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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남을 위해 생각하는 것인가?

글/ 독일 파룬궁 수련생

[명혜망 2005년 11월29일] 나는 전에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들은 적이 있는데, 바로 천당과 지옥의 차이점에 대해서였다. 사실 지옥의 사람들은 먹을 것이 하나도 부족하지 않았고 그들의 밥상에는 풍성하고 맛이 좋은 음식들이 수없이 많았다. 그러나 그들 매사람마다 모두 매우 긴 젓가락으로 스스로 반찬을 집어 먹으려고 하니 결과적으로 누구도 먹지 못했으며, 여러 사람들은 모두 이 밥상의 산해진미를 보면서도 굶주림의 고통을 받아야 했는데 매일마다 배가 고파 창자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그러나 천당에는 마찬가지로 풍성한 맛이 좋은 음식이었고 똑같이 긴 젓가락을 가졌다. 그러나 천당의 매사람마다 모두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였기에 그들은 긴 젓가락으로 서로서로 먹여 주었다. 결국 매사람마다 모두 배부르게 먹을 수가 있었고 모두 즐거워 하였다.

* 많은 대법의 항목과 ‘나의’ 항목 사이의 관계

나는 더욱 많고 많은 대법제자들이 날따라 정진하고 법에 대한 이해도 날이 갈수록 깊어짐에 따라 한가지 현상이 날이 갈수록 돌출해지는 것을 발견했는데, 바로 많고 많은 제자들이 진상을 알리는 많고 많은 진상 항목에 참여한 것이다. 몇 년 전에, 독일에는 몇명의 수련생만 바삐 보냈지만 그러나 지금은 거의 모든 대법제자들이 모두 바삐 보내고 있다. 진상을 알려 중생을 구도하는 범위도 더욱더 넓어졌고 방법도 점점 많아졌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나의’항목과 기타 항목 사이의 관계를 잘 처리하지 못하였는데 아래에서 하나의 기본적인 예를 든다면 아래와 같다.

* 두 시간에 6가지 화제

내가 살고 있는 독일의 도시에서 한주일에 한번 단체 법공부가 있었다. 이 도시는 대도시라 발생하는 일들도 매우 많았다. 법공부를 마친 후, 우리는 일반적으로 2-3시간 가량 교류를 하였다.

지난 주에 우리는 법공을 마친 후 2시간동안 많은 화제를 담론하게 되었지만 어떤 것은 시간의 관계로 한마디만 언급되었다. 중국에 전화 진상을 하는 것, 유럽의 ‘당신을 위하여 왔습니다’ 합창단, 후(胡)씨가 독일을 방문할 때 발생한 일, 후씨가 스페인을 방문할 때 발생한 일, 매주 토요일에 시 중심에서 진상을 알리는 부스 등이다. 결국 시간이 부족하여 문제점에 대한 법리상에서의 깊은 교류가 없었다.

토론하는 과정에서 나는 일부 수련생은 여러 사람들과 한가지 문제점을 토론하기 위하여 단체 법공부에 참석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지만 나는 가히 이해한다. 그러나 만일 이런 염두가 너무 강력해진다면 다른 사람이 한가지 문제점에 대하여 교류가 아직 명백하지도 못하였을 때, 조급하게 자신의 말하고자 하는 항목으로 대화를 옮기게 할 수가 있다. 이것은 내가 생각하기에는 하나의 자아에 대한 집착이며, 또 ‘나의 항목에 대한 집착’일 수가 있다.

나는 우리가 토론하고 일부 일을 함에 있어서 토론을 위하고 일을 하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며 그것은 우리들이 수련하는 하나의 기회라고 이해한다. 만일 우리가 능히 조용하게 다른 사람의 말을 기울여 듣고 안으로 찾으면서 다른 사람을 따라 배우거나 혹은 다른 사람의 교훈을 섭취하고 사상상에서 적극적으로 다른 항목에 대한 토론에 참여한다면, 마찬가지로 제고를 가져올 수가 있다. 비록 우리는 ‘자신’의 일에 대하여 토론하지 않더라도 심성이 제고 되었기에 우리는 마찬가지로 다른 일들을 잘해 나갈 수가 있다.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한가지 문제점에 대하여 심도 깊은 교류가 있을 수도 있지만, 오직 법리에서 진정한 인식을 가져야만 일을 잘 할 수가 있다.

