만약 사부님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인가를 하셔야 한다면 원래의 배치에 부가로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 되고, 이미 정법을 통한 모든 것을 다시 해야 하는 것과 같기 때문에 거대한 문제에 연관된다. 그러므로 이것은 쉽게 이루어질 수 없다. 나의 인식으로는, 이것이 왜 사부님께서 정념정행을 유지한 대법수련생들을 확실히 보호하실 수 있다고 말씀하셨나 하는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또 때로 매 사람을 보호할 수 없기 때문에 일을 개변시키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정념이 부족할 때 우리는 특정 문제에서 속인과 같다.
사부님께서 배치해주신 수련의 길은 정법과정에 기초했다. 다시 말하면, 한 제자의 마음이 법 중에 있다면 고난이 왔을 때 그(녀)가 心性(씬씽)을 제고하기만 하면, 그(녀)는 이것을 넘길 수 있으며 이것은 법을 실증하고 중생을 구도하는데 전혀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들면, 절대 사부님께서는 당신에게 병업의 관을 통과하지 못해 죽게 하거나, 당신의 집착을 제거하기 위해 당신을 감옥이나 노동수용소로 선고 내려 당신으로 하여금 끔찍스런 방법으로 일부 다른 고난을 겪도록 배치하지는 않으신다. 대부분 이런 것들은 낡은 세력이 한 짓이다. 낡은 세력의 배치는 개인수련에 기초한다. 다른 말로 하면, 그들은 당신의 수련 중의 누락을 단단히 잡고, 만약 당신이 이것을 완전하게 하지 못한다면, 비록 이것이 당신을 황폐화시킬지라도 주저하지 않으며 전력을 다해 당신으로 하여금 고험을 넘기지 못하게 할 것이다. 게다가 질투심에 의해, 그들은 보통 힘들고 극단적인 방법으로 수련생들을 고험한다. 예를 들면, 당신의 성욕을 제거하기 위해 그들은 당신을 감옥에 넣거나 당신의 정(情)을 제거하기 위해 당신의 가족을 분산시키거나 친인을 죽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험을 지나지 못할 때 낡은 세력의 함정에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한다.
2. 낡은 세력의 배치를 근절시키다
낡은 세력의 배치를 꿰뚫어 볼 수 있어야만 우리는 그것을 부정하고 뿌리 뽑을 수 있다. 나는 한 때 노동수용소에서 “전화”했고, 수련의 길에 남긴 이 오점을 통렬히 후회했다. 때로 나 자신을 다시 그 상황에 놓아보는 상상을 하고 궁리해보았다. “내가 낡은 세력의 배치를 완전히 부정할 수 있는가, “전화”되기를 거부할 수 있고, 정념으로 걸어 나올 수 있었을까?” 그러나 노동수용소의 사악한 환경은 물론, 법에 대한 나의 인식과 당시 내가 지탱할 수 있는 힘을 고려해볼 때, 나는 내가 그 기준에 도달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전화”된 것은 피할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내게는 선택이 없었다. 나는 모든 이들의 길이 다르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것이 당시 나의 층차였고, 이에 대해 나는 무기력했다. 그러나 《로스앤젤레스 시 설법》과 《도법》을 공부한 후, 내가 수련 중에 그렇게 큰 관을 넘지 못한 것은 “피할 수 없는 것 (必然)”이 아니었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이것은 내가 낡은 세력이 배치한 길을 걸었기 때문이고, 그 난은 내가 통과하기에 너무 큰 고험으로 변해버렸고, 드디어 “필연”으로 변했던 것이다!
