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헤이룽장(黑龍江)대법제자 메이(梅)
[명혜망 2006년 5월 16일] 사부님의 이 발표된 뒤 우리 모두 시간이 더욱 긴박함을 느끼게 되었는 바 정법은 이미 최후의 단계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신의 길을 걷고 있는 정법시기 대법제자로서 사부님의 이번 설법을 학습한 후 얼마나 정진하였는가? 아직도 이전 상태인 것은 아닌가? 현재 중국의 비밀수용소를 두고 보면, 사악은 매 시각마다 우리가 가진 집착의 빈틈을 뚫고 들어와 박해하려고 하며 우리를 끌어 내리려고 한다. 우리는 정체적인 빠른 제고가 필요하다. 물론 법공부를 잘하는 것은 가장 중요하다.
명혜망에는 법암송에 대한 교류 문장이 매우 많이 실렸는데 아직도 법암송을 하지 않은 동수들이 이런 문장을 본 뒤 조금의 깨달음이나마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특별히 노년 동수들은 반드시 자신의 나이에 대한 관념을 돌파해야 하는바 늘 스스로 나이가 많아 법암송을 못한다고 생각하지 말아야한다.
사실 수련인은 나이가 많고 적음을 구별하지 말아야 한다. 신은 당신이 속인 중에서 나이가 많다 하여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그리고 깨달음이 똑똑하지 못한 동수들은 단체 법공부 때 문제점을 제출하여 여러 사람들과 함께 교류해야 한다. 예를 들어 어떤 수련생은 지금까지도 무엇이 법에서 법을 인식하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법을 잘 학습하지 않아 법리가 명확하지 않은게 매우 뚜렷하다. 우리 지역에는 이런 동수들이 한 두명이 아니며 나 자신도 진즉에 명백히 깨달아야 할 것을 지금까지 깨닫지 못함을 알고 있으나 주변에 있는 동수들에게 물어보는 것은 쑥스러워한다. 결과적으로 자신의 정념 정행을 저애하고 세인을 구도하고 제고되는데 영향을 받게 된다.
예를 들어 말하자면, 한 번은 수련생이 가족들이 자신에 대해 불공평한 태도를 보인다면서 하소연했다. 그러면서 이제부터는 그들을 무시해 버리겠다면서 우리의 에너지 마당이 왜 바르지 못한 요소를 바로 잡지 못할까고 했다. 사실 이런 생각은 이미 법을 염두해 두고 있지 않은 것으로 자신에게서 문제를 찾지 않을 뿐더러 법을 원망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가족이 자신에게 불공평한 태도를 갖는다는 생각 자체가 이미 속인의 층차에 떨어진 것이다. 속인과 같은 층차에 있는데 어떻게 속인을 제약할 수 있겠는가? 만약 이 수련생이 가족들의 태도를 자기의 업력으로, 혹은 버릴 집착이 있기 때문에 나타났다고 생각하고, 안으로 찾고, 집착을 버리며 선한 마음으로 가족들을 대한다면 이것은 곧 법에서 법을 인식하는 것이며 정념 정행하는 것이다. 이렇게 법에서 인식한 초상적이고, 순정한 마당이야말로 가족들의 바르지 못한 요소를 자연히 제약하게 되는데 이는 심성이 제고되면서 자연적으로 체현되는 것이지 인위적으로 어떻게 하겠다고하여 바로 어떻게 된다는 것이 아니다.
또 어떤 동수들은 ‘정념’이 담긴 일념에 대해 명확하지 않아 가슴 아프게 하는 사례들도 있다. 우리 한 수련생은 주동적으로 3가지 일을 매우 잘했다. 어떤 사람들이 그에게 안전에 주의하라고 일깨워 주었을 때 그는 말하기를 “나는 정념이 충족하니까 괜찮아요.” 그러나 그는 정말로 정념이 충족한가? 사실 그는 평소에 일에 부딪치게 되었을 때 속인의 마음이 매우 강했는데 마지막에 육친정의 집착으로 넘어진 후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그는 사망할 때 까지도 육친정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지 못했다.
한 사람이 정념이 강하다는 것은 평소 일사일념이 모두 법에 있어햐 한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바로 법에서 법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념이 있을 때 곧바로 정행이 있을 수 있는 것으로 정념정행 할 수 있음은 바로 정진 중에 있는 것이다. 날마다 법학습과 연공을 한다해도 법에서 법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체조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사실 이 역시 근본적으로 수련인인가 속인인가를 구분하는 문제이다. 만약 주동적으로 법에 동화되어 세 가지 일을 잘 한다면 우리는 바로 사부님이 배치해 주신 길을 걷는 것인바 낡은 세력이 배치한 일체를 철저히 부정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곧 낡은 세력이 배치한 기제 중에 있는 것으로 사부님은 낡은 세력의 ‘반(盤)’을 승인하지 않으신다. 그렇다면 우리의 행동과 사상은 반드시 낡은 세력의 배치를 철저히 부정해야 한다. 오직 이렇게 해야만 비로소 사존님의 자비고도(慈悲苦度)를 저버리지 않고, 중생의 소망을 저버리지 않으며, 인간 세상에 온 우리의 목적을 저버리지 않게 될 것이다.
현 단계에서 인식한 약간의 것이다. 부족한 점에 대해서는 동수들의 자비한 시정을 바란다.
문장완성 : 2006년 5월 15일
원문위치:http://www.minghui.ca/mh/articles/2006/5/16/127898p.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