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대법제자
【명혜망 2006년 5월31일】 고달픈 인생에 대해 회억하고 인생의 허다한 아쉬움에 대해 잊지 못하는 것은 한 사람으로서 감정에 빠지게 만드는 정상적 심리활동이다. 그러나 세간의 명리정을 버리고 세속의 구애를 받지 않는 수련인을 놓고 말할 때 이 일체를 포기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우리 오늘날 허다한 동수들 사이에서 또 일정한 정도로 나타나며 심지어 아주 집착한다. 그리고 자신과 주위 동수들의 중시를 일으키지 못하여 ‘정’이 범람하게 하는데 이에 대해 특별히 일깨워주고자 한다.
최근 여러 동수들에게 나타난 이 방면에서의 문제는 나로 하여금 안을 향해 사색하게 했고 나로 하여금 자신에게 문제가 없는지를 찾게 했다. 그것은 아주 깊이 있어 쉽게 발각되지 않았다.
나의 부모는 모두 악당 기관의 간부로서 많은 정치적 운동을 겪었다. 그리고 그들 각자의 내심은 아주 냉담하고 감정을 몰랐다. 때문에 나는 어릴때부터 가정의 따사로움을 경험하지 못했다. 많은 이웃과 동료들이 나에게 항상 묻는 말이 “당신의 어머니는 친 어머니입니까?” 였다. 그당시 나는 아주 궁금했는데 후에야 비로소 남들의 부모는 이렇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이는 나로 하여금 아주 실의감에 빠지게 했다.
이런 원인과 가정폭력으로 나는 부모와 적게 대화했고 대법을 수련한 후 비로소 관계가 완화되어 점차적으로 함께 어울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근래에 나의 부모님은 분가하고 또 이혼까지 하여(이미 70, 80세 임) 우리 아들, 딸들은 정력이 아주 소모되고 많은 시간을 지체했다. 이로 인하여 오랫동안 나의 내심은 평형을 이루지 못했고 안을 향해 찾으며 자신의 원인을 찾았지만 늘 찾지 못했다. 가끔 이런 생각도 했다. “내가 그들과의 원한이 아주 많아서 어릴 때 그들이 나를 좋게 대하지 않은 것이다. 내가 늘 평온을 이루지 못했는데 관념을 바로 잡지 못해서인가?” 이렇게 바로 잡자 조금 변화가 있었지만 늘 정확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들과 교류할 때 항상 일종의 간격이 있었고 특히 진상을 알리는 효과에 영향을 주었다.
요즘 나의 주위에서는 몇가지 일이 발생했다. 지난달 나는 간접적으로 한 수련생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 “저는 지금까지 진정한 사랑을 받은 적이 없는데 이는 저의 인생에서의 큰 아쉬움입니다.” 옛날 그녀의 한 연인이 지금 늘 그녀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진상을 알릴 수 있다고 여기고 그와 여러차례 접촉했고 아주 많은 지난날을 회억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날마다 이렇게 말했다. “남편은 저의 감정을 모르고 저는 진정한 사랑을 받은 것이 너무 없어요. 저의 이 일생은 너무나 고달프네요!”
그리고 한 노년수련생은 그녀의 아들과 딸에게 “나와 너의 엄마 이 세대는 무척 고달펐다. 너희들은 우리의 지난 경력을 이해해야 하는데 너무나 쉽지 않았어… …” 그리고 끝없는 넋두리가 나온다. 마치 속인들이 말하는 ‘정감의 수문을 열어 물을 내보내다’와 같았다.
인생 고난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고 감상하는 것은 거의 매 사람의 특징이고 매 사람의 인생고락은 모두 한부의 책을 쓸 수 있을 정도이다. 대부분 연극 각본과 같은, 심지어 전기문적인 색채를 지니고 있어 일부 사람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회억하게 한다.
한 수련생은 자신의 아내와의 관계가 괜찮더라도 가끔 아내가 마성이 커지기만 하면 여전히 관용하기 어려워했다. 최근에 그는 자신이 내심으로 아내에 대해 불만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런 불만족은 연애시절부터 시작되었는데 그 당시 관념은 ‘그녀는 나의 마음 속의 애모하는 그런 유형이 아니다’ 라고 여겼기에 이는 자신의 인생에서의 아쉬움으로 생각했다.
사부님의 설법에서 ‘마음 속에 애모하는 그런 유형’에 관한 정황을 말씀하신 적이 있으시다. 생각해보라. 만약 현재 정말로 당신이 애모하는 그러한 유형이 있다면 또 어찌할 것인가? 수련인으로서 당신은 이 일체를 내려놓아야 하지 않는가? 수련인으로서 고비(關) 한 개가 더 많아진 것이 아닌가? 당신이 제거해야 할 집착이 더 많아진 것이 아닌가? 물론 당신이 반드시 이를 집착한다면 당신은 수련하지 않는 것이다. 있고 없고는 한 수련인을 놓고 말할 때 도대체 무엇을 가져다 주겠는가?
