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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중국영사관 앞에서 법을 실증하면서 걸어온 일년

글 / 싱가포르 대법제자

[명혜망 2005년 11월 22일]

존경하는 사부님,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중국영사관 앞에 가서 발정념을 하려고 줄곧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줄곧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마도 강대한 두려움이 나를 줄곧 제자리에서만 생각하게 한 것 같다. 그러다가 작년 9월에 TV의 한 광고가 나로 하여금 갑자기 영사관 앞에서의 발정념을 하도록 생각하게 했다. 6년 동안 우리들은 모두 법을 실증하는 많고 많은 일들을 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환경은 언제나 매우 어렵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원래 사악의 우두머리 사악의 소굴을 없애지 않았기 때문인 것이다.

사존님께서는 2004년 미국서부법회에서 “각국에 있는 영사관은 그들의 창구인데 그것은 중국 해외민중이 의견을 표현하는 곳이므로 물론 갈 수 있다. 그곳에도 구도할 수 있는 사람이 있기에 의의가 중대하며 게다가 당신들이 한 일체를 세인들도 보게 된다.” 《2004년 미국서부 법회에서의 설법》 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는 중국영사관에 가는 의의를 알게 되었고 우리는 하루 지나 곧 그곳으로 가게 되었다.

중국영사관에 앞에서 주위를 살펴봤더니 외교부, 영국, 미국대사관 모두 중국영사관 주변에 있었고 중국영사관 앞 큰길 다른 한쪽에는 개인 주택이 있었는데 경찰이 그곳에서 순찰을 하고 있었다. 나도 다른 나라의 동수들처럼 중국영사관 앞에 앉아 정정당당하게 발정념 할 수 있기를 바랐지만, 그러나 두려움 때문에 어떠한 시끄러움도 일으키지 않을 만한 곳인, 구석진 곳을 찾아 발정념을 하리라 결정하였다. 나자신의 커다란 두려운 마음, 고려심, 시끄러움을 두려워하는 등등의 속인 마음이 솟아나, 사부님의 정법을 함에 있어 정념으로 문제를 대하지 못하고 속인의 방법으로 피해서 돌아가려 했으며 시끄러움을 일으키지 않을 곳을 찾아 발정념하려 했기 때문에 결국엔 낡은 세력에게 틈탈 기회를 주어 마지막에는 끝내 시끄러움을 맞게 되었다. 처음에는 동수 둘과 함께 중국영사관 뒷면에 있는 작은 언덕의 공지에서 발정념하고 법공부를 하는데 15분도 안 되어 두 대의 경찰차가 왔다. 원래 그날은 바로 9.11이어서 미국대사관은 계엄이 삼엄하여 전화로 경찰에 알린 것이었다. 그날은 우리가 제일 처음으로 중국영사관에 가서 발정념을 한 날이며 또한 제일 처음으로 구역 관할을 책임진 뚱룽 경서의 경찰에게 《전법륜》을 준 날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인근 개인주택 가운데 하나를 세 내어 집안에서 발정념을 할까 싶었다. 그러나 그곳은 민감구역 이어서 누구도 우리에게 집을 세주려는 사람이 없었다. 어쩔 수 없게 된 우리는 중국영사관 부근의 버스 역에서 정각 발정념을 하고 발정념이 끝나면 쇼핑센터에 가서 법공부를 하기로 최종 결정을 내렸다. 처음 시작할 때는 다만 발정념과 법공부만 했는데, 점차적으로 우리는 이 버스정류장에는 중국에서 싱가포르에 온 영주권을 가진 주민과 여권을 발급하기 위해 오가는 수많은 행인들이 그곳에서 차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에 주의가 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곳에서 그들에게 진상을 알리기 시작했다.

