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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근본 집착을 말하다

글 / 안훼이(安徽) 대법제자

[명혜망 2005년 12월 6일] 《대법은 이용당할 수 없다》에서 “관건은 이러한 사람은 마음속으로 결코 나를 그(그녀)들의 진정한 사부라고 인정하지 않으며, 대법을 배우는 목적은 대법을 이용하여 그(그녀)들 자신의 마음속으로 내려놓지 못하는 것 및 종교 중의 무엇을 보호하거나, 혹은 그(그녀) 들 마음속의 신을 보호하려 하는 데 있다. 이것은 법을 훔치는 행위이다. 대법을 이용하려는 생각 자체가 바로 용서할 수 없는 죄이다.”

원래 이런 말들은 다른 사람을 두고 말하는 것이지, 나 자신에게는 이런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나의 이런 생각은 나를 더 깊이 사색하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최근 동수들이 입문에 대한 근본 집착의 문제에 대해 써 놓은 몇 편의 글을 읽고난 뒤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입문할 때의 생각도 정말 그렇게 발랐던가?

먼저 번에 쓴 심득에서 《전법륜》은 한 권의 수련하는 책이고 그렇기 때문에 내가 수련하게 되었다고 한 말이 기억나는데 과연 내가 그러했던가? 나자신에게 반문해 보았다. 나에게 당시 다른 생각이 없었던가? 이렇게 생각해 보니 나의 집착을 찾을 수 있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마음—왜냐하면 수련을 하면 병에 걸리지 않을 것이고 신으로 수련되어 장생불로 할 수도 있다. 그리고 대법의 보호를 추구하는 마음—대법을 수련했으니 앞으로 어떠한 마난에 부딪혀도 사부님이 나를 보호해 주시기 때문이다.

며칠 전 남편은 어떤 사람은 온실의 화초라고 하면서 어떠한 고난도 겪지 못했다는 말을 했는데 나는 어쩐지 그게 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나는 대법에서 ‘온실의 화초’가 되어 대법의 보호를 받고 사부님의 보호를 받으려고 했던 것이었다! 비록 세 가지 일을 따라서 하고 중생을 구도하는 것도 우리들의 책임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긴박해지지 않았고, 자비심도 없었으며, 마치 임무를 완성하는 것처럼 억지로 하는 것 같았다. 사실 그것은 바로 이런 사심이 한 짓이었다.

사부님께서는 경문에서 “인간이여! 잘 생각하여 보라! 마땅히 무엇을 믿어야 하고, 무엇을 믿지 말아야 하는지, 무엇 때문에 수련하는지? 누굴 위하여 수련하는지? 생명은 누구를 위하여 존재하고 있는지? 나는 당신들이 이 이해관계를 바로 잡으리라 믿는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들이 잃게 되는 것은 영원히 다시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대법이 인류에게 펼쳐질 때에 당신들이 잃어버리게 되는 것은 아직 이러한 것에 그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그래 우리들의 근본 집착을 말한 것이 아닌가? 사실 끝까지 파고들면 이런 근본 집착은 모두 위사위아(槨降槨乖)이다. ‘사’자는 마치 하나의 나무 뿌리와 같고, 크고 작은 집착은 마치 나뭇가지와 나뭇잎 같았으며, 우리는 단지 이런 나뭇가지나 나뭇잎만 잘라버리려고 한다. 그러나 이 쪽에서 잘라버리면 저 쪽에서 나오고, 우리는 또 잘라버려야 하기 때문에 힘들고 피곤한 것을 느낀다. ‘수련이 힘들다!’는 것은 많은 동수들의 감수이다. 사실 우리는 근본적인 것을 내려놓기 싫어서이다. 어떤 동수들은 병을 낫게 하려고 ‘잘하고’, 어떤 수련생은 박해를 받지 않으려고 ‘잘하고’, 어떤 수련생은 또 원만을 위하여 ‘잘하려고’ 한다. 하지만 바로 이런 것들 때문에 우리들은 잘하지 못하게 되고, 무거운 짐을 메고 힘들게 걸어가기 때문에 수련이 힘든 것이다!