내가 낡은 세력의 배치를 꿰뚫어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것들을 승인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내가 어떻게 “전화”되지 않을 수 있었을까를 생각하기 전에 무엇보다 먼저 나 자신을 노동수용소에 돌려놓는 상상을 해서는 안 되었다. 그것은 이미 내가 낡은 세력이 배치한 난 속에서 수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식의 사고(思考)는, 비록 내가 단식항의를 해서 정념으로 사악의 소굴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해도 손실은 거대했을 것이다. 정말이지, 낡은 세력의 길을 따르는 데는 위험투성이다. 이것을 나는 근본적으로 부정해야 했다. 다시 말하면, 나는 노동수용소 자체를 부정해야 했다. 다른 예를 들면, 나는 체포되고 싶지 않았지만 무의식적으로 나는 여러 차례 체포될 것을 준비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나는 보통 직장에 양복을 입고 다닌다. 그러나 ‘내가 체포되어 구치소에 갇히게 되는 경우에 무엇을 입어야 하나?’ 라는 생각에서 나는 백화점에 가서 구치소에서 입어도 될 평상복을 샀다. 세 번째 사례가 어느 날 일어났다. 나의 아버지가 내게 말했다. “만약 네가 이처럼 계속 나간다면, 조만간 너는 재난을 만나게 될 것이다. 네가 감옥에 갇히게 된다면 너는 참아낼 수 있느냐?” 내가 대답했다. “이것들은 모두 나의 개인적인 행동입니다. 나는 큰 활동 조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갇힐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기껏해야 노동수용소일 겁니다.” 체포된 후, 나는 주저하지 않고 내가 한 일을 인정했는데, 그것은 나를 박해하고 선고한 사악에게 협조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만약 불법체포가 나의 운명에서 불필요한 마난이라고 내가 믿었다면, 나는 사부님께서 배치하신 길을 따름으로 마난을 정념으로 제거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부님께서 《미국 서부 국제법회설법》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만약 정말로 곤란 앞에서 염두가 아주 바르다면, 사악의 박해 앞에서, 고난 앞에서 당신이 한 정념이 단호한 한마디 말은, 사악을 즉석에서 해체시킬 수 있으며, (박수) 능히 사악에게 이용된 사람이 고개를 돌려 도망하도록 할 수 있으며, 당신에 대한 사악의 박해가 종적 없이 깨끗이 사라지게 할 수 있으며, 당신에 대한 사악의 교란이 소실되고 자취를 감추게 할 것이다.”
명혜망에서 우리는 많은 수련생들이 바로 이렇게 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법에 대한 나의 인식이 얕았기 때문에, 나는 무의식중에 낡은 세력이 배치한 어렵고 위험한 길을 택했고 그래서 나의 수련에 파괴적인 손실을 입혔다.
여기서 나는 장기적출의 대상이 된 수련생들을 생각해본다. 나의 견해로는, 여러 개인적인 그리고 역사적인 이유 때문에 낡은 세력이 그들에게 매우 사악한 배치를 했고, 이것이 지금 우리가 보는 비인간적인 도살행위이다. 낡은 세력은 대법제자들, 특히 죽음의 수용소 밖에 있는 대법제자들이 그런 환경 중에서 대법과 사부님에 대해 어떤 의심을 품고 있는지 보려는 소위 고험으로써 이 짓을 했다. 죽음의 수용소에 있는 수련생들은 대부분 2000년과 2001년에 갇힌 수련생들이다. 그들은 법과 사부님에 대해 아주 확고부동했지만, 그들 중 대부분이 사부님의 최근 설법을 읽지 못했고 낡은 세력의 배치를 완전히 부정하는 원리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큰 범위로 보면 비인간적인 박해를 수동적으로 견뎠고 박해를 부정하고 사악의 소굴을 벗어 나오도록 하는 사부님께서 배치하신 길을 따르지 못했다.
3. 낡은 세력의 일체 교란을 배제하다
낡은 세력의 배치를 배제하는 것을 말하게 되어, 나는 일부 극단적인 기분이나 불안정한 심리상태는 낡은 세력으로 하여금 우리의 일부 집착을 과장시킴으로써 교란을 가져오는 결과를 만든다는 것을 인식했다. 이것은 그들이 우리의 매 생각을 조작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과거에 나의 수련상태는 항상 자부심과 열등감 사이를 왔다 갔다 했고, 나는 “중간을 택하는 것”을 잘 하지 못했다. 속인들 중에서 나는 학력이 높고 아주 유능했다. 수련을 시작하기 전에 나는 젊고 거만했다. 법을 얻자마자 이것은 바로 《홍음, “연귀성과”》에서 사부님이 쓰신 것과 같았다.
