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대륙 대법제자
[명혜망 2006년 1월 15일]오늘 아침 5시 30분에 벨소리가 울렸다. 수면이 부족하다는 집착과 게으름 속에서 나는 자명종을 끄고 또 자게 되었다. 이런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나도 이런 일체를 절대 승인하지 말아야 하며 이는 대법제자가 응당 있어야 할 상태가 아님을 알고 있다. 이것은 나로 하여금 아주 오래 전에 보았던 한편의 무협 소설을 기억나게 했다. 이야기에서는 한 협객이 당시에 따를 사람이 없을 정도로 높은 무예를 갖고 있었기에 적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치명적인 약점 하나가 있었다. 뭐든지 꾸물대는 것이었다. 긴급히 그의 구원이 요구될 때마다 매번 그는 지각해서 구원해야 할 기회를 놓치고는 결국 눈 앞에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 몹시 슬퍼했다. 그리해서 사람들은 그를 ‘지각 대왕’이라 불렀다.
우리 정법시기 대법 제자가 걸어가는 길은 사부님께서 안배하신 정진(精進)의 길로서 절대 꾸물거리며 시원스럽지 못하고 나태하고 소침해서는 안 된다. 비록 낡은 세력이 가장 표층에 남겨 놓은 사악한 요소와 공산 사악의 요소가 계속 교란하지만 우리는 대법이 있고 끊임없이 대법에 동화되어 충분한 능력으로 이 일체 장애와 교란을 돌파하고 정법 요구의 표준에 따라 매 일보을 바르게 잘 걸을 수 있다. 법의 요구에 따라 동시에 세 가지일을 잘 하지 못한다면 곧 진정한 정법 수련이 아니다. 세 가지일을 동시에 진행하는 과정에서 엄숙하게 정법의 길을 잘 걷지 못한다면 또 정진하는 정법시기 대법제자가 아니다.
중에서 한 수련생이 물었다. “일부 수련생들은 온 몸과 마음을 다해 대법을 위해서 일을 하는데 가끔 생명의 위험에 봉착합니다. 이는 아마도 그들이 개인수련을 소홀히 하여 일부 관을 잘 넘지 못해서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수련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관마다 잘 넘을 수 없는데 무엇 때문에 대법은 그들을 보호하지 않습니까?”
나는 이 문제를 읽었을 때 정말 감개무량 했다. 매 개인의 수련 경계는 정말 같지 않으며 매 개인이 자신에 대한 수련 요구 역시 부동하다. 그러나 우리 정법수련의 원칙은 문제에 부딪치면 안으로 찾고 자신을 봐야하는 것이 아닌가? 정법 수련은 조건이 없다. 사부님께서는 그 어떠한 때이던지 간에 우리를 핍박하여 수련하게끔 하지 않으셨다. 당신이 오고 싶으면 오고 당신이 수련하고 싶지 않으면 가면 되는 것인데 수련할까, 하지말까, 어떠할까는 모두 자신의 일이다. 법리는 일체를 똑똑히 말했다. 자신에 대해 책임질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은 모두 자신의 일이다. 그러나 이 수련생이 제기한 문제는 바로 코 앞에 놓인 마난 앞에서 자신을 보지 못했고 문제에 부딪치면 진지하게 자신을 반성하지 않고 진정하게 자신의 부족을 찾지 않으면서 도리어 사부님께 반문하며 문제를 밖으로 밀어내다 못해 사부님께 떠넘기기까지 하였다. 이것은 결국 자신이 구도되기 위해 조건을 제기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 자신들이 하는 것은 어떠하든지 막론하고 모두 편안하게 원만되며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단 말인가?