우리는 사유방식을 개변해야 하고 사부님의 말씀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말만 찾으면 안 된다. 예를 들면 사부님께서 “능히 걸어나올수 있는 것은, 곧 중생의 왕이다” 《대뉴욕지역 법회에서의 설법가 해법》라고 말씀하신 것을 곧 사람의 마음으로 참고 견지하는데, 법정인간 그 순간까지 ‘견지’ 하면 곧 승리라고 생각하고, 끊임없이 사람의 마음을 버리지 않으며 법 속에서 자신을 순정하게 하지 않는다. 만약 법공부할 때도 사람의 마음으로 가늠한다면 사부님의 말씀이 자신에게 ‘유리’ 하다고 생각하면 듣기 좋아하고, ‘유리하지 않으면’ 곧 듣지 않거나 중시하지 않으며, ‘위험이 있으면’ 구실을 찾아 오직 자신이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일만 하는데, 이것은 사부님의 법을 자신의 관점에 따라 보류하면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근본적으로 견정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예를 들면 사부님께서는 우리들을 《전법륜》을 볼 때 한 편도 빠짐없이 보라고 하셨다. 표면적으로는 했지만 사실 마음속으로 그러하지 않았다. 심성제고에 유관한 장절을 볼 때 세심하고 내심있게 보지만, 사부님께서 기를 훔치다, 기를 채집하다, 대소주천순환 등을 말씀하실 때, 늘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장절을 중시하지 않는다. 매 번 이런 장절을 읽게 될 때면 항상 억지로 보아 내려 간다. 그러나 ‘환희심’, ‘청정심’, ‘수구’ 등 장절을 볼 때면 정신을 차리는데, 그것은 형성된 사를 위한 그런 관념들이 “사부님의 이런 말씀은 나의 제고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표면적으로 보기에 심성제고와 상관이 없는 말씀을 사부님께서 왜 말씀하셨을까? 비록 나는 지금까지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은 사부님의 매 한 마디는 우리는 모두 마음을 조용히 하고 봐야 하고, 중요하다거나 중요하지 않다거나, 급한가 급하지 않는가에 따라 보기 좋아하고 보기 싫어한 것을 가려서는 안 된다. 매 번 이 일념이 나올 때면 우리는 모두 배척하고 제거해야 한다.

관념의 개변은 너무나 중요하다. 많은 동수들이 사악에 직면했을 때 담담하고 흔들리지 않았는데 정말 사람을 탄복하게 한다. 그러나 나 자신은 왜 그렇게 강한 정념이 없단 말인가? 근본을 파고 들면 이것도 관념 때문이다. “상대는 너무 강하다 (속인의 공검법(公检法)을 말한다) 나는 어떻게 사악을 피할 것인가, 다른 사람이 내가 진상을 하는 것을 알면 이해하지 못할까봐” 등 속인의 마음들이 나의 정념을 약해지게 한다. 이런 관념은 나오다 말다 하는데, 우리를 피동의 위치에 있게 하고 우리를 기점에 잘 서지 못하게 한다. 사부님께서는 “대법제자야 말로 이곳에서 휘황을 체현할 자격이 있다” 《2005년 유럽법회에게》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들이 마땅히 바르게 서야 할 기점이다. 사실 대법제자는 이미 사악을 해체시키는 일체 능력이 구비되어있고, 가끔 우리는 그렇지 않지만 정념의 거대한 위력을 인식하지 못하고, 자신을 약자의 위치에 놓고는 대법제자의 칭호를 더럽혔으며 사부님의 자비로운 고심 제도를 저버렸다.

나는 이상의 집착을 발견했지만 어떻게 고험 앞에서 잘 하고, 실천 중에서 법을 실증하고, 사부님의 말씀을 증실하는 것에 대하여, 나는 아직은 많이 부족하기에 매우 부끄럽다. 하지만 내가 잘 하지 못한다고 하여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나의 이런 집착들을 써내어 그것을 동수들 앞에 폭로하여 더욱 잘 제거하려고 한다.

문장완성: 2005년 12월 5일
문장발표: 2005년 12월 6일
문장갱신: 2005년 12월 5일 23:34:58
문장분류:[수련마당]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5/12/6/115947p.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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