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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적’ 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글 / 중국대륙 수련생

[명혜망] 한 단계의 기간 중, 내 주위에 있는 많은 수련생들이 고난을 만나고도 꽤 오랫동안 거기서 돌파해 나오지 못하거나, 법리상에서 무엇인가 애매모호하여 똑똑히 보지 못하고, 자연스러움에 따른다고 말한다. 그들이 이것을 쉽게 말하는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이것을 낡은 세력이 배치한 박해라고 분명하게 인정하지 않으며 수동적으로 박해를 견디고 있었다. 이 현상은 일부 수련생들 간에 보편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사부님께서는 《정진요지, ‘도법(道法)’》에서 말씀하셨다.

‘당신들도 ‘자연’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필연’이란 원인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실 ‘자연’이란 사람이 우주에 대하여, 생명에 대하여, 물질의 현상에 대하여 해석하지 못하므로 말미암아 스스로 그럴듯하게 하는 말이다. 그들 역시 그 ‘자연’이란 자체가 무엇인지를 생각하지 못한다. 이런 의식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당신들은 이 일체 시달림(魔難)은 모두 필연적이고 바로 이러하다고 인정하므로, 일종 막무가내한 소극적인 상태가 생기게 된다. 때문에 당신들 사람의 일면은 알아야 한다. 더욱 주요하게는 법을 얻은 그 일면이 똑똑하여야 한다.’

‘자연’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신(神)들이 인간세상의 일체를 배치했고, 낡은 세력은 일들의 자연적인 과정으로 파룬궁에 대한 박해를 배치했다. 만약 수련생들이 박해가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들은 소극적으로 된다. 이 원리를 볼 수 없게 되면, 다음의 세 방면에서 문제가 나타나게 된다:

1. 낡은 세력의 박해를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한다

한 수련생이 박해를 받고 그의 가족 문제를 잘 처리하지 못했다. 그의 아내가 그와 이혼하려 했다. 이 수련생은 오랫동안 이 마난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그의 인식을 제고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의 아내가 이혼하려고 하자 그는 말했다. “자연적으로 되어감에 따르라.” 다른 수련생들 또한 똑같은 말을 했다. “자연적으로 되어감에 따르라.” 낡은 세력은 수련생들의 가족 내에 이혼을 배치함으로써 ‘파룬궁은 가정을 파괴한다’는 인상을 만들어내고자 했다. 그들은 넓은 범위에서 부정적인 영향을 만들어 내려고 했고 그런 다음 이 엄중한 환경을 이용해서 수련생들을 고험하려고 했다. 이것은 法에 대한, 수련생에 대한, 그리고 중생에 대한 박해였다. 수련생의 아내는 사악이 통제하는 ‘희생자’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되어감에 따른다’는 것은 바로 박해를 견뎌내는 것이고, 이것은 중생을 파괴하는 것이 된다.

집을 수리하게 된다든가, 강제로 직장에서 쫓겨난다든가, 차를 산다든가, 일에 바빠진다거나, 병원으로 아이를 데려가야 한다든가, 갑자기 부모를 모셔야 한다든가, 등등의 많은 시나리오들이 있다. 만약 당신이 이러한 사건들이 실제로는 박해라는 것, 그래서 발정념을 하고 내면에서 당신 자신의 누락을 찾지 않는다면 당신은 악순환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 예를 들면, 당신이 어린아이를 병원으로 데리고 가야 한다거나 당신의 부모를 편안하게 해야 한다거나 했을 때 당신은 시간을 빼앗기게 될 것이다. 또한, 만약 일부 수련생들이 속인의 관례에 부합하지 않고 어린이나 부모님을 돌보지 않았다면, 사악은 말할 것이다. ‘파룬궁 수련생들은 가족을 돌보지 않는다.’

2. 인간 관념과 상식을 고수(固守)하다

자연에는 사계절이 있으며, 인간에게는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있다. 이런 것들은 자연적인 일처럼 보인다. 사람들은 그러한 순환이 왜 있는지 설명하지 못하며 그런고로 이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현상을 설명하면서 ‘자연적’이란 말을 사용한다. 현대인들은 자신들을 속이기 위해 이 말을 사용한다.

사실 이 일체는 오늘날 파룬따파(法輪大法)을 전하기 위해 사계절과 인체의 규율을 포함한 허다하고도 허다한 ‘자연의 규율’ 일체를 神들이 의도 있게 안배한 것이다. 세간의 만물이 法을 위해서 운영되며 작용하고 있다. 우리가 法을 실증할 때, 절대 어떠한 교란도 인정해서는 안되며 견결하게 이것을 제거해야 한다. 法을 원용시키며 대법제자들이 수련 성취하는 것이 근본이다. 그렇기 때문에 법을 실증하는 수련 중에서 정법(正法)이 우리에게 요구하기만 한다면 인간의 일체 ‘자연규율’을 돌파해야 한다.

아주 간단한 예는 여성들의 월경이다. 여성신체의 ‘자연법’에 따르면 나이가 든 사람들은 더는 월경이 없게 된다. 하지만 개인수련에서 이 순환을 바꿀 수 있다. 물론 이 예는 개인수련 단계의 상태를 설명할 따름이다. 여기서 주로 이야기하는 것은 정법시기(正法時期)에서의 문제들이다.