이와 유사하게, 한 노년수련생은 자신의 아내에 대해 각 방면으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그들의 결합은 악당이 계급투쟁을 한 특수한 산물이기 때문이며 그의 그 당시 처지는 ‘억울하게 결혼’한 것이기에 항상 아쉬움을 지니고 있었다.
사실 인연의 각도에서 말할 때 인연은 어떠한 원인이든 지간에 모두 우리 자신의 행위에 의한 필연적 결과이며 모두 당신의 ‘소원’에 의해 초래된 것인 즉, 어찌 불만을 말할 수 있겠는가? 아울러 상대방의 고통은 가능하게 우리보다 더욱 클 것인데 왜 상대방을 위해 고려하지 않는가? 사부님의 법에서 나 또한 이렇게 깨달았다. 즉 천지는 이미 결혼하는 사람을 위해 증언을 하여 우리는 사람의 각도에서 반드시 하늘의 뜻을 받들어 상대방을 책임져야 한다.
이 몇 가지 일에서 나 또한 자신의 ‘인생의 아쉬움’을 보았다. 몇년 전, 나는 퇴근이 아주 늦었지만 아내는 늘 나를 기다려서 밖에서 함께 식사했다. 나는 아주 반감을 느꼈고 식사시간이 너무 늦다고 원망했다. 아내에게 어떻게 말해도 안되었다. 지금 나는 알게 되었는데, 나는 자신이 항상 아주 고달프게 느껴져 남이 배려해줄 것을 생각했던 것이다. 어릴 때 따사로움을 받지 못해 지금 얻고 싶어하고 집에 돌아가면 만들어진 음식을 먹는 것이 아주 큰 소원이 된 것이다. 사실 이것은 인생의 아름다움에 대한 소원과 추구이고 또한 사람이 되는 것을 좋아하고 사람의 일부 아름다움을 향수하길 좋아하는 것이며 사람을 포기하려고 하지 않음이다. 때문에 매번 점심시간에 부모의 집을 지나가면서 ‘집안의 만들어진 밥과 반찬’을 먹지는 못하고 오히려 부모의 집에서 가까운 작은 가게에서 대충 먹을 수 밖에 없었다. 마음에서는 항상 한 가닥의 실의감이 있었는데 가끔 동수의 집 혹은 친척집에 가서 ‘만들어진 밥’을 먹을 때는 아주 ‘미안하며, 따사로왔다.’ 이는 사람의 물건을 누리는 것이 아닌가?
사실 반대로 말하면 당신은 생사와 생명의 무상함을 꿰뚫어 보았는데 이 이른바 ‘따사로움’과 ‘아름다움’은 사람의 덧없이 사라짐이 아닌가? 사람의 정이 아닌가? 정은 사적인 것이고 저급생명의 생존방식인 즉 당신은 이 일체를 벗어나야 하지 않는가? 수련인에게 이런 것을 주면, 당신은 사람의 이념을 고수하고 마땅히 순응해야 할 진정한 더 높은 법리를 포기할 것인가?
자신의 부모에 대한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당신이 따뜻한 가정에서 태어나 당신을 사랑하는 부모를 얻은 것이 당신이 금생에서 사람이 되는 의미인가? 정말로 따사로움을 얻었다고 해도 역시 결국에는 제거해야 할 정이고 모든 사람에 대한 자비를 닦아내야 하지 않는가? 있고 없고는 수련인을 놓고 말할 때 어떤 의미가 있는가?
단지 이러할 뿐이고 이 일체 모두 당신의 업보(業報)인 즉, 모두 당신 자신이 걸어온 것이다. 아울러 이 만고에도 얻기 힘든 대법이 전해지는 시기에 이는 당신의 수련상태로 되었으며 이른바 이 ‘고달픔’ 속에서 수련해야 하다. 이 ‘고달픔’은 단지 한차례 수련방식에 불과한데 아쉬움과 실의감을 말할 수 있겠는가?
오늘날 역사의 이 무대가 곧 결속되는 이 찰나에 당신이 잘했거나 못했거나를 막론하고 일체는 모두 곧 지나간다. 모든 이 일체의 이른바 ‘인생의 짧고 고달픔’은 모두 지나갈 것이고 ‘오천 번 윤회의 구름과 비 뒤덮인 먼지 털어버리고 길고 짧음을 보나니’, ‘유유한 세월 천백년 지났거니 정과에 맺은 인연 뭇 연꽃으로 피는구나’ [《홍음》(2)]이다. 우리의 사명이 크기에 천만년의 윤회의 고달픔은 모두 가치가 있다. 중생이 위기에 처한 시점에 아직까지 자아의 슬픈 정감을 말할 것인가? 우리는 오로지 박대한 일념만 있어야 한다. ‘대극에서 누가 풍류주인고, 중생을 위해 단지 한 번만 한다.’
문장완성 : 2006년 05월30일
문장발표 : 2006년 05월31일
문장갱신 : 2006년 05월31일 14:10:37
원문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6/5/31/129305p.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