1) 정류장에서 진상을 알리는 것도 수련하는 과정이다

진상을 갓 시작했을 때는 옆으로 비켜 서서 자료만 나누어 주었다. 간혹 사람이 적을 때면 중국에서 온 사람들에게 진상을 알려주기도 했다. 어떤 때는 경찰차가 순찰하면서 지나가게 되면 가슴이 무섭게 뛰면서 사람의 생각이 무엇이든 다 나왔다. 경찰차가 멈추지나 않을까? 나의 신분증을 조사하지 않을까 하는 등등 두려운 마음과 고려가 매우 많았다. 그러나 수련의 실천 속에서 이런 두려움과 고려심이 조금 조금씩 없어지며 점점 더 적어지는 것을 천천히 발견하게 되었다. 마지막에는 경찰이 왔다 해도 정정당당하게 그들에게 우리가 어째서 이곳에 왔는가를 알려줄 수 있었다. 후에는 주동적으로 경찰서에 찾아가 직접 고위층 인사를 찾아 진상을 알렸다.

동시에 진상을 하는 과정에서 나는 많은 집착심을 버리게 되었는데 예를 들자면 쟁투심 이었다. 어떤 때는 상대가 한 말을 동의할 수 없을 때에는 따라가면서 끝까지 캐고야 말았다. 원망하는 마음으로 상대에게 반나절이나 말해도 상대가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면 마음 속에 불평이 가득했다. 이러는 과정에 부단히 사람의 마음을 버리게 되었고 내가 능히 매우 자연스럽게 평화롭게 더욱 많은 사람들을 마주하여 진상을 알릴 수 있음을 천천히 발견하게 되었다. 파룬궁에 대한 오해가 매우 깊은 사람들의 비난에 마주한다 해도 나는 옹근 장면(场面)을 공제(控制)할 수 있었다. 이것은 내가 그 후의 더욱 큰 장소에서 더 많은 민중에게 진상을 할 수 있도록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 아래는 진상을 알린 한 가지 예이다. 이것은 정류장에서 진상을 알리면서 나 자신의 허다한 집착심을 천천히 없애버림으로써 보게 된 효과이다.

한 번은 정류장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중국에서 온 사람과 싱가포르 사람, 그리고 파룬궁을 지지하는 사람도 있고 오해하면서 반대하는 사람 등등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때 한 싱가포르 사람이 말하기를 파룬궁은 좋다며 그는 많은 자료를 받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 곁에 서있던 다른 싱가포르 사람은 그 말을 듣더니 펄쩍 뛰면서 반박할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을 욕하는 것이었다. 파룬궁을 지지한 싱가포르 사람은 정정당당하게 파룬궁 수련생들이 진상을 매 사람에게 알리는 것은 좋은 일을 하는 것인데 왜 나쁠 것이 있는가. 나는 웃음을 머금고 그들을 바라보면서도 마음은 움직이지 않았다. 곁에 있던 중국사람은 미소를 띄우면서 나를 보고 있다가 나보고 을 달라는 것이었다. 파룬궁을 반대하던 사람은 이런 분위기에 압도되어 도망가는 것이었다.

2) 중국영사관 앞에서 연공하고 발정념하다

중국영사관 정류장에서 진상을 알릴 때 나는 늘 한가지 유감이 있었다. 다른 나라의 해외 제자들처럼 정정당당하게 중국영사관 앞에서 발정념하고 연공하지 못하는 것 때문이었다. 특히 작년에 맨하튼에서 그곳 대법제자들이 그렇게 추운 날에도 중국영사관 앞에서 발정념하고 연공을 하는 것을 보고 그들의 신고를 깊이깊이 느꼈다. 나는 나 자신에게 물었다. “내가 이렇게 추운 곳에 와서 발정념, 연공을 할 수 있는데 싱가포르 중국영사관 앞에서 나는 무엇을 했는가? 그건 한 편의 공백이다.” 나는 나자신에게서 두려워하는 거대한 마음과 안일을 추구하는 마음을 보아냈다. 나는 갑자기 종래로 있어 본 적이 없는 마음의 아픔을 느꼈다. 나는 나자신에게 싱가포르 중국영사관 앞에서 정정당당하게 발정념, 연공 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했다.