동수여!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한다! 만약 주불(主佛)의 자비한 일념이 없다면 전반 낡은 우주는 일찍 소훼되어 버렸을 것이다. 어찌 오늘의 정법 수련을 담론할 수 있으며 또 어찌 오늘의 우리들을 담론할 수 있겠는가. 어느 한 차례라도 우주가 파괴된 후 소훼되지 않고 재조(再造)한 적이 있는가? 그 어느 층의 생명이 파괴된 후 도태되지 않고 재생(再生)했는가? 낡은 우주의 성주괴멸의 기제(機制)는 곧 이러하다. 또 종래로 이렇게 하는 것이 자비하지 않다고 여긴 사람도 없었다. 사부님께서는 자비일념 중에서 우주 중생을 대신하여 자신에게 속하지 않는 고통을 감당하셨다. 내가 나의 아내에게 이 일을 말했을 때 아내는 말했다.”내가 느끼건대 우리 대법 수련생들 중 많은 사람들이 잘 하지 못하고 정진하지 못한 것으로 하여 조성된 것이다.” 나는 아내의 말을 듣고 오랫동안 침묵했다.
그렇다! 동수들에게 마난이 나타났고 심지어 어떤 동수들은 생명까지 잃었다. 그러나 정작 우리들은 진정으로 돌이켜 보았는가? 왜 우리에게 마난이 나타나는가? 왜 우리는 박해를 받는가? 왜 동수들은 생명을 잃었는가?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는가? 우리는 평상시에 엄격하게 자신을 요구했는가? 세 가지 일을 함이 어떠한가? 우리들이 동수에 대하여 상호 원용하는 작용을 일으켰는가? 수련생이 마난을 당할 때 진정으로 그를 대신하여 생각해 보았는가? 우리는 어느 정도로 마음을 다하고 있는가? 우리는 철저히 낡은 세력의 박해를 부정했는가? 우리는 이러한 문제에 있어서 누락이 있었는가 없었는가? 그럼 수련생은 누락이 있었는가 없었는가? 우리는 하나의 원용불패(圓容不敗)한 정체를 형성하였는가? 우리는 진정하게 이처럼 자신을 보았는가 보지 않았는가? 우리는 정법 수련 중에서 사(私)적으로 구하려는 마음을 품고 있진 않았는가? 정법에서의 모든 일들이 우리를 위하여 존재한단 말인가? 그렇다면 우리들 자신의 놓기 싫어하는 관념과 집착 때문에 정법의 표준이 바꿔져야 한다는 말인가? 물론 물음을 제기한 동수의 이 문제는 사부님께서 설법하실 때 제기하신 것으로 우연한 것이 아니다. 우리 광대한 동수들은 모두 반드시 자신을 보아야 하며 자신에게서 찾아야한다! 우리들이 수요하는 것은 곧 서로 원용하고 서로 보완하는 것이다!
낡은 우주의 성주괴멸의 기제하에 생명은 한층 한층 아래로 가라 앉는 중에서, 한층 한층의 후천 물질로 덮혀 있어 정말로 매우 깊게 미혹되어 있다. 구도하려면 정말 힘들다. 어떤 생명은 마치 하나의 사람처럼 그 자신이 살려고 하지 않고 억지로 우물 속에 뛰어 드는데 당신이 말해보라 어떻게 하겠는가를. 때문에 불(佛)은 갖은 방법을 다하여 그의 정념을 깨우치며 그의 미혹된 환상을 타파하고 그에게 생명으로 하여금 회귀하는 광명한 큰 길을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그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불(佛)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전혀 신경쓰지 않으며 자신의 길을 걷는 바 결국 그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속에서 조심하지 않아 길가에 넘어지게 된다. 불(佛)이 손을 내밀어 그를 일으켜 주려 하지만 그는 도리어 일어나려 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 자리에서 불(佛)을 원망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보라! 내가 당신의 말을 들었기에 길가에 넘어지게 되었다. 불(佛)이 그를 구도하며 구하려고 생각하지만 그는 도리어 애쓰지 않는다. 이는 곧 불(佛)에게 하나의 난제를 조성했다. 그러나 불(佛)은 쉽게 한 생명을 포기하려 하지 않기에 의연히 다시 그를 점오시키며 다시 그를 고무 격려하고 가지하면서 그에게 정념을 준다. 불(佛)이 구도하는 것은 그 한 사람만이 아니지 않는가! 불(佛)은 마음 속에 일체 중생을 갖고 있다. 불(佛)이 무엇 때문에 고통스러운가? 불(佛)이 무엇 때문에 난이 있는가? 불(佛)은 중생을 위하여 고통스러우며 중생을 위하여 고달픈 것이다. 난은 중생의 난이지 불(佛)의 난이 아니다. 사람이 어찌 불(佛)의 자비를 알 수 있겠는가?