“사부님을 찾은 지 몇몇 해던가
하루아침 직접 뵈옵게 되었구나”
나는 강렬하게 감동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근기가 좋고 다른 사람들보다도 더 큰 인연이 있다고 생각했다. 낡은 세력은 나의 환희심을 확대시켜 내가 다른 사람의 견해를 듣지 않는 정도로까지 나의 거만함을 키웠다. 어떤 경우에는 극단적으로 되어 솔선해서 사악에게 나 자신을 폭로했고 박해를 초래했다. 노동수용소에서는 사악의 길을 걷는 그런 자들의 거짓말을 믿었고, 굽은 길을 걸었다 (대법을 포기한다는 성명서에 서명함으로써). 나중에 내가 저지른 잘못을 깨닫고 나자 죽고 싶도록 슬펐다. 그런 다음 나는 큰 좌절감을 느꼈고 내가 아직도 수련할 수 있을지 망설이게 했다. 사실, 지금 생각해 보면 양극이 바로 그들의 함정이 아닌가? 본질적으로 그들이 원하는 일체는 당신으로 하여금 자격을 잃게 만들어 실패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물론 낡은 세력이 나를 교란할 기회를 가진 이유는 여전히 나의 집착에 있다. 예를 들면, 자부심과 열등감은 사실 “자신”을 내려놓지 못하는데서 오는 체현이다. 일을 비교적 잘 했을 때 느끼는 자부심은 실제로는 아직도 자신을 실증하고 싶어 하는 것을 뜻한다. 그렇지 않고 이것이 사부님의 자비로운 배치이고 대법의 위력 때문이라고 깨달았다면 자랑스러울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지금 나는 왜 수련을 잘 하는 수련생들이 항상 그처럼 겸손한가를 이해한다. 이것이 덕(德)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들이 의도적으로 겸손을 수련한 것이 아니다. 그 경우라면 이것은 행위가 될 것이다. 오히려 견정한 수련을 통해 그들은 대법의 뜻을 이해하고 정법에서의 그들의 역할을 분명하게 알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을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열등감이 “겸손”으로 나타나지만, 이것은 늘 자신이 충분치 않다고 느끼게 한다. 이것은 한 수련자가 정진해서 따라잡고자할 때의 상태와는 같지 않으며, 오히려 이것은 종종 무엇인가 포기하고 무기력함을 느끼게 한다. 사실, 이것은 “거만”하고자 했지만 실패한 결과이고, 이유는 여전히 “자신”에 대한 집착이다. 반대로 중생을 구도한다는 단 한 가지에 우리의 마음이 있다면, 그(녀)는 절대 그 자신의 느낌 따위는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부심이던 열등감이던 느낄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바로 내가 내려놓지 못한 이 “자신”에 대한 사고방식에서 낡은 세력의 영향을 완전히 배제하지 못했던 것이다. 예를 들면, 나는 동수들에게 “엄격”하다. 이것은 바로 낡은 세력이 생각하는 방식과 똑같은데,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우리는 당신을 올라가지 못하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낡은 세력을 부정하는 것은 낡은 세력의 박해를 부정하는 것만이 아니라, 이것은 또한 그들의 사고방식과 우리 마음속에 있는 그들의 교란을 부정하는 것이다. 더구나, 부정을 단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한 사람의 정념이 얼마나 강한가를 반영하는 것이고 어떻게 철저하게 낡은 세력을 부정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정념은 법에서 나온다. 그런고로 조용한 마음으로 법공부하는 것을 항상 제일 첫 순위에 놓아야한다.
발표일자: 2006년 5월 25일
원문일자: 2006년 5월 24일
문장분류: [수련마당]
중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6/4/29/126362.html
영문위치: http://www.clearwisdom.net/emh/articles/2006/5/25/7371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