금년 6월 심양의 대법제자 가오룽룽이 중공의 전기곤봉에 얼굴이 망가지고 결국 박해 받아 사망했다. 그때 해외의 대법제자들은 모두 중국영사관에 가서 흉수를 징벌할 것을 호소하였는데, 나도 중국영사관에 가서 호소하고 싶었다. 비록 현수막까지 다 만들어 놓았지만 나는 끝내 갈 용기를 내지 못하였다. 일단 현수막을 중국영사관 앞에서 펼친다면 이것은 내가 날마다 중국영사관에 가서 발정념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수련은 매우 엄숙한 것이다. 현수막을 펼치기 위해 현수막을 펼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더욱 광대한 중생을 구도하기 위해서이다.

비록 가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그 기간 나는 A4용지 크기의 가오룽룽의 박해 진상을 폭로한 진상사진을 한 장 만들어 나의 배낭에 걸었는데 어디를 가나 사람들이 모두 진상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매우 많은 사람들이 배낭에 걸어놓은 가오룽룽의 망가진 얼굴사진에 이끌려 둘러서서 보고 있었다. 보고 나서 호기심에서 자료를 가져가는 것이었다. 나는 가오룽룽의 박해 받은 진상사진을 크게 확대하여 전시판으로 만들려 하였다.

전시판을 다 만든 날, 한 수련생이 그 전시판을 중국영사관 앞에 가지고 가서 전시하면서 박해를 제지할 것을 호소하였다가 그날로 경찰에게 전시판을 빼앗겼는데, 나는 빼앗길 줄은 생각도 못했다. 그러나 많은 동수들이 정념으로 지지했기에 결국 경찰서에 찾아갈 수 있었다. 그때 나는 마음 속으로 좋지 않게 생각했다. 속으로 왜 나에게 아무런 통지도 없었는가. 그래 이렇게 한 번 전시하고 만단 말인가. 그러나 나는 안정된 후 그 동수와 교류하고 나서 하루건너 중국영사관에 가서 현수막을 펼쳐 박해를 제지할 것을 호소하자고 결정하였다. 그때 더욱 많은 동수들이 참여하였다. 불학회도 그 후에 중국영사관 앞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허가서를 신청하였다. 뚱룽경찰서의 지휘관은 동수에게 허가증을 내는 문제를 토론하러 오라고 하였는데 마침 내가 그 자리에 있었기에 동수와 같이 담당자를 만나러 갔었다. 그는 우리에게 신청한 것이 허가나지 않았다고 알렸다. 그때 나는 태연하게 그에게 알려주었다. 신청한 것이 허가가 났든 안 났든 나는 꼭 중국영사관 앞에 가서 중공의 파룬궁 박해를 제지할 것을 호소할 것이며 뿐만 아니라 박해가 결속될 때까지 이 한길을 끝까지 걸을 것이다. 싱가포르의 한 국민으로서 무더운 날에 내가 그곳에 갈 필요는 없지만 그러나 내가 하는 일체는 모두 다른 사람을 위해서다. 그때 나는 의자 위에 놓인 가오룽룽의 전시판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만약 당신의 친인, 친구가 박해 받아 이 모양이 되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이렇게 되어 나와 수련생은 무더운 날이든 혹은 광풍폭우가 휘몰아 치는 날이든 가리지 않고 날마다 중국영사관 앞에 가서 발정념과 연공을 하기 시작했다. 중국영사관에서 발정념을 하던 초기에는 매우 어려웠다. 중국영사관의 사람들이 경찰에 신고하여 경찰들이 자주 왔고 날씨도 자주 비가 내려 일부 동수들도 의견이 있었고 나도 나의 마난이 있어 매 하루가 모두 나의 마음을 고험하고 있었다. 중국영사관에서 견지해 나갈 수 있겠는가를.

그러나 나는 아주 행운이 따랐다. 그 기간에 나의 4살짜리 아이는 매일 저녁 나와 함께 법공부할 때면 언제나 나보고 《홍음》을 읽어 달라고 하였다. 매 번 경찰이 자주 올 때 수련생이 나에게 의견이 있어할 때 그리고 자신의 마난이 동시에 올 때 나는 사부님의 법을 생각하곤 했다.