한 생명의 고귀함은 그 사람이 그 어떤 직위에 처하여 있던지를 막론하고 그 얼마나 낮은 생명이던지를 막론하고 그가 자신을 청성하게 알고 자신의 위치를 똑똑히 알며 자신의 부족함을 보아내고 그것을 고치고 제고하려고 생각하기만 한다면 이 생명은 곧 희망이 있는 것이며 이 역시 생명의 가장 고귀한 일면이다. 이것이 곧 신이 아끼고 중하게 보는 것이다. 반대로 한 생명이 그의 경계가 얼마나 높던지를 막론하고 만약 청성하게 자신을 인식하지 못하고 자신의 위치를 바로 잡지 못하며 터무니 없이 우쭐대며 심지어 세상 물정을 모른다면 곧 매우 위험하다. 낡은 세력이 곧바로 이러하지 않는가? 방자하고 오만한 집착 중에서 자신을 잃으며 그들과 사부님과 정법의 일의 관계를 바로 잡지 못하여 정법 과정 중에서 도태되어버리기까지 한다. 주불(主佛)은 자비하다. 중생을 구도하시는 것은 오실 때의 홍원(洪願)이다. 물론 낡은 세력 자신과 극악무도한 공산 사령을 포함한다. 오직 그것들 자신이 대법과 대립하는 것을 선택함으로써 그것들이 도태되는 것은 우주 정법의 필연이다. 이 역시 그것들 생명의 액운이다.
수련하는 사람으로 말하면 수련의 길에서 매 일보는 모두 불법에 대해 견정한가 하는 고험이다. 정법시기의 대법 제자는 이미 개인 원만의 수련 노정을 걸어왔다. 정법의 길에서 정법의 일에 대한 인식이 어떠한가. 사부님과 진선인 우주 대법을 마지막까지 견정하게 믿을 수 있는가? 특히는 정법시기의 가장 마지막 시각에 대법 제자들이 매 일보를 잘 걸을 수 있는가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모두 극히 엄숙한 고험이다. 정법 노정의 끊임없는 추진으로 하여 정법은 이미 세간의 가장 표면까지 닿았는 바 대법과 대법 제자에게 남겨준 시간은 이미 매우 적고도 매우 적다. 이리하여 대법 제자에 대해 말한다면 또 하나의 새로운 환경과 새로운 조건 하에서 고험을 진행하게 된 것과 같다. 이 때문에 환경이 좀 느슨해지기만 하면 흔히 게으른 정서가 생기기 쉬우며 압력이 작아지면 심리적으로 느슨해져서 그리 다그치지 않게 되는데 이래서는 안된다. 실제상 한 수련하는 사람으로서 여러분은 어떠한 환경을 취하더라도 모두 정진하지 않을 수 없다. 느슨할수록 실제상 당신들에 대한 고험 역시 더욱 엄숙하다. 정황이 어떻게 변할지라도 수련의 조건, 수련 경지에 대한 요구, 이는 영원히 변치 않을 것이므로 여러분은 느슨해질 수 없다!’ ()
동수들, 우리 모두 사존의 말씀을 기억합시다! 우리 모두가 앞으로의 길을 더 잘 걸읍시다. 최후일수록 더욱 정진합시다!
문장완성 : 2005년 12월 17일
문장발표 : 2006년 1월 15일
문장갱신 : 2006년 1월 15일 21:28:14
원문위치: http://www.minghui.ca/mh/articles/2006/1/15/11865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