일부 수련생들은 ‘자연의 규율’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초월하지 못했을 때, 그들은 그것들을 돌파하지 못하게 된다. 예를 들면, 일부 수련생들은 말한다. “나는 잠을 적게 잘 수 없다.” “인간에게는 8시간의 수면이 필요하다.” “하루에 다섯, 여섯 시간을 자는 일부 수련생들은 오래되면 결국에는 지치게 된다.” “나는 늙어서 젊은 사람들처럼 법을 쉽게 외우지 못한다.” 또는, “내 기억력은 나빠서 나는 법을 외우지 못한다.” 이 모든 관념은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당신이 어떤 것을 받아들이게 되면, 당신은 이에 구속되고 이것이 현실로 된다. 이런 식으로 수련생들은 그들 자신의 인식을 확증하기 위해 현상을 이용하는 경향이 있고, 이것은 또한 인간 관념을 더욱 깊고 강하게 만든다.

다른 예를 들어보겠다. 요즈음 눈이 심하게 내리는데 한 수련생이 말한다. “운전하기에 너무 미끄러우니 우리의 계획을 지연시키고 먼저 다른 일들을 합시다.” 나는 당시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다른 두 수련생이 같은 말을 할 때 나는 이것이 옳지 않다고 느꼈다. 이것은 두려움에 대한 집착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이것은 낡은 세력으로부터 오는 교란에 의한 것이었다. 만약 우리가 이 교란을 정념으로 모두 부정할 수 있다면, 그때 이것은 존재할 여지가 없게 되고 우리가 ‘자연현상’이라고 생각하는 일로 인한 교란이 제거될 수 있다.

3. 자신을 마비시키는 구실들

사부님께서는 《스위스 법회에서의 설법》에서 말씀하셨다,

“내가 여러분에게 알려주겠다. 그 자연스러움에 따르라는 이 말은 어디에서 말하는가를 보아야 하는데 수련 중에서는 자연스러움에 따라야 하지만 우리는 또 인위적으로 자신이 좋지 못한 그 일면을 억제해야 하며 또 노력하여 닦아야 하는데 이것도 또한 그 자연스러움에 따르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말하는 자연스러움에 따르라는 그 개념은 과거에 말한 것과는 같지 않은바 일체에 모두 관여하지 않고 거기에 앉아서 마치 출가한 사람처럼 하는 그것이 자연스러움에 따르는 것인가, 이런 것이 아니다. 절대로 이런 개념이 아니다.”

일부 수련생들은 ‘자연의 흐름대로’ 그리고 ‘자연적인 현상’을 따름으로 해서 자신들을 마비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자신의 집착심을 감추고 정진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한 수련생은 개인수련 상태에 머물고 있으면서 진상하는 일에 아주 수동적이다. 수련생들이 그에게 상기시켜 줄 때면, 그는 말한다. “이것이 나의 현재의 상태이다. 당신들은 내게 압력을 주는 것이 아닌가? 나는 자연의 흐름을 따라야 한다.” 그것은 바로, 그의 이해가 높아지지 않는다면 그는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하라고 하신 세 가지 일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는 그가 자연적으로 개변될 때까지 기다린다. 그는 단지 그가 기꺼이 하고자 했을 때만 하고자 한다. 낡은 세력이 원하는 것은, 그가 중생을 구도하고 법을 실증하고 사부님께서 안배하신 길을 걷는 것을 방해하려는 것이다. ‘자연스러움에 따른다’라는 관념은 진정하게 낡은 세력의 배치를 인정하는 것이다.

일부 수련생들은 그들이 다른 수련생들의 좋은 상태를 보게 되면 그들이 정진하지 않는 구실을 찾는다. 예를 들면, 한 수련생이 9일 동안 《전법륜》을 외웠다. 대부분의 수련생들은 이로 인해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 하지만 일부 수련생들은 말한다. “우리 모두가 같은 층차에 있을 수 없고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는 안 된다. 내 상태는 다만 이러할 뿐이다. 사실, 어떤 수련생은 이 공능을 가지고 있어서 그는 오래전에 사부님의 경문을 암송했다. 이것은 그가 늘 정진했기 때문에 그 원인으로 ‘자연스러운’ 것이다.

나는 명혜주간을 읽고 수련생들의 정념정행에 감동을 받는다. 내가 이것을 다른 수련생과 교류하면 그가 말한다. “사부님께서 일체를 배치하셨다. 우리 각자의 길은 모두 다르다. 그는 다만 역사적 사명을 가졌을 뿐이다.” 표면상에서 이것은 좋게 들릴 수 있지만, 다른 수련생들이 그보다 더 정진한다는 것을 그가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는 자신의 정진함이 부족한 것을 ‘그가 이 상태에 있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구실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발표일자: 2006년 2월 9일
원문일자: 2006년 2월 9일
문장분류: [수련마당]
중문위치: http://minghui.ca/mh/articles/2006/1/22/119046.html
영문위치: http://www.clearwisdom.net/emh/articles/2006/2/9/6979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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