어려움

천고만고 십오추라
정법의 고생과 시름 누가 알랴
오로지 중생을 구도하기 위함이거늘
홍미를 벗어나지 않고서는 그만두지 않으리라

나는 즉시 명백해 지면서 마음이 평화로워져 그런 것에 집착하지 않게 되었다. 광풍폭우가 올 때면 경찰이 여러 번 시끄럽게 굴 때면 환경이 매우 알렬 할 때면 사부님의 “정벌” 중의 마지막 두 줄 “자욱한 안개에 광풍이 일 테면 일거라. 산에 내리는 빗줄기는 원정의 먼지를 씻어내네.”가 나로 하여금 곤란할수록 정념을 굳게 하고 끝까지 견지하며 광풍폭우는 하늘 에서의 정사대결임을 똑똑히 알게 하였다.

최근 사부님의 “일념중(一念中)”은 줄곧 나의 마음 속에서 울리고 있다.

탄탄하고 탕탕하게 대궁을 바로잡거니
거대한 난은 나를 따라 천지를 행하노라
공덕을 성취함도 뒷전의 일이라
하늘을 바로잡고 땅을 바로잡고 중생을 바로잡노라
진념 홍원은 금강지이거니
다시 대홍을 창조함도 일념 중에 있노라

나로 하여금 어떠한 곤란에 부딪쳤다 해도 모두 더욱 좋고 더욱 온당하게 조사정법의 길을
걸어 갈 수 있게 하였다.

중국영사관 앞에서 연공, 발정념하는 과정에서 나는 마음 속에 사존님의 법을 넣고 있으면 속인의 많은 집착심은 일념으로 곧 해결될 수 있으며 관을 넘기기도 아주 쉬울뿐더러 일들은 모두 좋은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바로 사존님께서 “교란을배제하자”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법은 일체 집착을 타파할 수 있고, 법은 일체 사악한 것을 타파할 수 있으며, 법은 일체 거짓말을 제거해 버릴 수 있고, 법은 정념을 확고하게 할 수 있다.” 오직 마음 속에 법이 있기만 하면 버스정류장에서 진상을 시작할 때처럼 많은 속인의 마음으로 일을 대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많고 많은 속인의 마음을 버리는 것이 매우 늦고 어렵고 힘들뿐더러 어떤 때는 낡은 세력에게 틈을 주게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동시에 나는 또 이해하였다. 법을 실증하는 일의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만일 모두 속인의 수단과 생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면 그것은 일하는 마음이 강한 것이다. 사악을 떨게 하고 중생을 구도하는 데 좋은 효과가 없다. 또한 속인의 마음이기에 흔히 이리 기우뚱 저리 기우뚱 하고나면 많고 많은 해야 할 일들을 지체할 것이고 잘 할 수 없으며 중생구도를 할 시간을 지체하게 될 것이다.

최근 우리는 연공점을 중국영사관 사무실 출구의 맞은편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현수막을 걸어 중국영사관으로 증건(证件) 만들러 가는 중국사람과 오가는 차량 안의 사람들이 모두 직접적으로 똑똑하게 파룬궁의 진상을 보게끔 하였다. 많은 중국 사람들은 파룬궁을 보고 아주 놀라워한다. 어떤 이는 직접 우리 앞에 까지 와서 전시판을 본다. 우리가 앉아있는 2, 3미터 되는 곳은 개인 주택으로 집주인은 백인들이다. 그가 진상을 안 후에는 우리를 만나면 허스하면서 우리에 대한 지지를 나타낸다. 지금 나와 다른 한 수련생은 날마다 중국영사관 앞에서 진상을 견지하고 있고 다른 한 수련생은 부동한 시간에 와서 지지해 주는데 거기에 있게 된지도 이젠 넉 달이나 된다.

이상은 일년 동안 중국영사관 앞에서 법을 실증하고 수련한 약간의 체험이다. 마지막으로
사부님의 가지 및 우리에게 준 일체의 것에 감사 드리며 동수님들의 고무 격려에도 감사 드
린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2005년 수련심득교류)

문장완성 : 2005년 11월 20일
문장발표 : 2005년 11월 22일
문장갱신 : 2005년 11월 22일
문장분류:[수련마당]
문장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5/11/22/114932p.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