시간이 없어 담론하지 못한 문제들에 대하여는 후에 우편이나 전화상으로 다른 동수들과 담론할 수가 있다. 물론 예외도 있다. 바로 어떤 큰 일이 발생하기 직전에는 이에 대한 진행될 활동들에 대하여 토론하고 교류하여 이해 해야지 일이 발생한 다음 다시 토론하여서는 안되는 것이다.

더욱 많은 사람들이 ‘나의’ 항목에 참석하기를 희망한다

나는 또 대부분 하나의 항목을 꺼내어 토론하는 수련생들이 모두 그들이 참여하는 항목이 어떻게 중요하다고 강조하며 더욱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것을 희망한다는 것을 보았다. 내 개인적인 인식으로는 다같이 매개 항목의 상황과 중요성을 교류하여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의 정체가 되게 하는 것은 매우 필요할 뿐만 아니라 더욱 많은 수련생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법을 실증한다면 당연히 더욱 좋다. 그러나 한계가 있는 인력으로 매 항목들이 모두 더욱 많은 일손들을 얻을 수가 없고, 그리고 여러 사람들이 모두 하나의 ‘제일 중요하다’는 항목만 하고 기타 마찬가지로 중요한 항목을 폐기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각개 항목 사이는 서로 부족점을 매꿔주는 역할을 하기에, ‘깨알을 주었다고 하여, 수박을 버려서는 안되다’는 것 처럼, 하나도 빠지면 안된다.

사부님께서는, ‘그렇기 때문에 어느 방면도 모두 중요하다. 당신들은 이것도 홀시해서 안되고 저것도 홀시해서는 안된다.’(《2004년 뉴욕국제법회설법》 중)라고 말씀하셨다. 나의 생각에는 하나의 항목의 중요성을 담론할 때, 가히 두가지 심태가 있을 수 있다. 하나는 구하는것이 없는 상태에서 바로 여러 사람들에게 이 항목에 대한 상황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항목의 소개을 통하여 더욱 많은 사람들을 얻고자 함을 희망하는 것이다. 나는 이런 마음이 이미 잠재 의식중에는 자신의 항목을 다른 것보다 더욱 중요하게 보고 있다는 것을 표명하였다고 생각한다. 모두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항목에 중시를 가지기를 희망하지만 자신은 다른 사람들의 항목에 얼마나 중시하고 있는가?

내가 느끼건대, 만일 자신의 항목에 너무 중시를 하다보면, 늘상 나의 항목 이외의 다른 항목에 대하여 사상상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심태가 없어지고 혹은 귀로 듣고 있지만 그러나 다른 항목을 어떻게 더욱 잘 할 것이며 나는 어떻게 최선을 다하여 도움을 줄 것인가에 대하여 적극적이지 못하게 된다고 본다. 나는 또 어떤 수련생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항목에 참여하지 않으면 쉽게 실망하고 심지어 성을 내기도 하는 것을 보았다. 이렇게 간격은 바로 수련생들 사이에 생기게 되었다.

먼저 자신의 잠재력을 발굴하고, 밖으로 찾지 않는다

그외 나는, 처음에는 단지 몇 명의 수련생이 참여하는 항목들이 후에는 매우 잘 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는데 그것은 인원이 많아져 그런 것이 아니라 이 몇 명의 참여한 수련생들은 수련을 통하여 제고되어 능히 일들을 예전 보다 더욱 잘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미 어떤 항목에 참여중인 수련생들의 잠재력은 새로 들어온 수련생들이 가지고 온 잠재력보다 적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대법제자들은 대법이 수련해낸 지혜를 갖고 있으며 천천히 수련중에서 정진함에 따라 하나가 가히 십, 백개에 필적하게 되었다. 우리는 마땅히 먼저 내심으로 찾고, 집착심을 버리며, 자신의 관념을 돌파하여 어떻게 자신의 잠재력을 발굴해야 하는 것을 보고, 더욱 잘 하여 이 방면에서 우리는 마땅히 새로 참여하는 사람들을 찾는 것보다 더욱 많이 노력하고, 더욱 많은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 * * * *

교류중에서, 한 수련생이 ‘응집력’을 제의하였다. 나는 이것은 우리의 서로간의 태도에 달렸으며 만일 우리가 모두 같이 기타 항목을 생각해 줄 수 있다면 매 항목마다 모두 ‘배부르게 먹을 수 있고’, 우리 또한 ‘배고픔에 시달리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문장완성: 2005년 11월 28일
문장발표: 2005년 11월 29일
문장갱신: 2005년 11월 28일 21:46:04
문장분류: [수련마당]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5/11/29/115454p.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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